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시편 128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두려움의 이유는 크게 보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힘이 있는 공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이 세고 난폭하며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혹은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유형, 무형의 것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또 한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거기서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들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다. 물론 이럴 때 느끼는 두려움은 그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없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느끼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거기서 얻는 만족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커진다. 경외함이라는 이 두 가지의 두려움이 합해진 두려움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다. 거룩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우리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계시며, 그 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도 가지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 분 앞에 서는 일이, 그리고 그 분 앞에 서게 되는 일 자체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만약 죄가 없었다면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그리고,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단순한 감성적인 고백이 아니다. 이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신앙의 공리이다. 그 분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은 그 분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우리 삶과 연결시켜 보면 그 분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디서도 우리의 가장 작은 필요를 채워줄만한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무런 만족도 없다는 뜻이다. 그 분이 모든 만족이 되신다는 뜻이다. 만약 이런 분이 없어진다면, 내 삶에서 생략되어 버린다면 우리 삶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모든 면에서의 ‘공허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두려운 분이시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두려운 분이어서 두려워하고 또 너무 좋은 분이어서 두려워 한다.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니 그 분의 뜻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그 분의 뜻에 그 분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분은 순종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 순종하는 자에게 그 분의 충만한 임재를 허락하신다. 그것이 그 분의 약속이다. 그래서 그 분이 함께 계시고 그래서 그 분이 채워주시는 삶을 살아가려면 그 함께하심과 채워주심을 보장해 주는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 분을 그 분이 주시는 만족 때문에 경외하는 사람은 그 분의 도를 행할 수 밖에 없다.
그 이후의 구절들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들이 약속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복들이 흔히 쓰는 표현대로 “별 것”이 아니다. ‘별 것’만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는 가히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다.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단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을 것이고(당연하지! 자녀들을 낳았으니까) 자녀들은 어린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란다(아직 자기 열매가 없으니 어린 감람나무다), 그리고 그 식구들과 함께 저녁식탁에서 맛나게 저녁식사를 하게 해 주신단다. 이게 “형통”이란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형통”이 이런 것이란다. 정말 놀랍도록 평범하고, 그 “복”을 받지 않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 눈이 너무 높고 우리의 욕망의 주머니가 한 없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 ‘평범한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금방 드러난다. 우리 삶에서 이것들을 한 가지씩 빼 보자. 그러면 이 ‘별 것 아닌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직접 하나씩 해보라. 그래도 이것이 평범하게 여겨질 것인지...) 사실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 ‘평범한 것들’이 다 제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복이 되는 것들이다. 그러니까 특별한 복은 평범한 복들이 없다면 별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이런 “평범한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연 다른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진짜로 만족할 수 있을까?(여기서 만족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교만은 자신의 소유 때문에 허영스런 자아가 부풀려져서 느껴지는 팽만감하고는 다른 것이다. 허영심이 채워질 때 느껴지는 팽만감은 꽉 찬 느낌이라는 점에서는 만족하고 같지만, 그래서 그것이 만족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짜 만족은 존재를 풍성하게 해야 하며 평안하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의 허영심이 아니라 속사람이 충만해져서 느껴지는 것이 바로 만족이다. 이런 것이 아닌 것을 만족이라고 부르며 그것만이 만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얄팍한 모조품 만족에 길들여져 있고 그것만 경험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삶이 형통한 삶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체 그 무엇이 형통으로 여겨질까? 만약 이 시편이 말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 진짜 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다른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평생 “형통”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 ‘별 것 아닌 것들’이 진짜 ‘별 것’이고 ‘복’이며 ‘형통’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주시고 또 누리게 하시는 복이다.
그렇다고 해도 왜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비까번쩍한 복을 주신다고 보장하지 않으실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렇게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것들로는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존재들임을 아시기 때문이고, 둘째는 다른 것들을 주시기 위해서 이다.
“여화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 모든 복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 실은 그 분이 우리의 복이다. 똑 같아 보이는 복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는 그 복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복’이 된다. 아니, 그들은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복 주심의 확실한 증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 분이 그 분 자신을 내어주신 증거임을 안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다. 참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샬롬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알고, 믿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니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진짜 복이며 형통이다. 하나님께서 그 분을 경외하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에게만 주시는 아주 특별한 복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게 하옵소서. 평범한 것들의 특별함을 알게 하소서. 그 평범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함께 해 주심의 증거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온전한 '샬롬'을 누리며 살아가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