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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1. 사방 땅을 그들에게 주매

본문 : 민수기 32장 28-42절


두 지파 반의 돌출행동

좋은 것을 보고 욕심을 내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그런 사람을 직접 보는 일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 모두가 함께 이룬 결과물 중에서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하려는 어찌보면 약삭빠른 사람이 나타나면 무척 얄밉고 또 화가 나게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32장 1절부터 시작해서 오늘 본문까지 주욱 이어진 사건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여곡절끝에 40년만에 다시 가나안의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큰 전쟁을 두 번 치러야 했습니다.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 전쟁은 하려고 해서 하게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시혼과 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싸움을 걸어와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번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요단 동편의 땅인 길르앗 지역에는 맹주가 없어졌습니다. 완전히 평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패권을 지닌 나라가 없어졌고 이제는 고만고만한 성읍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단동편, 길르앗 지역은 정말 비옥하고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 이 땅을 탐내고 먼저 차지하려고 한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르우벤과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였습니다. 물론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다른 지파에 비해서 굉장히 많은 가축 떼를 거드리고 있었고, 길르앗 지역은 목축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 지역을 탐냈던 것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땅은 누구에게나 좋은 땅이지 그들에게만 좋은 땅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땅이 전부인 시대에 그런 땅을 가지기고 싶어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두 지파 반은 뜻을 모아서 모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며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이것은 좋은 땅을 먼저 차지하려는 재빠른 움직임이었고 일종의 청탁이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한 다른 지파들과 모세가 보기에는 이런 행동은 아주 이기적인 돌출행동이고 그래서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동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돌출행동의 처리 : 모두가 선택한 넉넉하고 올바른 결정

이들의 부탁을 들은 모세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준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너희 열조도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하였었나니... 보라 너희는 너희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도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기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모세가 보기에 이 일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욕심을 부린 일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체 이스라엘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40년 광야생활을 다시 원점으로 돌릴만큼 심각한 일이 될 수 있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40년 전에 10명의 정탐꾼들이 그랬듯이 기껏 다시 가나안의 문앞에 도착한 이스라엘을 낙심시켜 모두가 망하게 할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정말 우리가 듣기에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심한 말로 그들을 나무랐던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이기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욕심을 부린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원칙을 어기고 양심을 어기는 일은 그 사람 혼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이 공동체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항상 공동체 전체에 퍼지게 마련인데, 이기심 때문에 양심과 원칙을 벗어나서 보이는 행동들은 결국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영적으로 낙심시키기가 쉽습니다. 결국 그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정직과 순결 그리고 순종에 대한 의지를 좌절시켜서 그들 모두를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행동은 개인의 행동일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교회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나의 행동과 선택이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요단 서편을 요구했던 이스라엘의 두 지파 반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들이 모세의 그런 심한 꾸중을 듣고난 후에도 어긋나가지 않고 올바른 길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목회자나 혹은 교회의 어른이 “그 애비에 그 자식이구나. 어쩜 그렇게 꼭 네 아비처럼 행동하냐?”라고 나무랐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평생 원수가 될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두 지파 반을 향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너희의 행동은 이스라엘 전체를 망하게 할 죄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그들은 좋은 땅을 가지려는 생각에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꾸지람은 그런 그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여기 든든한 성읍을 짓고 거기 어린아이들을 정착하게 한 후 누구보다 먼저 무장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지파들이 거기서 자기 땅을 얻을 때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만 땅을 얻고 강 건너편에서는 땅을 상속받지 않겠습니다.” 

