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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16.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37편입니다. 요청이 있어서 오늘부터는 파일도 같이 올리겠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다’라는 광고의 카피가 생각난다. 시편 137편을 읽으면서 ‘은혜는 움직이는 거다’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본문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움직여 갈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노래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1절) 

애가. 슬픈 노래다. 노래는 노래되 슬픈 노래다. 그런데 왜 기뻐야 할 노래가 슬픈 것이 되었을까?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할 자리, 자신의 땅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광은 그 영광 가운데 있을 때는 한 없이 좋은 것이지만 그 영광에서 떠나게 되면 오히려 큰 슬픔과 애통의 이유가 된다. 시온...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은 거기 없다. 그거 있을 때, 그 영광스러운 곳에 있을 때, 그 자리를 주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이제 시온은 추억의 장소가 되었고, 그 추억은 행복한 웃음이 아닌 울음의 이유가 되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4절)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이미 하나님의 노래,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될 수 없었다. 그 노래는 바벨론 사람들을 위해서 불러야만 하는 ‘유희’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고, 또 노래해야할 자리인 시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감사, 그리고 소망을 영혼을 다해 노래하지 않으면 그 노래는 이내 하나의 ‘문화’가 되어 버린다. 우리에게 문화가 되어버린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비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노래’로 들려질리가 만무하다. 그렇게 문화가 되어버린 ‘하나님의 노래’는 그 누구도 그 참된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문화로 감상의 대상이 되고, 연구의 대상이 되거나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럴 때 그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고 탄식하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 진대 내 오른손에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지로다”(5-6절) 

몸에 새겨진 기억, 재주는 그 재주를 지닌 지체가 제거되지 않는 한 잊혀지지 않는다. 시인은 그렇게 몸에 새겨진 기억보다 자기 마음에 새겨진 예루살렘에 대한 기억이 더 진하고 강렬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흐려지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한다.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까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스스로에게, 그리고 듣지 못하는 예루살렘에게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다짐한다. 아프다, 절실하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이미 떠나버린 연인이 되어 버렸다. 함께 있을 때는 귀한 줄 모르고 홀대하다가 막상 떠나보니 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여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각주:1]. 그러나, 어찌하랴 그 여인은 곁에 없고 그 곁으로 갈 수도 없다. 아무리 소리치고 다짐한 들 그 여인은 들을 수 없다. 이전에 그 여인과 함께 부르던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이제 다른 여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부르는 ‘유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노래를 부르면 부를 수록 그리움은 커진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흐릿해져 간다. 그래서는 안되는 대도 기억은 약해지고 흐려진다. 시인은 그 기억을 자신을 저주하면서까지 붙잡고 싶어한다. 그 기억을 잊으면 그 여인도 잊게 되니 말이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7절)

이제 소망은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 그 분만이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하나님을 소홀히 여겨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리고 돌아가는 것은 그 하나님을 다시 모시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적인 장벽이 있다. 에돔과 바벨론이다. 이들이 버티고 있는 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은 묘연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그 장애물을 치워달라고 간구한다.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노래는 슬픈 노래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을 향한 노래가 ‘찬양’이 아닌 ‘문화’가 되어질 때, 그 노래는 언제든지 애가가 될 수 있다. 우리에게 참으로 가치있는 것이 아닐 때 세상의 놀잇감이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도 세상의 천덕꾸러기들이 될 것이다. 그들 앞에서 수금이나 켜는 광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부르는 하나님의 노래는 어떤가? 한 곡 한 곡 찬송을 부르고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 속에 ‘내’가 담겨있고, 또 내가 부르는 ‘하나님’이 담겨 있는지 묵상하며 반추해야할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노래가 애가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우리의 노래가 우리의 문화가 되지 않게 해 주소서. 우리 노래는 항상 찬양이 되게 하시고, 참된 감사와 믿음이 담긴 그릇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이방에서 여호와를 노래하는 일은 절대로 없게 하소서.” 

  1. 도시나 국가는 성이 여성이다. 예루살렘도 바벨론도 여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셨을 때, 그들을 바벨론이라는 또 다른 여인의 품으로 옮겨 놓으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