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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29. 종말에 내가 내 영으로


 

날짜 : 2011-08-21

본문 : 사도행전 2장 14-36절 


서론 : 사도행전과 성령강림

오늘부터는 상당기간 동안 사도행전을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찾아보니 매일성경이 10월 중순까지 사도행전을 묵상하도록 해 놓아서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그 때까지는 사도행전을 묵상하고 공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니 오늘 방향을 잘 잡아놓아야 앞으로 두 달 동안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방향을 잡아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은 대개 잘 알고 계시다 시피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감금될 때까지의 사도들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역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그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모든 기록된 역사는 일종의 ‘관점’을 가지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가가 역사의 사건들을 살피다가 이것이 역사의 중심이다라고 판단한 것을 가지고, 그 관점을 통해 기록해 놓은 것이 우리가 접하는 역사입니다. 사도행전도 기록된 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런 점에서는 여느 역사와 다른 점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행한 놀라운 일들의 모음집도 아니고, 그저 초대교회시대에 있었던 일들을 그냥 주욱 기록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도 하나의 아주 중요한 중심관점을 가지고 기록된 역사입니다. 그 중심은 바로 우리가 ‘성령강림’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점에서 보면 이런 별명은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거나 혹은 해석하는 방법이 성령강림을 중심으로 하는 것 하나 밖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것이 아주 아주 중요한 사도 행전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의 맨 처음 부분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과 약속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1장 4절 중간부터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주욱 넘어가서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어떤 책이든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 책의 맨 앞부분 입니다. 그 부분이 앞으로 그 책에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도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사도행전의 처음 부분에 사도행전이 무엇에 대한 책인지,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하시는지를 밝혀 놓았습니다. 조금 전 읽어드린 두 구절에 의하면 사도행전은 사도들을 비롯한 처음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또 증인의 역할을 하는 역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주시는 목적

1장 4절과 8절이 말씀하는 대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아무런 목적없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성령님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무엇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회원 여러분,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아무런 목적이 없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럴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다 이유와 목적이 있게 마련인데,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다면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하나님 편에서도 그만큼 중요하고 묵직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8절에서 주님은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시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고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을 입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도 없고 능력있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인 은혜로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가득 채우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성령충만한 다음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려고 노력해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또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는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와 노력도 있어야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일 조차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성령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이 기록하는 이후의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명의 제자들... 그 이전까지 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숨어 있었지만 그런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이들은 아주 딴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다락방의 문을 박차고 나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크게 떠드는지 그 때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들었던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그들에게로 모여올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면 너희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소리’로,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입’은  소리를 내고 그들의 ‘혀’는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만민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인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각자가 자기가 사는 나라의 말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은 증인의 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성령충만해 진 후, 그 어떤 다른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증인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좋은 일을 꼬아서 보는 사람들이 있듯이 이 일 또한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향해서 저 사람들이 아침부터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린다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열 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나 말합니다. 그는 이미 개인 베드로가 아닌 성령의 권능을 입은 그리스도의 증인인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그 말을 받아서 자신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술취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라고 말하며, 그러한 성령님의 임재는 요엘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다시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요엘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성도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요엘서의 예언의 의미

