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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1년 매일성경 설교 9. 그가 먼저 사랑하셨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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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일서 4장 7-21절



도입 : 사랑의 짐

먼저 여기에 지금부터 제가 드릴 이야기에 직접 관련된 분이 계시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절대로 비난하거나 혹은 기분나빠서 드리는 이야기가 아니니 이해하시고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요예배 후에 여느 때처럼 조장모임을 가졌습니다. 공부를 마쳤는데, 조장 한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너무 어둡게만 말씀하셨어요.” 문득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따뜻하고 행복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너무 어둡게만 말씀드린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까? 아마 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너무 약해서 인것 같아요.”라고 사과를 드리고 변명아닌 변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그 말씀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어둡게 말했을까? 물론 첫번째 이유는 본문 자체가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밝고 가볍게만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성경본문의 분위기를 살리려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니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그 조장님의 말씀을 듣고 처음 했던 대답속에 진짜 이유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저 자신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크게 어려워하고 있고 또 부족하니 그런 무거운 마음이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에 제 말을 통해서 흘러나왔던 것 같습니다.  


회원 여러분, 우리들 중에 그 누구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는 충분히 사랑하고 산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전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에서라면 몰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충분히 행하면서 살아간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읽고 들을 때면 항상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어찌보면 가장 취약한 부분에 대한 요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랑하는 것을 우리의 취사선택이 가능한 것들 중의 하나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권면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사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성경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줍니다. 실제로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랑이 신앙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사랑은 중요합니다. 실제로 사랑은 믿음의 본질이기 때문에 신앙에 있어서 사랑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고, 사랑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겨나는 불필요한 좌절과 죄책감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몇 가지 먼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일반적인 사랑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사랑 속에 일반적인 사랑이 포함되기는 하지만 두 가지가 꼭 같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인 사랑은 그냥 사람의 성품이나 마음, 그리고 의지로부터 생겨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철저히 사람의 선한 마음과 의지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의 자연적인 마음이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그 근원으로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 때, 그 사랑을 알고 믿고 누릴 때 생겨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생겨납니다. 이 내용은 오늘 본문과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두번째로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말할 때, 그것이 당장 한 점 티도 없고 흠도 없으며 전혀 이기심이 개입되지 않은 그런 사랑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향해 무엇이 참된 사랑이냐고 질문한다면 성경은 분명히 위와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마지막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지 출발점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것이 모두 그렇듯이 사랑도 살아있는 생명력있는 사랑이라면 자라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씨앗으로 시작하더라도 계속해서 더 온전한 사랑, 순전한 사랑을 향해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 명령은 그저 “완전한 사랑을 향해서 계속해서 성장해 가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완제품이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은 마치 도보여행과도 같습니다. 가야할 곳이 분명하지만 거기 도착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한 걸음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야만 하는 그런 여행말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면 꼭 그만큼만 가야할 곳에 더 가까이 가게되는 그런 여행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장 완전한 사랑을 내놓으라’고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저 계속해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완전한 사랑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가슴에 완전한 사랑의 그림을 품고 한 획 한 획 내가 행하는 사랑의 모습을 그 그림에 맞춰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사랑은 주님의 사랑, 그 완전한 사랑과 그만큼 비슷해져 갈 것입니다. 


