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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4.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본문 : 시편 107편 23-43절


서론 : 의탁함에 대하여...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일부분을 맡기는 것은 어떤지 몰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부 맡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조심스럽고 또 힘든 일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나의 전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 맡기면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보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전부를 맡게되는 사람에 대한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그 중 첫번째는 인격적인 불신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전부를 맡겨도 될만한 믿음직한 사람인가, 선하고 바른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 신뢰가 서질 않는다면 전부는 커녕 아주 일부도 맡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불신입니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또 선하고 바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나의 전부를 맡아서 관리할만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일부분은 몰라도  전부를 맡긴다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나의 전부를 맡기려면, 그리고 나의 전부를 맡을 수 있으려면 이 두 가지면에서 모두 자격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그리고 능력적인 면에서 나의 전부를 맡겨도 안심이 될만한 사람이어야 우리는 비로소 안심하고 그에게 내 전부를 의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야 간혹 중간에 그가 믿지 못할만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를 계속해서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결혼하자 마자부터 가정의 모든 재정적 관리를 집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무엇을 하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저한테 돈 사용에 대해서 물어보면 저는 그냥 마음대로하라고만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고, 지금까지 그 결정을 바꾸지 않았을까요? 거기에는 뭐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관리하면 금방 거덜나겠지만, 집사람이 그걸 가지고 무엇을 하든지 내가 관리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잘 관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면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게 신앙이니까요. 그런데, 잘 그러지를 못합니다. 이 일에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이 문제 때문에 영적이고 신앙적인 갈등을 겪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죄책감까지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적으로 이런 문제를 겪는 것도 따지고 보면 뭐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제가 저의 집사람을 신뢰하는 정도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보다 모든 면에서 낫다고 여긴다면, 그래서 내 인생 전체를 맡긴다고 하더라도 내가 관리하는 것보다는 언제나 더 잘 하실 것이라고 진짜로 믿는다면 우리는 비록 그것이 우리 인생 전체라고 하더라도 온통 하나님께 내맡길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고서도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자(?)

오늘 본문은 시편 107편의 뒤쪽 절반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시는 43절이라는 꽤 많은 구절로 되어 있는 시인데, 이 시를 가만히 읽어보면 시인이 시편 107편을 노래하면서 자신의 시를 읽고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알고 깨닫고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것은 딱 한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것이 시인이 이 시를 노래한 이유입니다. ‘인자’는 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너무 풍성하게 부어져서 낭비라고 보여질 정도의 사랑이고, 결코 변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 분의 백성을 영원히 사랑하시겠다는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묶여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결코 깨지거나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시편을 읽고 묵상하며 또 노래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에 설득되고, 그 사랑의 풍성함과 견고함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뢰하게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라고 말했다면,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입에서 어떤 설명을 들게될 것이라고 기대하겠습니까? 아주 좋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복 받는 것, 기적, 병이 치료되는 것...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시편 107편을 보면 그런 것들만 나오지를 않습니다. 정반대의 것들도 나옵니다. 

오늘 시편의 전반부로 돌아가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에 하나님은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거할 성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벌을 받으며 고통할 때,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잘못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점점 더 바른 길에서 멀어져 갈 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셔서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고치시고 그 위험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들은 모두 다 너무나 선한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 분이신지를 증거하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그 인자하심 속에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으로 넘어와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본문의 첫번째 부분은 해상에서 무역을 하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놀라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바다는 굉장히 위험한 곳입니다. 특히 고대세계에서 바다는 언제 어떻게 돌변해서 사람들과 배를 집어삼킬지 모르는 난폭한 괴물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런 바다에 배를 띄우고 상단을 꾸려서 해상무역을 했습니다.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태풍을 불게 하셔서 그 배들이 파선 일보직전까지 가게 합니다. 배 위에서 잔뼈가 굵은 선원들, 그래도 바다를 가장 잘 아는 그들이었지만, 큰 파도 때문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것 같은 위험과 혼란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판단조차 서지 않을 정도로 넋이 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울부짖습니다. 살려달라고, 살게만 해 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폭풍이 잦아들게 하시고 평온케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난리 속에서 꿈에도 그리던 그 항구로 무사히 들어가게 하십니다. 