우선 베드로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말세에...‘라는 말로 성령님의 임재에 대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는 마지막 심판이 가까이 와 있음을 알리는 첫번째 나팔이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엘을 통해서 주셨던 성령충만에 대한 약속, 그리고 예수님의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은 단순히 성령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시계가 마지막 날을 향해 최종적인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는 의미였습니다. 요엘서가 성령충만함과 마지막 날 직전에 있을 일들을 함께 이야기한 이유,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충만을 약속해 주신 이후에,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천사들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는 그만큼 가까워진 마지막 날을 알리는 결정적인 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하며 또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제 닥쳐올지 모를 마지막 날을 앞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시대, 성령시대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그렇게 낭만적이기만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를 놓고 보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마지막 구원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오신 것은 단순히 마지막 날의 싸인으로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지막 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실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이 이 마지막 시대를 온전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시대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살아낼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됩니까? 그것은 필수적인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마음대로 선택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또 저렇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시는 대상을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육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육체에 불과합니다. 성경에 사용된 단어를 써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저 고기덩어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 관한 성경의 판단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다면 우리는 육체에 붙들려서 눈에 보이는 육체에 필요한 것이 전부이며 또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육체로 살다가 육체로 끝나는 인생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런 상태라면 우리는 결코 말세를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육체인 상태로는 이 험한 마지막 시대를 성도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다지 성령충만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불일치는 왜 생겨난 것일까요?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성령충만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 성령충만을 간절히 사모하며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나는 다시 육체로 돌아가서 육체로 끝날 수 밖에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그러니까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고 제자들은 그 때부터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여 전적으로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들이 그렇게 기도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 였을까요? 그들은 그토록 열심히 구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달라고, 성령충만함을 허락해 달라고 약속에 의지해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허락하셨고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넋놓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약속은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그 성취를 위해서 간구하는 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그게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분명히 100 퍼센트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 그리고 간구를 통해서 그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세를 사는 성도에게 반드시 계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없으면 안되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충만히 거하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이 시대를 온전한 성도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충만을 간절히 소망하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약속하셨으니 분명히 허락하실 것을 믿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때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앞에서도 말씀드린 대로 성령님은 우리가 성도로 살아갈 뿐 아니라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것이 요엘서의 증거입니다.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서 말씀에 나오는 ‘예언’, ‘환상’, ‘꿈’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실 때 사용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되는 것은 그저 그가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 뜻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1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성령충만하게 되면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니까 요엘서의 말씀은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구약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고 연약한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이신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고 심지어는 그 속에서 터 잡고 사시게 하시는 이유는 첫번째로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성령충만하지 않고는 믿음을 지키고 성도로 살아갈 수 없을만큼 영적으로 힘든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렇다는 것은 치열하게 하나님의 뜻을 지켜내고 성도로서 양심을 지켜내려고 애써 본 분들은 다 공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대 속에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데는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말세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말씀을 통해서 무시무시한 마지막 날의 징조를 말한 후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그리스로, 구원자로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전해야할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와 그리스도”시라는 것,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거해야 하는데 바로 이 일을 통해서 증인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성령충만함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 일을 능력있고 효과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거짓의 영이고 미혹게 하는 자입니다. 마지막 날이 가까와 올 수록 사탄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더 강력해져 가는 이들의 교란과 방해를 뚫고 증인의 역할을 효과적이고 능력있게 수행하려면 결코 우리 혼자 힘으로는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재해 계셔야 합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그 성령님은 아얘 하나님 자신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자리잡고 계시면서 증인으로 살고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로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이 이 증인의 역할 또한 우리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증인아닌 신분으로 부름받은 성도가 없고, 증인이 되는 목적이 아닌 이유로 성령충만을 허락받은 성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 : 성령충만의 특권은 우리의 의무다

우리는 지금 성령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오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볼 때, 분명히 이 시대, 이 마지막 시대에만 허락된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나, 이 특권은 저절로 주어지고 또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마구 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지속적인 성령충만함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소망하고 갈망해야 할 무엇입니다. 약속하셨으니까 주시겠지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는 도무지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기도하며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달라고 그야말로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합니다. 겸손하지만 정말 간절하게 그것 아니면 성도로 살아갈 수 없다고, 그것 아니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수 없다고 온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께 때라도 써서 받아내야 하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안깐힘을 써야 합니다. 

특권이라고 불리는 것 중에는 반드시 누려야만 하는 특권은 없습니다. 평양감사도 나 싫으면 그만이라고 내가 누리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함이라는 특권은, 세상에 이보다 더 놀라운 특권이 없을 정도로 큰 특권이지만, 성도들에게는 얻지 않고 누리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특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의무 중에서도 최고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성도다운 성도로 살아남아야만 하고 또 증인의 소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항상 성령충만함을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험한 시대, 사탄이 극성을 부리는 이 시대를 성도다운 성도로 살며, 또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약속하신 것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겸손하고 간절하게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무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속에서 당당한 성도로 살며, 능력있는 증인의 소명을 감당했던 처음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속에 그런 삶에 대한 소원이 다시금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험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령 충만함을 허락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주님 주신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키며, 예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온 세상에 능력있게 증거하는 증인들로 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