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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11.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31편입니다. 

     누구나 평강을 원한다. 그렇다면 평강은 누구의 것일까? 그리고 누가 그 평강을 계속해서 누리게 될까?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하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인은 전혀 진취적이지 않아 보인다. 마음도 눈도 높지 않다. 시인은 높이 나는 새가 아니다. 그러니 그는 큰 일이나 굉장한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것은 시인의 ‘천성’이 아니다. 시인은 그런 삶의 유형을 일부러 선택하고 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선택하는 형태의 삶과는 정반대가 되는 삶의 유형일 것이고,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참 어리석고 무능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우리가 왜 눈과 마음을 높이며 큰 일과 굉장한 일에 집중하며 살아갈까? 그것은 그렇게 해서 얻은 성과들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해야 자신을 안전하게 하는 크고 든든한 성을 세울 수 있다고 믿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작 ‘평안의 비결’은 정반대의 장소에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마음을 낮추고 눈을 낮추고 큰 일과 놀라운 일에 힘쓰지 않고... 이런 삶이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상식적으로 볼 때, 대단한 것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삶은 어디서 자신을 든든하게 버티게 해 줄 대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 마음과 눈을 높여 크고 놀라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힘쓸 것이며 그렇게 쌓아올려진 성 안에서 평안하게 쉴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른다면 그는 또다시 평안을 얻으려고 애쓰지만 진정한 평안에서는 오히려 더 멀어지는 삶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시인이 마음을 낮추고 눈을 낮추며 큰 일과 놀라운 일에 힘쓰지 않은 삶을 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누릴 수 있는 평안”이었다.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일견 모순처럼 여겨진다. ‘젖을 먹는 아이가 엄마 품에서 누리는 평안’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젖먹이 일 때, 아이는 젖을 빨기 위해서 엄마 품에 안기며, 그렇게 엄마 품에 안기면 정말 허겁지겁 그리고 가열차게 젖을 빨아댄다. 그 갈급함과 배고픔을 채우려고 말이다. 그럴 때 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만족하게 될 것이란 기대는 있겠지만 참된 만족이 가져다 주는 평안은 없다. 그러나, 젖을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젖을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있으면 그 아이는 그 안겨있음으로 말미암아 넉넉하고 만족하며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평강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평강은 이제 막 젖을 뗀 아이여야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이미 엄마 품이 가져다 주는 그 평안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각주:1]. 젖을 뗀 아이라야 엄마 품에서 진정으로 ‘안식’할 수 있다. 그 아이만이 엄마 품이 주는 최고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각주:2]

중심이(아! 몸이나 감정이 아니라 중심이다)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는 것 같이 평안하다면 그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 아이가 세상을 다 준다고 한 들,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져 나갈까? 다시 앞으로 돌아가 보자. 지루하더라도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시인은 이런 평강을 어떻게 얻게 되었을까? 눈을 낮추고 마음을 낮추고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집착하고 노력하는 일을 내려놓음으로써이다. 기독교는 겸손을 가장 큰 미덕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겸손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각주:3] 겸손하지 않고는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없고, 또 하나님으로 자신을 가득 채울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미덕이다. 겸손하지 않고는 이런 참된 신앙함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 겸손이 만족과 평안의 비결이다. 그리고 참된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내가 내 눈을 높이고 내 마음을 높은 곳에 두며, 크고 놀라운 일에만 집착하고 그것만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러한 삶에는 하나님을 위한 공간은 없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내가 아무리 눈을 높이 둔다고 해서 하나님의 눈보다 높겠고, 내 마음을 높은 곳에 둔다고 해서 그 분의 마음보다 높겠으며 내가 가장 크고 놀라운 일을 계획하며 이루려고 한다고 해도 그 분이 이루시는 큰 일과 놀라운 일보다 크겠는가?[각주:4] 대답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실은 스스로 눈을 높이고 마음을 높이며 그래서 스스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보다는 눈을 낮추고 마음을 겸손히 하며 크고 놀라운 일을 내려놓아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려 그 분의 기준으로 그 분이 행하시기 하는 사람이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게 됨은 분명하다. 

내가 붙잡고 이루려고 하면 그런 노력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리라는 보장이 없는 노력일 뿐더러 그렇게 이루려고 하는 것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그것은 내 크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되 겸손하게 모든 목적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런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의 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각주:5] 게다가 그 일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아무리 놀라운 일이라고 한들 그 일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사람이 누리는 그 불가사의한 평강이 깨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각주:6]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영원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만이 ‘젖 뗀 아이가 어미의 품에서 누리는 평강’을 놓치지 않을 것이고, 그 분이 일하시는 크기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눈에 보기에 큰 것들을 붙드느라고 진짜로 크고 놀라운 일을 놓치지 말게 하시고, 보장 없는 평강을 추구하느라고 손에 쥐어주신 평강의 비결을 사용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해 주소서. 

  1.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순진함을 잃어버리며, 독립이 무엇인지를 배워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전부이면서도 그 분이 주시는 무엇이 아닌 그 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어린아이만이 그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은 그 아이가 어머니에게 한 없이 의존적이면서도 그 어머니가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어머니라는 존재 자체 안에서 만족을 찾기 때문이다. 그 어머니 안에서 쉬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 모든 기독교적인 미덕이 다 그렇다. 미덕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있다. 하나님이라는 목적을 섬긴다. [본문으로]
  4. 무한 앞에서 유한은 아무리 커도 없는 것이라는 파스칼의 지혜를 배우라! [본문으로]
  5. 눈에 보이는 일의 크기가 그 이르이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그 일이야 말로 정말 크고 놀라운 일이다. 단지 믿음의 눈이 없어 그것을 온전히 보지 못할 뿐이다. [본문으로]
  6. 평강도 목적은 아니다. 덤이다. 그러나 덤으로 얻어진 평강만이 참 평강이다. 왜냐하면 평강이 목적이 되고 그래서 그 평강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 그 때부터 그 평강은 오히려 우리의 평강을 깨뜨리는 이유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선택의 반복이라고 할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