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1-09-25
본문 : 사도행전 15장 36절-16장 5절
서론 : 교회를 위하는 최선의 방법은 고민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모두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과 선택들이 교회를 잘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라고 확신하면서 교회를 섬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일을 놓고 생각하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판단을 하게 되고, 다른 주장을 하게 됩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는데 있어서도 의견차이를 보입니다. 때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선택한 것이 최악의 선택이 되기도 하고 당시에는 정말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강하게 주장해서 그렇게 되도록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겨납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 때문에 성도들은 상처를 받게 되고 교회는 혼란스러워지고 어려움을 겪으며 침체하게 되는 경우가 그렇게 드물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와 갈등들을 다 완전히 없애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그 어떤 갈등과 어려움도 없는 그런 완전한 교회는 우리가 하늘나라나 가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서 내가 내리는 판단과 선택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런 아픔과 부작용들을 최소한으로 줄여나가는 방법을 찾아 일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이것을 위한 어찌보면 가장 기본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원칙 한 가지를 찾아 보려고 합니다.
당황스러운 사건 두 가지
오늘 본문에는 우리를 적어도 조금은 당황스럽게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두 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서게 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과 바나바는 아주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하고 나서 교회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을 때 바나바는 자신의 평판이나 사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사도들에게 추천하고 교회에 받아들여지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바나바는 사울의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바울은 나중에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사역할 때, 바나바의 요청으로 다소를 떠나 안디옥으로 가서 바나바와 함께 일했고, 나중에는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을 동고동락하며 사역한 후에 이제는 함께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동역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이 2차 선교여행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갈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 아주 날카로운 의견대립을 보이다가, 결국은 서로 갈라서고 맙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쉽게 갈라서다니 이런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두 사람은 과연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우리이런 두 사람의 모습에 실망하고 의심을 품게 됩니다. 특히 바울은 왜 이 정도의 갈등도 원만하게 풀지 못하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이고, 한 번 실수했다고 마가를 그렇게까지 강하게 거부하다니 어찌보면 너무 사랑 없고 냉정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번째 사건은 어찌보면 더 당황스럽습니다. 더베와 루스드라로 간 바울은 거기서 이미 그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던 디모데에게 할례를 줍니다. 그 이유는 그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의 바울의 할례에 대한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결코 할례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고, 오히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여기 와서는 일종의 타협을 합니다. 유대인들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확신이나 신념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 일 하나만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위에 기록된 사건과 함께 놓고 보면 더욱 혼란스러워 집니다. 언제는 별것 아닌 일가지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은인과도 같은 바나바와도 헤어지더니 이제는 정말 중요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양보하고 타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이 두 개의 사건은, 바울의 미숙함과 우유부단함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바울의 젊은시절의 실수로 생각되어져 오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행하셨다는 은혜로운 교훈을 결론으로 남기면서 말입니다. 물론 바울도 인간인지라 결코 완전한 사람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실수와 잘못도 저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본문은 바울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건 1. 바울이 바나바와 결별하다
우선 첫번째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바나바에게 이미 두 사람이 함께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그들을 돌보고 견고하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생각은 너무나 지혜로운 것이었었습니다. 당시 교회들은 그렇게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충분하고도 긴급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당시의 교회들은 이제 막 태어나 조금 자라난 아이들을 혼자 지내도록 놓아둔 상태나 마찬가지 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도 여기에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그 문제의 화근은 마가 요한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두 사람이 1차 전도 여행을 할 때 동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여행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밤빌리아에서 중도하차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런 마가 요한을 이번 여행에도 반드시 데리고 가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나바는 굉장히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 많고 사람을 향한 인내와 섬김이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한 번의 실수로 마가 요한을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그는 아저씨로서 자기 조카가 평생을 선교의 낙오자라는 오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벗어나게 해 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마 마가 요한도 동행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을 것이구요. 물론 그런 개인적인 이유와 더불어 젊은 사람을 데리고 가게 되면 그 여행이 더 역동적인 여행이 될 것이고 여러가지 상황에 민첩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바나바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굳이 마가와 동행하기를 그렇게 고집했다는 것은 그런 이유들 보다는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복음으로 인한 핍박이 여기 저기서 생겨나기 시작했고, 자신은 유대인들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불확실해져 가고 있었고 그만큼 복음을 더 빨리 전하고 어린 교회와 성도들을 돌봐주어야 할 필요는 급하고 절실했던 것입니다. 아마 마가는 바울이 보기에 그 때까지도 확실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상태였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이런 긴급하고 절실한 사역을 위한 여행에 또다시 마가를 동행하는 모험을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결정은 단순히 마가 한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내린 결정이 아니었고 그가 그렇게 고집을 부린 이유 또한 개인적이거나 감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서 무료 학교급식 문제로 주민투표가 있었습니다. 왜 그 투표가 이루어졌습니까? 무료급식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양쪽의 주장이 너무 팽팽했고 그래서 내부적으로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제 3자인 주민들의 의견을 물었고 거기서 결론을 내려주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그랬습니다. 결국 끝까지 그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했죠. 그래서 두 사람은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40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이 구절은 안디옥 교회의 공식적인 파송을 받은 것은 바나바와 마가가 아니라 바울과 실라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안디옥 교회가 바울이 옳다고 바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성경은 그 결과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이 기록은 바울의 결정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바울의 그러한 결정을 옳다고 보신 것이고 그래서 그의 사역을 순조롭게 인도하시고 복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사건 2.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하다