두번째 부분은 땅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이 광야가 되게 하십니다. 샘이 솟는 땅이 척박한 마른 땅이 되게 하십니다. 옥토가 변하여 아무 식물도 살 수 없는 소금밭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거기 사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땅에서 넉넉하고 부요하게 살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더 크고 심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랜 세월 속에서 그렇게 광야가 되고, 척박한 땅이 되었으며 또 소금밭이 된 그 땅을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광야가 못이 되게 하십니다. 마른 땅에 다시 샘이 솟아오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 땅을 주린 자들, 가난한 자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서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 위에 그들이 거할 성을 세우게 하십니다. 곡식을 심게 하시며 포도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그들이 그 위에서 번성케 하시며 가축들은 줄지 않고 점점 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자하심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시지 않습니다. 마치 찬 물을 끼얹으시는 것 같습니다.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주셔서 그들의 숫자가 줄어들게 하시고 다시 낮은 곳으로 끌어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시인이 우리에게 알게 하고 또 보게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 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자리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상하게도 그러한 목적지와 정반대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광풍 중에서 사람들을 살리시고 다시 안전한 항구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십입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힘들게 하고 거의 죽음 일보직전까지 몰고 갔던 폭풍이 생겨난 것은 하나님의 명령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전체 이야기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역을 하려고 바다에 배를  띄웁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다에 갑자기 폭풍을 보내십니다. 배가 거의 깨질 지경이 되고 사람들이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에서야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건지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만약 그 폭풍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면 그 폭풍에서 건져주신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인자하심이고 또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폭풍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말이 바로 병주고 약주고라는 말입니다. 병도 주고 약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왜 그런 하나님이 인자하신 분이십니까? 애초에 그런 일을 안 만드셔야 인자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정말로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또 한 가지 33절 이하에서는 이야기가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혔던 악한 사람들을 벌주시고자 그 땅을 황폐하게 하셔서 악인들을 쫓아 내시고, 다시 그 땅을 회복시키셔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번성하게 하시는 것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풍성한 인자하심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그 일을 뒤집으십니다. 그렇게 그 땅 위에서 잘 살기 시작한 그 사람들에게 다시 압박과 곤란 그리고 우환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팍 낮추어 버리십니다. 요 마지막 이야기만 없으면 하나님은 정말 인자하신 분이시고, 그 인자하심으로 찬양드리고 또 찬양드려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쩌면 변덕쟁이가 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그런 행동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 인자하심에서 나온 놀랍고 은혜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찬양을 드려야 할만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시편이 이상한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표현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느끼기에 ‘좋은 일들’을 통해서 인 것 같습니다. 질병과 고통, 그리고 재난과 어려움 속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우리가 느끼기에 선하지 않은 일들, 그리고 좋다고 느껴지지 않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는 연습이 잘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보호자 되시는 하나님, 악인을 벌 주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은 참으로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거기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 그리고 몸으로 느껴지고 손으로 만져지는 좋은 것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고 또 경험하는데 머물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것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고 더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 인자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방황케 하시고, 우리에게 벌을 주시고, 폭풍을 보내 배를 흔드시며, 회복시키신 백성들에게 다시 어려움을 주시는 하나님도 인자하신 분이시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 하나님이야 말로 진짜로 인자하신 분이시라고 말합니다.  시편 107편을 읽어보면 시편 기자가 반복적으로 그것도 단어까지 똑같이 사용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환란을 주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고통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그 곤경에서 건져주십니다. 우리의 눈은 거의 마지막 세번째 단계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란도 인자하심입니다. 고통과 곤란도 다 인자하심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진실로 하나님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방황도 없습니다. 성은 든든하기만 합니다. 잘못을 해도 벌도 받지 않습니다. 장사를 하면 아무런 위험도 없이 떼돈을 법니다. 한 번 낮추신 다음 회복시켜 주신 후에는 그 평안이 영원히 계속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가장 바라는 형통이며, 또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겨납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됩니다. 인간에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인간에게는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며, 점점 더 용서받지 못할 곳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을 놓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고통과 환란을 주셔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을 듣고 그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정리하시고 종결시키십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실적인 해결이 아닙니다. 그 상황의 해결도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은혜와 기적이지만 사실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또 3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시고 그 상황에 개입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진짜로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상황의 해결이 아닙니다. 고통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짜로 주시려는 것은 우리 영혼의 기쁨과 평안과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놀라운 능력을 확신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기쁨과 평안, 만족을 얻고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인 동시에 우리가 가장 만족스럽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길로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건지시는 것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과 고통 가운데로 몰아넣는 것은 더 큰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결코 얻을 수 없는 생명과 평안, 기쁨과 만족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과 곤경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바라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란과 고통을 주시고, 우리가  그것 때문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그 일을 해결해 주시고 인자하심을 보여주고 알게 해 주시는 이 구조를 깨뜨릴 수는 없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환란이 오고 어려움이 찾아오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살아가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그 때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얼마나 더 풍성하고 놀랍겠습니까?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만족스럽고 기쁜 삶이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이 법칙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반드시 그런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그 깊고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시편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시편은 단순히 과거의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자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인자사신 하나님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는 그 하나님을 생각하며 평안할 때, 잘 나갈 때, 그리고 부족함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 때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자고 우리를 권면하는 것, 그것이 이 시편을 주신 진짜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인자하심이 다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인자하심 속에서 우리의 인생을 다루어 가시고 또 인도해 가십니다. 게다가 그 분은 그 어떤 기이한 일도 행하실 만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참된 유익을 위해서 그 어떤 일이라도 하실 수 있고 또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 전체를 모두 맡겨도 전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나보다 똑똑한 우리 마누라, 돈 잘버는 우리 남편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믿음직한 분이십니다. 물론 우리 삶에는 때로 하나님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도 일어납니다. 방황하기도 하고 심각한 곤란을 겪기도 하며, 폭풍이 찾아오기도 하고, 이제 겨우 평안해 지고 넉넉해 졌다고 생각될 그 때 삶이 다시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입니다. 그 분이 내 영혼이 만족시키시고 기뻐하게 하시며 소망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그 가장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일들입니다. 

