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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10.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본문 : 민수기 6장 13-27절



도입 : 헌신과 거룩은 무겁기만 한가?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헌신’, ‘거룩’, 그리고 ‘정결’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아마 가볍기 보다는 무겁다고 느껴질 것이고, 즐겁고 유쾌한 감정보다는 비장한 감정이 더 많이 생겨나실 것입니다. 이런 단어들이 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버릴 것, 내려놓을 것, 포기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다고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삶 속에서 거룩함과 정결함은 유지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는 생활’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 점에서만 본다면 자유스럽기 보다는 부자유스러운 것이고, 편한 것이기 보다는 불편한 것이며, 가볍기 보다는 무거운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들이 반드시 우리의 삶을 억누르며,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을 강요하며 우리에게서 만족과 행복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가 헌신이나 거룩, 그리고 성결한 삶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하고 선뜻 그런 단어들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삶’이 주는 만족보다 하나님께 헌신하며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 때 얻는 만족과 기쁨이 크다고 생각하고 또 믿는다면, 거룩과 성결 그리고 헌신에 대해서 밝고 가볍고 기쁘고 즐거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삶을 결코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실인에 대하여 : 나실인은 공인이다

오늘 본문은 나실인에 대한 본문인데, 나실인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평생을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실인의 규정을 준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예를 든다면 ‘삼손’같은 사람이죠. 나머지 한 가지는 스스로 일정기간을 정하고 그 기간동안 나실인으로 헌신하여 나실인의 규정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단기 헌신 나실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간과 동기는 달라도 이 사람들이 나실인으로 있는 동안 지켜야할 기준은 같았습니다. 포도주와 독한 술을 먹으면 안됩니다. 포도주 뿐만이 아닙니다. 아얘 포도 자체를 입에 대면 안됩니다. 씨앗이나 껍질까지도 말입니다. 또한 그 동안은 머리카락을 잘라서도 안되고, 시체는 그 어떤 종류의 시체, 심지어는 자신의 부모가 죽은 경우라도 접촉해서는 안됩니다. 혹시 잘못해서 이런 규정 중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제물을 드려 제사를 드리고 머리를 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서약한 기간을 채워야만 했습니다.  


원래 순결과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할 것 없이 전부다 거룩해야 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나실인 제도를 만드시고 그 나실인들이 지켜야할 규칙들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듯이 이 기준들은 나실인이 아닌 사람들이 지켜야할 거룩을 위한 규칙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까다로웠습니다. 나실인이 되는 것은 강요나 의무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결단과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으로 헌신하고 또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실인으로 헌신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이미 개인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회막 앞,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나실인으로의 헌신을 시작했고, 그 기간이 끝나 일반인으로 돌아올 때도 회막 앞에서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렇게 해야했는데, 그 두 번의 제사 사이에 나실인은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가 나실인임을 드러내며 나실인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실인은 나실인 기간을 시작하는 처음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공적인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개인적인 헌신과 결단이 공적인 헌신과 결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실인들에게 그들이 지켜야할 엄격한 기준들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개인이 아닌 공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용 1. 우리의 헌신도 공적인 일이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신도 전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개인이 강조되고, 그 개인의 자유와 자발성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그런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서 성도로 사는 일, 특히 교회의 일원으로 사는 일의 공적인 성격과 가치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에 헌신하는 경우, 그것은 분명히 자발적인 결정과 결단에 의해서 시작됩니다. 어떤 부서에 지원하고 또 교회로 부터 어떤 일이나 부서를 섬길 것을 요청받는 경우 결국 그것을 결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성도 개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각이 그 일을 감당하는 동안에도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결단과 결정은 개인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일을 시작한 다음에,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는 더 이상 개인일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그 일 안에서는 말입니다. 그런데, 스스로가 공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꾸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개인으로 일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내 취향이나 방식, 그리고 과거의 경험, 심지어는 자기 이익을 가장 앞에 내세웁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의 많은 문제들이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의 헌신을 공적인 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개인적인 일로 생각하니까 나 중심의 생각에 빠지게 되고 서로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기는 사람 없는 게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2. 영적인 헌신도 공적인 일이다