모세는 이 이야기를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나머지 지파의 족장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저 두 지파 반이 무장하고 강을 건너가서 너희가 그 땅을 정복할 때까지 함께 싸우거든 이 땅을 산업으로 주어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너희들처럼 강 건너편에서 땅을 얻게 하여라” 다행히 이 일은 모두가 납득하고 또 모두가 받아들인 가운데 끝이 났습니다. 평화롭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해결되었습니다. 이제 두 지파 반은 길르앗 지역의 크고 작은 성읍들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거기 다시 성읍을 짓기도 하고 성읍의 이름도 바꾸기도 하면서 그 땅을 미래의 자신들의 분깃으로 만들어 만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무척 민감하고 심각한 일이 평화롭게 마무리지어졌습니다. 처음 취해진 두 지파 반의 행동은 이스라엘을 낙심시키고 좌절하게 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이들을 더 강하게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집단, 어느 공동체에게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하나됨을 무너뜨릴만한 일을 하지않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아무리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그런 일들을 완전히 방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해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당사자인 두 지파 반 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올바르고 넉넉한 선택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지파 반은 모세가 자신들을 나무랐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게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굉장한 짐을 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본문 33절 이하를 보면 두 지파 반이 열심히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실은 그렇게 차지한 땅은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들이 요단 서편에서 자기 몫의 땅을 얻을 때까지 완전히 자기 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은 오히려 나머지 지파들보다 앞장서서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짐을 진 것은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너무 탐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지해야 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의 독립된 지파이기 전에 이스라엘의 일부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욕심에 따라서만 행동했던 것을 깨닫고 스스로 나머지 지파들을 섬기는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비록 그렇게 불처럼 화를 냈지만 두 지파 반에게서 올바른 태도를 발견했을 때, 그들을 용납했고 그들의 제안 또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다른 지도자라면 자신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그렇게 심하게 거절한 후에는 그 일을 거둬들이기가 쉽지 않은데 모세는 그렇게 했습니다. 오히려 모두가 그 일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지파들과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에 흔쾌히 순종했습니다. 차기 지도자로서 그리고 같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두 지파 반의 행동은 그들에게 굉장히 괘씸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들만 생각하면서 선택을 하고 또 그것을 모세에게 요구하기까지 했다면, 그들에게는 자기 자신들 밖에 모르고, 전체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으로 비춰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두 두 지파 반을 용납해 주었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였 주었습니다. 결국 그 좋지 않은 일은 나머지 지파들의 입장에서는 형제로서의 관용을 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두 지파 반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는 동시에 다른 지파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섬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교훈들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소망하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중요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지체들을 힘들게 하며 또 공동체를 어렵게 만드는지, 또 그런 어려움들을 넘어서서 교회 공동체가 다시 하나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면 구성원들은 자꾸 자기 입장과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습관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행동들은 그 자체로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도 좌절시키게 됩니다. 정직하게 살고 또 섬기면서 살려는 결심을 흐리게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나쁜 교회에 속해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좋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부터 시작해서 나 자신으로 끝납니다. 내가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함께 지체된 다른 성도들을 먼저 생각한다면 그 교회는 어떤 교회든지 좋은 교회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잘못으로 깨닫고 인정하는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죠. 문제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깨닫게 해 주는 사람을 오히려 미워하고 그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적어도 성도라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잘못을 지적받거나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책임을 지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다른 이들의 부족함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납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잘못을 분명히 잘못이고 실수는 엄연한 실수입니다. 그렇지만, 지체는 여전히 지체입니다. 잘못과 실수 때문에 그 사람의 지체됨까지 거절하고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몸의 병들고 아픈 곳, 그래서 항상 나를 괴롭히는 곳도 여전히 내 몸의 일부이듯이 때로는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교회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를 몰아내거나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게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정말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려면 그렇게 하려고 애써야 할 일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중에는 변질되었고,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됨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모습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죄를 짓기도 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았고 또 그러한 형제의 잘못과 부족함을 용납할 줄 알았습니다. 지도자는 전체만을 생각하느라고 작은 지파들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실패하고 깨어지게 할 수 있었던 위기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 오히려 그들을 더 단단히 묶어주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탄과 결단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스라엘이 위기를 넘어서고 오히려 선용하기 위해서 보여준 모습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와! 참 당시의 이스라엘이 정말 대단했구나. 저렇게 허심탄회했고 저렇게 마음이 너그러웠구나. 또 저렇게 공동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복주셨구나.”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 모두가 꼭 필요하고 또 귀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감탄과 결단만으로 우리의 이기심과 자기 중심성을 넘어서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 수없이 감탄하고 결단했지만 실패를 거듭한 우리의 과거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제가 결단과 노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를 정말 교회다운 곳으로 만들어가고 또 아름답고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려면 우리의 결단도 중요하고 노력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과 결단이 이기심과 현실이라는 장벽을 넘어서서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 안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인자와 인애’입니다. 인자와 인애는 ‘언약에 묶인 사랑’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언제나 ‘헤프게 필요이상으로 낭비다 싶을 정도로 베풀어 지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사랑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참 속도 좋으신 분이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반역을 하고 또 반역을 하며 죄를 짓고 또 지어도 화를 내시고 벌을 내리실 지언정 결코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심각한 범죄를 하고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못 이기기는 채 돌이키시고 용서하시고 싸매 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화가 날 정도인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십니다. 약자의 입장에서 하는 사랑이라면 이런 모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약자가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셔서 그렇게 사랑을 낭비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가 없다고 그 분이 덜 영광스러우신 것도 아니고, 그 분이 불행해지거나 슬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이스라엘을, 그리고 우리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약속이 하챦게 여겨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연락이 옵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오늘은 좀 만나기가 힘들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무지 무지 미안해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해놓고 다  늦게 전화해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냥 끊어버립니다. 정치적인 공약은 그 어떤 지도자에게나 그저 표를 얻기 위한 빈 약속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어도 당사자는 크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약이나 약속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약속에 목숨을 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시듯이 그 분의 약속 또한 영원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한, 그 분의 약속도 영원합니다. 약속이 영원하다는 것은 그것이 깨지거나 취소되거나 혹은 변경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를 자녀 삼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그 약속이 깨질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이 중간에 포기되거나 취소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영원하심과 신실하심을 부인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인애와 인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시며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며 싸매주시고 고쳐주시며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시는 그런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본다면 필요 이상의 낭비라고 여겨질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는 달리 필요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이고 또 언약으로 보증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한 사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

