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시편 137편입니다. 요청이 있어서 오늘부터는 파일도 같이 올리겠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라는 광고의 카피가 생각난다. 시편 137편을 읽으면서 ‘은혜는 움직이는 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본문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움직여 갈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노래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애가. 슬픈 노래다. 노래는 노래되 슬픈 노래다. 그런데 왜 기뻐야 할 노래가 슬픈 것이 되었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할 자리, 자신의 땅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광은 그 영광 가운데 있을 때는 한 없이 좋은 것이지만 그 영광에서 떠나게 되면 오히려 큰 슬픔과 애통의 이유가 된다. 시온...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거기 없다. 그거 있을 때, 그 영광스러운 곳에 있을 때, 그 자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제 시온은 추억의 장소가 되었고, 그 추억은 행복한 웃음이 아닌 울음의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4절)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이미 하나님의 노래,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될 수 없었다. 그 노래는 바벨론 사람들을 위해서 불러야만 하는 ‘유희’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고, 또 노래해야할 자리인 시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감사, 그리고 소망을 영혼을 다해 노래하지 않으면 그 노래는 이내 하나의 ‘문화’가 되어 버린다. 우리에게 문화가 되어버린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비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노래’로 들려질리가 만무하다. 그렇게 문화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노래’는 그 누구도 그 참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문화로 감상의 대상이 되고, 연구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때 그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탄식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 진대 내 오른손에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5-6절)
몸에 새겨진 기억, 재주는 그 재주를 지닌 지체가 제거되지 않는 한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은 그렇게 몸에 새겨진 기억보다 자기 마음에 새겨진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이 더 진하고 강렬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흐려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까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듣지 못하는 예루살렘에게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다짐한다. 아프다, 절실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미 떠나버린 연인이 되어 버렸다. 함께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고 홀대하다가 막상 떠나보니 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 여인은 곁에 없고 그 곁으로 갈 수도 없다. 아무리 소리치고 다짐한 들 그 여인은 들을 수 없다. 이전에 그 여인과 함께 부르던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이제 다른 여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르는 ‘유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노래를 부르면 부를 수록 그리움은 커진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흐릿해져 간다. 그래서는 안되는 대도 기억은 약해지고 흐려진다. 시인은 그 기억을 자신을 저주하면서까지 붙잡고 싶어한다. 그 기억을 잊으면 그 여인도 잊게 되니 말이다. 1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7절)
이제 소망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 그 분만이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하나님을 소홀히 여겨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리고 돌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을 다시 모시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장벽이 있다. 에돔과 바벨론이다. 이들이 버티고 있는 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은 묘연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그 장애물을 치워달라고 간구한다.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슬픈 노래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찬양’이 아닌 ‘문화’가 되어질 때, 그 노래는 언제든지 애가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참으로 가치있는 것이 아닐 때 세상의 놀잇감이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도 세상의 천덕꾸러기들이 될 것이다. 그들 앞에서 수금이나 켜는 광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부르는 하나님의 노래는 어떤가? 한 곡 한 곡 찬송을 부르고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 속에 ‘내’가 담겨있고, 또 내가 부르는 ‘하나님’이 담겨 있는지 묵상하며 반추해야할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노래가 애가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우리의 노래가 우리의 문화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우리 노래는 항상 찬양이 되게 하시고, 참된 감사와 믿음이 담긴 그릇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이방에서 여호와를 노래하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소서.”
- 도시나 국가는 성이 여성이다. 예루살렘도 바벨론도 여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을 때, 그들을 바벨론이라는 또 다른 여인의 품으로 옮겨 놓으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