교회의 ‘일’이나 그 일에 대한 헌신 뿐만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일도 그렇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대해서 열정을 품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나 혼자 골방에서 기도하고, 나 혼자 집에서 예배드리는 경우라면 어때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모여서 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일 때는 이미 개인의 일은 결코 개인의 일에만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할 때도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크고 튀는 목소리로 기도해서 주위의 사람들이 기도하는 일에 방해가 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주변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다면, 나도 목소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꼭 큰 소리로 기도하고 싶다면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드릴 자리를 잡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열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나만 내가 좋아하는 자리를 잡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나보다 뒤에 올 사람들, 혹은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더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자리하나를 잡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저는 주일마다 안내를 하면서 그 날 예배를 드리는 것 그 자체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장년 2부에 와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오실 마음을 품고 여기까지 오신 것은 여러분의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입니다. 그렇지만, 이 부서실에 들어오시는 순간 여러분의 모든 행동은 공적인 행동이 됩니다. 여러분이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편한대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는 이미 전체 중의 한 사람이고 내 주변에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전체의 유익을 높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실인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아름다운 헌신을 기뻐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셨지만, 나실인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의 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나실인이 되기로 작정하고 일정기간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은 정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그 기간동안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 기간동안은 자신이 거룩과 성결을 지키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나님께 헌신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소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의 삶을 산 위에 세워진 동네처럼 드러나게 하셔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흐트러진 삶과 신앙의 태도를 바로 잡는 기준의 역할을 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가 가지는 의미

나실인으로 산다는 것, 개인적인 거룩과 순결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으로 허락되는 것들까지도 금하면서 살아가야 하며 거기에 영적인 공인으로서의 짐까지 져야한다는 것은 나실인으로 헌신한 사람에게는 그다지 가벼운 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이 그런 힘겨운 헌신의 기간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을 보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번제물로 일 년 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를 드려야 했고 속죄제물로 일 년 된 암양 한 마리를 드려야 했으며 화목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한 마리와 무교병 한 광주리와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 한 광주리를 함께 드리고 그 소제와 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머리 한 번 깍지 못하고 포도주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하고 부정해질까봐 노심초사 살았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나실인이라는것을 공개하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그 일을 끝내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시고, 등이라도 두들겨 주시면서 ‘그 동안 수고했다. 이제 마음껏 먹고 마셔라’라고 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세가지 제사를 모두 요구하십니다. 제물의 종류와 양까지 정해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21절 이하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외에도 힘이 미치는 대로 하려니와 그 서원한 대로 자기 몸을 구별하는 법을 따라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네가 나실인에서 일반인으로 돌아올 때, 나에게 꼭 바쳐야 할 제물은 위에서 말한 것들이지만 그 외에도 네가 원한다면 힘이 미치는 대로 많이 드려도 좋다” 하나님께서는 나실인을 칭찬하고 위로해 주시는 대신에 어찌보면 버거운 제사를 요구하시고 그것으로 모자라 더 바칠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나실인이 아니라면 그런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세가지 제사에 필요한 제물들은 순전히 그가 하나님께 특별하게 헌신했기 때문에 과외로 드려야 하는 제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거기다가 네가 원한다면 더 드려도 좋다. 힘이 미치는 대로 많이 드려도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나실인의 삶은 보이는 대로만 판단한다면 일반인의 삶보다 훨씬 제약이 많고 부담스러운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것을 잘 아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수고한 나실인에게 그런 요구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도 너무 당연하게 말입니다. 어찌보면 참 이상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아주 이상한 분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런 요구를 나실인들도 힘겨운 의무로  받아들였으며, 더 드려도 좋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종의 압력으로 받아들였겠는가 아니면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였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고 원한다면 더 많은 것을 드려도 좋다고 편안하게 말씀하고 계신 것처럼 그 말씀을 듣는 나실인들도 그 이야기를 기쁜 마음으로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실인은 누가 강요하거나 억지를 부려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나실인이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원해서 기쁘게 헌신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왜 나실인이 되기로 작정하였을까요? 세상의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끊고 왜 하나님만 생각하며 살기로 결단하였을까요? 그것은 그가 그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하나님을 사랑해서, 일상적인 헌신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서 더 많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더 많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더 많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일에 헌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나실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히 쉬운 일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렇다고 짐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나실인 제도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나실인 제도를 통해서 나실인으로 헌신하고 나실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더더욱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충분한 헌신은 없습니다. 충분한 성결과 거룩도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는 항상 부족할 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나실인 기간을 마치는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제사들은 또 따른 기쁨이고 또 다른 은혜였을 것입니다. 번제단에서 모두 불살라지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더 온전한 헌신을 하리라고 다짐했을 것이고, 속죄제물을 드리면서 하느라고 했지만 그래도 부족하기만 했던 그 동안의 거룩한 삶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구했을 것이고, 화목제를 드리고 또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이제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과 나누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고 또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이런 나실인들에게 하나님께 더 드릴 것이 있다면 더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과도한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은혜의 기회로 와 닿았을 것입니다. 