두번째 사건도 그렇습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 때문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원칙없이 흐지부지 타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장 1절부터 3절을 보면 성경은 디모데가 그 지역의 교회들로부터 인정과 신임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혈통에 대해서는 어머니는 유대인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고 말해주고 있는데 그 사실을 그 지역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그에게 할례를 주었던 것이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 때문이었다고 밝힙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아버지가 유대인이면 무조건 유대인이지만 어머니가 유대인이어도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유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유대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었습니다.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그저 한 사람의 개인의 자격으로 교회에 있을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공인, 그러니까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져야 했을 때는 그것이 장벽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의 유대인들 때문입니다. 당시 교회는 아직은 회당에서 전파된 복음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들이 다수와 중심이 되어 있었고, 이들은 아직 유대인이라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들의 눈에 보기에는 디모데는 완전한 언약백성이라고 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자신들을 이끌 지도자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나 비슷한 것입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보겠습니다. 제가 아무 직분도 없이 여러분과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속적인 습관이 남아 있어서 술마시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구요. (지금 제가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디 가셔서 장목사가 아직도 술마신다더라 하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후에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저를 목사로 인정하려면 적어도 제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할까요? 그렇죠. 술 마시시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목사는 술마시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바꿀 수 없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말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디모데가 그 지역의 목회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거기 천년만년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는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계속해서 돌봐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돌보는 사역을 해야 했던 디모데에게는 그래서 할례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 문제는 언젠가는 교회 안의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그런 일이었고, 당장 디모데가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일에도 장벽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바울이 그 지역의 교회들에게 전해 주었던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 구절에서 규례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규례를 말합니다. 그것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목 매어 죽인 것을 먹지 말 것. 둘째, 피를 먹지 말 것. 세째, 우상의 더러운 것과 관계를 맺지 말 것. 네째 음행을 하지 말 것. 이렇게 네 가지였습니다. 비유대인들인 이 네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들은 그냥 유대인으로 남아있으면 됩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던 것을 모두 지키면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의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지 않은 디모데는 적어도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이상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는 아직 교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대인들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건의 참된 가치와 의미 : 복음과 하나님을 위한 자기포기
겉으로 보기에 이 두 개의 사건 속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언제는 너무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한 가지에 집착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또 언제는 정반대로 너무 쉽게 중요한 것을 내어주는 일관성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상반되는 두 가지가 아니라 오히려 정확히 일치하는 일관성있는 하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이미 사도행전과 신약의 바울의 서신서들을 읽어보셨을 줄로 압니다. 이제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그 속에서 바울이 정말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그것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는 복음이고 둘째는 그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그의 머리와 마음 속에는 그 어떤 것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어찌보면 은인과도 같은 바나바와 대립하고 결별하기까지 고집을 부렸던 것, 마가 때문에 사랑없고 매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감수했던 것, 그리고 디모데에게 원칙적으로는 전혀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할례를 받게 했던 것은 실은 그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내려야만 했던 어려운 결정들이었고 기꺼이 짊어진 짐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복음을 더 많이 전할 수 있고, 교회들을 더 잘 섬길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거기에 가장 적합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 그 수가 날마다 더해지는 은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그러한 행동과 결정들은 결코 개인의 부족함과 미숙함이 만들어낸 실수가 아니라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심사숙고하여 선택된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러한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교회를 위하고 또 하나님을 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결론 :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우리는 누구나 내가 속한 교회가 좋은 교회와 행복한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의 열심과 열정만으로는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닙니다. 거기에 반드시 덧붙여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만약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열심을 낸다면 결국 그것은 나의 입장이나 내 이익을 위한 열심으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요즘 한국 교회 안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일어나는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일들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일들이 생겨날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도 내려놓지 않고 그럴 생각과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의 일그러지고 비뚤어진 헌신때문입니다. 열정은 열정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열정은 바른 목적과 바른 방향을 향할 때만 가치있는 것이 됩니다.
회원 여러분 정말로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서 참된 헌신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입장, 내 이익,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포기는 때로는 무언가를 고집하는 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어떤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언제든 필요하다면 그렇게 나를 내려놓는 선택을 할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교회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언젠가는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변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꾸 그 이유와 동기를 자기 안에서 만들어 내려는 습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교회를 사랑하려고 하고 내가 결단하고 내가 헌신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래서는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 노력은 선한 노력이기는 해도 엄밀하게 말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어서 오래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치있는 일치고 억지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나 자신을 내려놓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내려놓으려면 그럴 수 있는 충분히 가치있는 이유가 있고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자기를 내려놓는 헌신을 하려면 적어도 하나님과 교회가 나에게 그만큼 사랑스럽고 그만큼 중요한 상태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결코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회는 어느날 갑자기 이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될 때까지 마냥 미루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구요. 그래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연습입니다. 어떤 연습인가 하면 항상 “만약 내가 하나님과 교회를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또 소중하게 여긴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를 정직하게 묻고 그 대답에 따라서 움직이는 연습입니다. 그 질문을 통해서 잠시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참된 열심을 품게되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이 더 잘 전해지고, 하나님의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지는 일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입장, 심지어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과의 관계보다도 더 중요했습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품고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이해하기에 복음과 교회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그릇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때로는 이렇게 또 때로는 저렇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일들이 사도 바울자신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그의 마음 속에는 기쁨과 만족이 가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 포기는 이미 억지춘향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고 자기보다 더 사랑하는 분을 섬기는 최선의 방법이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가장 큰 만족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내 기쁨보다 더 기쁘게 여겨질 수 있는 그런 기적같은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고 헌신하는 진짜로 행복한 교회의 진짜로 행복한 성도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