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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년 매일성경 설교. 호6:1-11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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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2-06-15

본문 : 호세아 6장 1-11절


성경에는 우리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는 은혜로운 구절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구절들은 특히 우리가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혼란을 겪거나 구원에 있어서 흔들릴 때면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구절들 중에서도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구절이 있다면 아마도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는 로마서 10장 10절의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확실한지 모릅니다. 마음에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기만 한다면 내 믿음과 구원은 더 이상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구절은 처음 복음을 전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이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고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명쾌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반대로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 가장 큰 오해를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믿음과 구원은 그저 마음과 입의 문제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의심만 없으면, 그리고 그것을 나의 입으로 그렇다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끝납니다. 그러면 의도 구원도 모두 나의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 구절과 정반대가 되는 구절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7장 21절인데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군가가 진심으로 “주여! 주여!”라고 주님을 부른다면 그 사람이 마음으로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둘 중에 뭐가 맞는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런데, 실은 이 두 말씀을 하나로 만드는데 참된 신앙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편의상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를 합해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대하실수록 이상하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마치 호세아의 아내처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용서하면 용서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을 잊었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이스라엘의 연인의 자리, 남편의 자리를 떠나서 그들을 헤치는 사자의 역할을 택하셨습니다. 가장 강하신 분이 사자가 되어 그들을 물어 뜯으니 이스라엘을 구해줄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살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사자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사자가 되신 이유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닫고 또 그렇게 하게 히사기 위해서 였습니다. 더 이상 기댈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스라엘은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극심한 고난 끝에 이스라엘이 도달한 결론은 바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떠났습니다. 그렇게 아내로서 남편이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버렸습니다. 그러니 다시 그 분께로 돌아가면 되고, 다시 힘써 여호와를 알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향해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돌아가서 힘써 하나님을 알아가자고 권면했습니다. 정말 어렵게 얻은 대답이고 또 결론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듣고 싶어하셨던 고백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막상 아내로 부터 이런 기특하고 감격적인 이야기를 듣는 남편이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이 말씀은 “이제 네가 내가 바라던 바른 깨달음과 고백에 이르렀으니 원하는 것을 다 말해봐라”라는 그런 뜻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이스라엘 때문에 더 큰 고민에 빠지셨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통과 고난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그 남편을 아는 대신, 남편이 아닌 외간남자를 알아가는데 집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만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4장 이하를 보면 그러한 우상숭배의 죄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함께 지적하시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인애가 사라졌고 오히려 압제와 폭력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바른 깨달음에 이르렀고, 바른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물을 가져와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을 표시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런 답을 알고 또 그 답대로 따르는 겉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혹시 몰라서 잠시 인애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인애는 한 마디로 말하면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그 분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실 정도로 강하고 변함없는 이유는 그 사랑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에 기초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에 지극히 선하시고 영원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더해지니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떠나고 또 떠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애’라는 사랑은 필요 이상의 헤픈 사랑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또 하나님을 알겠다고 예배드리는 일에만 전념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두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 분의 모든 선하시고 변함없으신 성품을 제대로 아는 것, 그 지식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만큼 그 분을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지식을 원하십니다.  또 하나 그렇게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 분을 본받는 것, 그 분의 인애를 흉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형식이 중요할 때는 단 한 가지 경우 밖에 없습니다. 그 형식 안에 담겨야 할 내용이 담겨져 있을 때입니다.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형편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드리며 교회 일을 돌보고 헌신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 위에 세워진 그 분을 향한 신뢰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또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설득되어서 그 분의 성품에 물들어 가는 자신의 형상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고 또 단 한가지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문제도 알고 그 문제의 해결방법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정답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열심히 드렸고, 제사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속빈 강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 속에, 우리의 기도 속에, 혹은 우리의 헌신이나 섬김 속에 과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사랑하고 신뢰하게 만들 정도로 그 분을 아는 참된 지식이 자라가고 있는지, 또 그래서 그 분의 그 아름다운 성품을 닮아가려는 소원과 몸부림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형식만 잘 갖추어져 있고 정성만 깃들어 있다면 하나님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신앙과 신앙의 행위 속에서 그 분께 쏙 빠져 버릴 정도로 그 분을 제대로 아는 지식과 부족하지만 그러한 그 분의 사랑을 흉내내며 닮아가려는 애씀을 발견하실 때, 우리의 모든 예배와 기도, 그리고 섬김을 진정으로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신앙은 단순히 마음과 입의 문제가 아닙니다. 형식과 정성의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 그 분의 성품을 흉내내려는 우리의 소원과 애씀이 들어있을 때,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가치있게 여기시는 믿음이 될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긍정적인 의미이건, 부정적인 의미이건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게 마련이고, 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근심과 노하심 속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기쁨과 만족 속에서 말씀해 주시는 “내가 널 위해 무얼 해 주면 좋겠니?”라는 다함 없는 은혜의 속삭임으로만 들려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에게도 그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그 말씀은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실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 하나님을 닮아가는 믿음을 키워감으로써 항상 “내가 널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니?”라고 물으시는 세상에서 가장 풍성한 말씀을 들으시며 살며, 그 분 다시 오시는 날 그 앞에 흠없고 점없는 순결한 그 분의 아내로 서는 그 영원한 복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