헌신과 정결을 위한 교훈과 비결 : 하나님을 향한 사랑

우리가 나실인, 특별히 기간을 두고 헌신한 나실인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이 기쁘고 즐거워질 수 있는 비결,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려고 할 때, 그것을 더 이상 무거운 짐, 피하고 싶은 짐이 되지 않게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게 될 때, 우리의 헌신과 거룩하고 정결한 삶도 더 이상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마라는 하나님의 명령들을 발견할 때, ‘하나님도 참 우리에게 정말 어려운 것을 시키신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하실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영적인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곤 합니다. 왜 그런 경험이 반복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러한 명령들과 요구들에 즐겁게 응답할만큼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헌신과 거룩의 원동력인데 우리의 사랑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할 정도로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순종할 수 있을만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충분히 커질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 우선되는 것, 둘 중에서 나머지 한 가지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앞서 가면서 순종을 끌고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도 이 사랑이 앞서야 하며, 거룩과 순결한 삶에도 이 사랑이 앞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만큼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고, 또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지금은 너무 무겁게 여겨지는 그 요구들도 더 이상 무겁지 않은 쉬운 멍에가 될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신에게 헌신하고,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공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또한 편하고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멍에이고 그래서 그 멍에는 불편하고 무겁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멍에는 쉽고 편한 멍에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충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가 그 사랑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면 그 멍에는 가볍고 편한 멍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왜 현실적으로 중요한 수많은 문제들을 재쳐놓고 그는 이렇게 어렵고 애매한 기도를 하였을까요?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복잡한 기도를 드리고 있을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고, 또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의 터가 닦이고 뿌리가 박히고 모든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이것이 행복한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풍성하고 즐거운 신앙생활, 드리고 또 드려도, 헌신하고 또 헌신해도 즐겁기만 한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렇게 될 때까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 말입니다.


결론 :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실인이 되자

이제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 버겁게 여겨지고, 거룩과 순결이 무겁기만한 짐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가장 시급하게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사랑의 풍성함이 어떠한가를 아는 일에 전념해야 할 때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며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되찾고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 깊이와 높이를 알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손으로 만지듯이 구체적으로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릴 때입니다. 다른 일이 아니라 바로 그 일에 헌신해야 할 때입니다. 


나실인들이란 실은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몇 년동안 머리를 깍지 않고 포도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자신의 순결과 거룩을 위해서 자녀와 가족된 도리까지 저버릴 정도의 결단을 내렸지만, 그들은 그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의 강권을 이기지 못해 그런 거룩한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더 거룩해지도록, 더 헌신하도록 그렇게 하고도 기쁘고 즐거워하도록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 무거운 짐이 가벼운 멍에가 되도록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시대의 나실인들이 되게 하시는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그 분이 기뻐하시는 헌신과 거룩의 삶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면서도 그 삶을 결코 무겁고 힘겨운 짐으로 여기지 않는 참으로 행복하고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얼굴 속에 있는 그 분의 복된 미소를 바라보며 이 순례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할 때, 하나님은 헌신과 거룩의 짐이 가벼워지는 은혜를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