본문 : 사도행전 13장 32-43절
서론 : 중요한 것일 수록 더 냉정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기존에 자신이 어떤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과 틀을 깨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신이 그동안 철석같이 믿어왔던 것, 그것도 다른 것들을 위한 전제로 삼을만큼 아주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버리거나 혹은 큰 폭으로 수정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고 또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했을 때, 그 중요한 것이 더 바른 기초 위에 더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미칠만큼 중요한 것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내가 이미 알고 또 믿고 있는 내용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알고 있는대로 고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올바르게 알고 믿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항상 더 바르고 견고하게 세워가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복음은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사람들은 대개가 ‘다른 것’을 일단은 ‘틀린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만 할 때는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막상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듣거나 보면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처음 복음이 전해질 때, 복음이 그랬습니다. 복음은 기존의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흔들고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가장 중요한 내용 면에서 그랬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기둥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과 ‘율법’이었습니다. 누군가 다윗의 혈통을 받은 왕이 나타날 것이고 그가 이 땅위에 메시야 왕국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 그 백성의 자격을 얻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틀을 뒤흔드는 낯설고 공격적인 주장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우선 복음은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심지어는 다윗이 다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절대로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은 메시야는 죽기는 죽어도 그 시체가 썩어서는 안된다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죽으면 다 무덤에 묻히게 되고 그러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다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그 예언을 전해 주었던 다윗 자신도 죽어 자기 조상들이 묻혀있는 무덤에서 썩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을 이룰 사람이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그토록 기다려온 그 메시야는 다윗같은 왕이 아니라 예수님일 수 밖에 없다고 선언합니다. 게다가 그 메시야는 이 땅에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죽도록 내줌으로써 구원을 이루었다고 선언합니다. 또 하나 복음은 율법을 구원의 유일한 길로 생각해 왔던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은 실패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단 하나 밖에 없는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서 자신이 가는 길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며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이 틀렸으니 정반대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런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심사숙고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들 중에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더 나은 진리, 더 온전한 구원의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어놓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도전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가만히 읽어보면 굉장히 논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이야기하면서 그 속에서 이어져 왔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듣는 사람들의 감정이 아니라 생각을 자극하는 이야기 입니다. 바울은 메시야에 대한 나의 주장이 맞나 틀리나를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라고 안디옥의 유대교인들에게 도전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바울의 이러한 도전에 대해서 많은 안디옥 사람들이 올바른 반응을 했고 그렇게 해서 참된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믿음과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들을 때 보여야할 올바른 반응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하기 전에 감정적인 반응부터 나타냅니다. 그동안 내가 생각하고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니 무시하고 거부하며 심한 경우에는 나중에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힘을 이용해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몰아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감정이 앞서게 되면 이미 옳고 그름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더 바르고 온전해 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소소한 문제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것이라면 그 부작용은 굉장히 심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40절 이하를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나서 청중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 입니다. 도저히 복음을 전한 뒤에 전해질 메시지 같지가 않습니다. 복음 뒤에 멸망이 선포되다니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이라는 가장 은혜로운 소식을 전하면서 그 끝에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에 복음은 밝은 것입니까? 아니면 어두운 것입니까? 밝은 것이죠. 밝은 정도가 아니라 아얘 빛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복음이 사람들에게 찬란한 빛이 되어주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복음을 향해 서 있을 때, 복음을 향하여 돌아설 때 그 때만 빛이 되어줍니다. 만약 그가 복음으로 부터 등을 돌리게 된다면, 그 복음을 멸시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복음은 그 복음이 밝은만큼 그 사람에게 더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복음은 그 사람을 그 깊은 어두움 속에 내버려 두게 됩니다. 다른 진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진리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 진리를 거부했을 때 생겨나는 부작용의 크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집니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내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무시하는 것들 중에 이런 것들이 들어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약 이런 것들이 하나 둘씩 쌓여간다면 우리의 영혼은 정말 심각한 어둠 가운데 거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경우에는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박국의 말씀대로 “놀라고 망하는” 처지가 될 지도 모를 일입니다.