그런데, 이런 사랑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도 존재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 저러하게 해 줄테니 너희는 나에게 이러 저러하게 해 주겠느냐? 만약 너희가 그 약속을 어기면 이러 저러한 어려움을 당할텐데 그래도 나와 언약을 맺겠느냐?”라고 말씀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한 사람씩 개인적으로 결단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백성 전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싫으나 좋으나 모두가 다 그 언약 속에 있고, 그 언약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언약은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하셔야 할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해야할 일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이고 율법입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신실한 사랑을 하시는, 책임지는 사랑을 하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인자와 인애’이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십계명을 지키는 일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인자와 인애’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약 안에서 사랑하시듯이 그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인자와 인애, 그 언약적인 사랑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두 지파 반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두 지파 반도 굳이 그렇게 무거운 짐을 나서서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적당히 눈치나 보면서 정해주는 것만 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지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모세의 명령이었지만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행동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망가뜨릴 뻔한 그들을 자신들의 일부로 인정해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차기 지도자인 여호수아도 그랬고, 제사장인 엘르아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이 했던 선택은 모두가 다 필요이상의 선택이었습니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과도한 낭비였습니다. 

이것이 모두 그저 그들이 원래부터 마음이 크고 너그러웠기 때문일까요? 원래부터 사랑이 많고 베풀기를 잘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역사는 그들이 전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히려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기도 했구요.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런 다른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지금 언약 안에 머물고 있었고, 또 서로를 그 언약 안에서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많은 방황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약속의 실체인 가나안 땅 입구에 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증거로 이미 지역의 맹주인 시혼과 옥을 이스라엘 앞에 무릎꿇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통해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에 묶인 신실하신 사랑을 강하게 확신했을 것이고, 자신들은 그 언약 안에서 하나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 언약적인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부터 32절까지를 보면 이 사건은 이스라엘 지파 전체가 하나의 언약을 맺음으로써 마무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사랑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슨 거래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아주 강한 사랑입니다. 이미 서로가 인자와 인애로 서로를 용납하고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서 모두의 사랑을 언약이라는 기둥에 묶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 단순한 사랑을 넘어서 언약적 사랑으로...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참 많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자와 인애입니다. 성도의 사랑은 단순한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언약에 뿌리내린 강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은 항상 받은 만큼만 주려는 거래적인 사랑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낭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동일한 언약 속으로 부르시고 한 몸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분이 그러시듯이 우리들도 서로를 언약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몸된 교회에 가장 원하시는 것 중의 하나이며 교회됨의 기둥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들 사이에는 사랑의 언약이 존재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기로, 끝까지 사랑하기로 한 언약 말입니다. 그 언약은 영원한 언약입니다. 깨뜨려서는 안되는 언약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들 사이에 이러한 약속, 깨어져서는 안되는 사랑의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교회를 향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이 사랑에 실패하고, 그래서 이 언약을 깨뜨리는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가 이 언약 안에서 부름받아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완전히 잊혀지거나 포기되어서는 안됩니다. 더 사랑하십시오. 더 받아주시고 더 기다려 주십시오. 사랑에 있어서는 낭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과도하게 사랑하는 하나님을 닮은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발버둥치지 않아도 교회가 하나되게 해 주실 것이며, 그 하나가 된 교회가 가는 길을 복 주셔서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 주실 것이며, 그 분의 영원한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인애와 인자의 사랑, 언약적인 사랑을 함으로써 모두가 넉넉하고 모두가 행복한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우리가 서로를 영원한 언약 안에서 사랑할 때, 하나님은 악을 바꾸어 선이 되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