결론 : 주의하여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오늘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우리가 좋을 때, 행복할 때 뿐만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는 일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 또한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 쪽에서도 노력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려면,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더 깊고 견고한 신뢰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우리 이 세상과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쓸쩍 보아 넘기는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그 모든 일들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일들이 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의 표현인지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 모든 일들, 나의 모든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려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이 세상 모든 곳, 그리고 내 삶의 모든 경험 속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결코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고서도 평안과 기쁨 가운데 만족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실실하십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든 그렇게 하지 못하든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고 의지한다면, 그래서 그 분께 삶의 모든 부분을 의탁하고 살아간다면 그의 삶은 분명히 불안과 근심으로 부터 평안과 기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그 삶은 점점 더 불안해 지고 근심이 많아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과 나의 인생을 주의 깊게 살피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또 무슨 일을 통해서든 그 분의 인자하심을 볼 수 있도록 그 모든 일들을 주의깊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 증거들을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 그리고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재료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더욱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확신함으로써 그 분 안에서 기쁨과 평안, 그리고 만족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고 거기 의지해서 살 때 더욱 풍성한 인자하심으로 우리 삶을 채우신다. 

[기도]

  1. 눈에 보이는 복 속에서 뿐만 아니라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깊은 인자하심을 찾아낼 수 있는 영적인 시력이 회복되게 해 달라고.
  2.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만큼은 의심치 않게 해 달라고. 
  3. 고난 중에서 뿐만 아니라 평안할 때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어 살게 해 달라고. 그래서 더욱 풍성하고 온전한 인자하심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