비록 바울이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지만 그 자리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은 아주 성숙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일부는 설교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는 바울에게 그 다음 주 안식일에도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당장 그 자리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던 사람들에 비하면 이 사람들의 반응은 소극적이고 유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무언가 진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가 진지하게 말해지고 있다면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신앙과 관련된 것이라면 내 생각과 그 이야기 중에서 정말 옳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물어보고 혼자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그래도 평소에 신뢰할 수 있었던 목회자에게 상담을 요청해 보아야 합니다. 거부하고 거절하는 것은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내가 바뀌어야 한다면 나를 바꿔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항상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닌데, 만약 나만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서 진짜 옳은 것을 무시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중에서는 설교의 내용보다도 설교의 형식이나 스타일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쉽고 재미있는 설교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면서도 설교가 조금 복잡해 지고 당장의 자기 관심사와 별로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면 이내 귀를 닫아 버립니다.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여겨지면 눈을 감아 버립니다. 아마 이런 분들은 그 때부터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회원 여러분,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재미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취향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청중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것들이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입니다. 그 설교자의 설교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메시지 말입니다. 귀는 그 메시지를 향해 열어놓으셔야지 설교의 형식이나 재미, 그리고 내 취향을 향해 열어놓으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들려주려고 하셨던 것, 그리고 진짜로 들어야 할 것들은 놓치고 맙니다. 내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결국 진짜 중요한 것들을 멸시하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이런 것들이 앞서지 않도록 삼가면서 들어야 합니다. 적어도 듣고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는 남겨놓아야 합니다. 도무지 듣지 못할 정도로 말도 안되는 설교가 아니라면, 저건 설교가 아니다라고 여겨질 정도로 엉망진창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이유에서건 눈을 감고 귀를 닫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고 냉정하게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옳은지 들려오는 이야기가 더 옳은지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많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바울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런 그들에게 복음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말해 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명한 후에 안디옥의 성도들에게 권면한 내용이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것이었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이 말은 얼핏 보면 누구나 다 해 줄 수 있는 평범한 권면이나 축복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을 설명해 준 후에, 어찌보면 그들에게 남긴 유일한 권면이 바로 그렇게 평범한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는 말이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이 말을 그냥 흘려 버려서는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은혜”라는 말을 들으면 다분히 감성적으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하면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의 마음 상태를 유지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그 감사함을 잘 지켜내라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그런 의미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라는 말이 “복음”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면 이 말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모두 함축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말이 됩니다.
당시의 유대교인들은 무엇보다도 율법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통해 의인이 되기도 하고 죄인이 되는 그런 구도에서 자신의 신앙을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번번히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일과 그것을 통해 의로워지는 일에 실패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집착했습니다. 율법이 실패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이 들려졌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로움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이 들려진 것입니다. 다행히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만, 대개가 그렇듯이 이 일이 이전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틀을 일순간에 완전히 깨뜨리지는 못했습니다.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복음은 무효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말 것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 된 의로움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들이 얻은 구원이 무효가 될만한 위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항상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권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권면이야 말로 그들을 구원 안에 안전하게 머물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권면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라” 이 말씀은 그냥 듣기에는 그저 은혜롭게만 들리지만 막상 그렇게 해 보려고 하면 이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찌보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율법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인 사고방식은 유대인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율법적인 사고방식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모든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존심을 세우고 만족을 얻으려는 노력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와 사고방식은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이 생기면 “내가 교회를 열심히 섬기지 못해서 그래”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평안한 일, 축하할만한 일이 이어지면 “하나님 열심히 믿더니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너희 어머니가 기도 많이 하셔서 네가 잘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설명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여전히 무슨 일이든 그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는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통과 고난은 내가 신앙생활을 잘 못해서 생겨나는 벌이고 좋은 일이 생기고 복을 받는 것은 내가 신앙생활을 잘 했기 때문에 받는 상이라는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로 들어온 사람이 기억해야할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항상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신앙과 구원의 은혜됨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 바꿔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처음에는 철저히 은혜에 의지해서 믿고 구원을 얻게 되지만 그 다음에는 내 노력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그 댓가로 복을 받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점점 더 깊고 온전하게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더욱 더 그 은혜에만 기대어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과정이 바로 신앙생활이고 신앙성숙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속에 여전히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는 율법적인 사고방식들과 싸워야 합니다. 계속 싸워서 하나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그런 사고방식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음은 복음으로, 은혜는 은혜로 지켜질 수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큰 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고 복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좋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나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이것이 신앙의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은 그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 은혜 안에서 은혜를 누리자
유대인들과 이방인 유대교인들에게 복음은 그다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것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들었을 때, 자신들이 알고 있었던 것들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진지하게 들려오는 복음의 메시지에 적어도 진지하게 반응하였고 그들 중 많은 수는 그 복음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과제가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율법적인 사고방식을 청산하고 철저히 복음중심, 은혜중심의 사고를 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은혜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과제는 그 때 복음을 믿었던 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과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믿고 은혜 안에 거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제를 충실히 풀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은혜의 은혜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그 은혜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자유도 놓치게 되기 쉽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 있는 틀을 깨라는 신앙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큰 틀에서건 작은 부분에서건 그런 요구는 계속해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깨져야 할 것이 있으면 깨지는 것이 더 좋고 무너져야 할 것이 있다면 무너지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세울 수가 없고 언젠가는 더 심각하게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고 바르게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고 냉정하게 무엇을 택해야 할지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율법이 아니라 항상 은혜 안에 머물라”는 주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대면하셔서 내가 익숙해져 있고 또 나를 뿌듯하게 하는, 그래서 내려놓기 힘든 율법적인 틀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런 틀들은 전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해 주지 못합니다. 복음의 풍성함도 알려주지 못합니다. 복음의 풍성한 은혜와 자유는 그런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만큼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은혜 안에 머무는 이 싸움을 계속하셔서 복음이 주는 풍성한 자유와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