세번째는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결국 성경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대상이 없이 그저 마음 속에만 있고 생각 속에만 있어도 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까지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든 이론과 주장보다 앞서 있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처음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랑은 많은 성도들의 가장 큰 취약점인 동시에 성경이 우리에게 가장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구요. 오늘 본문을 보면 부드럽고 아름다운 문체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얼마나 강하게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선 7절과 8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을 사랑이심이라” 이 구절들의 요점은 사랑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또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가장 크고 대표적인 성품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고는 그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없고, 또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12절에서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라고 말하고 있고,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라고 말하면서 17절에서는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그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는 말로 사랑 안에 거하는 일의 유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이 뜻하는 바는 결국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며 그 확신이 우리를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것인데, 사랑이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야 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해 간다는 확고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 땅에서의 믿음생활이란 바로 그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오늘 본문 17절과 연결해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은 결국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은 우리가 맏아들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에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사랑이야 말로 우리 구원을 확증해 주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성령님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한 담대한 확신도 가질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당시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사랑하자고, 사랑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어쨋든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믿음생활에 있어서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중에서도 초필수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에 대해서 이해하고 또 사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정말 필요하지만, 그걸 알고 받아들인다고 해서 사랑하는 일이 갑자기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웃과 형제, 나아가서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에는 험한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이 쉬운 것이라면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힘주어서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지도 않았겠지요.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좀 무덤덤하고 그래야 하는데, 제가 생긴 건 이래도 많이 예민하고 날카로운 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부족한 사람이나 실수한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어느 정도 연습이 되어 있지만, 의도적으로 악한 일이나 못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고 용납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실은 사랑만큼 저를 영적으로 자주 그리고 심하게 좌절시킨 신앙적인 덕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스스로도 제일 약한 부분에 대해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역시 너무 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도 자기 의지와 힘만을 의지하는 쪽으로 흐르기 쉽고, 그래서 그만큼 사랑하는 일에 대해서 실패하기 쉬운 저같은 사람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진보를 보일 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저처럼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신다면 그런 분들은 특별히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능력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시면 무작정 사랑하려고만 합니다. 결단을 내리고 마음을 다져먹고 사랑하려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막상 싫은 사람, 미운 사람, 짜증나는 사람 앞에 서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먼저 미소를 지어야 하는데 굳어진 얼굴은 변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작은 사랑의 씨앗조차 뿌리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아! 또 졌구나. 또 사랑하지 못했구나.”라는 깨달음이 몰려오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된 이후입니다. 물론 사랑은 절대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결단을 내려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결단과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해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한 번 두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나중에는 그러다가 더 깊은 미움을 가지게 될 때도 있습니다. 제가 가끔씩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명령만 내려놓고 뒷짐지고 계시는 분이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내리실 때는 항상 그 명령 뒤에는 항상 “네가 그 명령에 진정으로 순종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내가 도와줄께. 내가 하도록 해 줄께.”라는 약속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어딘가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결정적인 도움까지도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은 “네 힘으로만 그 일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은혜 안에서, 내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그렇게 하라. 그러면 될 것이다”라는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나를 모르는 것이고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반드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그저 여기서만 끝났다면 우리는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그 사랑은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지기 힘든 짐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랑할 준비가 되었니? 꼭 사랑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생겼니?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해 봐라. 항상 이 방법을 사용해라. 그러면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방법은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흉내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그 방법 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7절부터 11절까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나신 바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왜 당연한 일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을 알고 믿으며 또 그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랑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우리 속에서 사랑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성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랑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큰 짐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누리는데 있어서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순전히 손해만 보는 일은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포기하려면,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려면 그렇게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만족이 그렇게 포기되어지는 것보다는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는 일, 그 나쁜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그런 만족을 주는 일이 아닙니다. 나와 갈등관계에 있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람을 용납하는 일자체는 그만큼 가치있는 일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려면, 적어도 나와 갈등관계에 있고 또 서로 이익이 얽혀있는 사람, 특히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용납하려면 그렇게 하는 행동 자체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 동안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그토록 자주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만족스러운 일도 아니고, 또 그렇게 포기된 만족을 채울 수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포기하고 희생하며 그저 사랑하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 두 번은 억지로 어떻게 해 볼 수 있겠지만 그런 노력들은 마음 속에 분노만 남기고 끝나버리기가 쉽습니다. 


회원 여러분, 사랑의 능력은 원래부터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결코 우리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고 누릴 때, 그 안에 거하며 충분한 만족할 때만 진실로 가능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아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얼마나 제대로 아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사랑의 크기가 결정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이고 온전하며 아름답게 드러내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가장 풍성한 은혜 가운데 있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아무리 사랑하려고 해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갑자기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스스로의 생각에도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일이 예전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다시 어려워지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무엇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갑자기 쉬워졌다가 또 다시 예전처럼 어려워졌을까요? 그것은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꽉 채워져 있을 때는 그 은혜는 우리에게 흘러넘치는 만족을 줍니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만족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밥을 충분히 먹고 나면 사람이 무척 너그러워지듯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르게 되면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 내려놓고 포기해야할 생각이나 이익들까지도 훨씬 쉽게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그럴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라 우리가 그 은혜를 잘 간수하고 또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처럼 그 은혜로만 만족하려는 싸움을 계속하지 않으면 그 은혜의 수위가 내려가게 되고 그래서 그만큼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다시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 중에서 최고로 크고 풍성한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자신을 속죄제로 드리신 일이야 말로 그 사랑이 얼마나 불가사의할 정도로 크고 놀라운 사랑인지를 드러내 주는 흘러넘치는 사랑의 샘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랑을 알고, 믿고 의지하며,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큰 능력의 근원이 되어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사랑에 만족할만큼 그 사랑을 알자

회원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한 사랑이라는 짐이 아무리 무겁고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도 우리는 그 짐을 져야만 합니다. 그 짐은 내 마음대로 포기하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짐을 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짐을 지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일에 가장 큰 헌신을 보여야 할까요? 그것은 놀랍게도 사랑하는 일 자체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입니다. 그 사랑을 진실로 알게 될 때, 우리는 그제서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만큼 풍성한 만족을 누릴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믿어야만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실입니다. 


사랑하는 회원 여러분, 우리는 항상 사랑하는 일에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 대해 성장해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사랑이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믿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정도까지 그 사랑을 알고 믿으며, 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다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대로 알아가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요, 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의 이유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 영혼의 최고의 목적이 되게 하십시오. 꼭 그 일에 여러분의 시간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은 분명히 우리 모두의 영혼을 가장 만족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 즐겁게 순종하며,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담대히 서게 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 :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알고 믿고, 거 사랑에 만족할 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