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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1.17. 매일성경 묵상

   
      오늘 본문은 시편 138편입니다. 

    수많은 ‘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기도와 고백을 해야할까? 우리 주님은 어떤 점에서 다른 ‘신들’과 차별되시는 분이시고 또 그래서 찬양과 감사의 대상이 되셔야만 하실 분이실까?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이 세상에는 ‘신들’이 많다. 진짜 신으로 여겨지는 신들도 많지만 신들이 아닌척 신들보다 더 높고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것들이 참 많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는 바로 이런 신들의 가운데이며, 이러한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의 사이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심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기도 어렵고 그 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어렵다. 하나님은 마땅히 전심으로 드리는 감사를 받으실만한 분이시지만 이러한 우리의 삶과 신앙의 자리 때문에 전심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온전한 감사를 드리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심’은 참된 신앙의 필수요소이다.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분은 온전히 인자하시고 영원히 성실하시다. 항상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시다. 이것은 다른 ‘신들’이 가지지 못한, 우리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반석같은 하나님의 성품이시다. 시인이 신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미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노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밝혀 놓았으면서도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여진 말씀’이다. 우리에게 이런 표현은 참 생속하고 어색하다. 주의 이름보다 더 높은 것이 어디있던가?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모든 이름 위에 주의 말씀이 높이 들려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아마 이런 뜻이 아닐까?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존재이다. 그러나 그 분의 존재는 그 누구도 직접 인식할 수 없다.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존귀하지만 그 영광의 광체를 직접 경험할 수는 없다. 여기서 그 분의 존재가 지니는 영광의 광체를 부분적이나마 드러내 주고 알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 특히 그 분의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그 분의 언약이 아닐까? 양초는 촛불의 근원이다. 그 불의 모든 성질은 양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빛나는 것은 양초가 아니라 촛불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말씀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분명 하나님의 존재에서 나오지만 우리는 그 말씀이 성취되어지고 증명되어지며 그래서 빛나게 될 때 비로소 그 말씀의 광체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통해서 였다. 이는 단지 기도의 응답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백성을 향하여 다함없는 인자하심을 증명해 보이신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시인은 대범한 주장을 한다. 그것은 자신 뿐만 아니라 땅을 다스리는 모든 왕들도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땅의 열왕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땅의 열왕’은 사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세력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주장은 획기적이며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시인의 말대로 땅의 열왕도 주의 말씀을 듣고 있고 그런 점에서 감사해야 한다. 주의 말씀은 어디나 있다. 그리고 어디서나 일하고 있으며 또 성취되고 있다. 그가 왕으로 있는 정치체계 속에, 자연 속에, 우리의 존재 속에, 사람들의 관계 속에, 이성 속에, 도덕 속에... 그 어디나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하고 있으며 바로 그 말씀이 그 모든 것을 존재하게 했고,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으며 질서잡고 있다. 물론 땅의 열왕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며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존재하며 또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또한 이미 하나님의 영광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하감하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 속에서 실제화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왕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찬양해야할 이유이기도 하다. 낮은 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이다. 자신이 아무리 높아도 자기 위에는 항상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있음을 기억하는 자이다. 교만한 자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자이다. 왕이니까 자기가 가장 위에 있으며, 그래서 자기 위에는 심지어는 하나님도 계지지 않다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식이 다르시다. 그 분은 높이 계시지만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신다. 더 낮을 수록 그 낮은 자를 더 가까이 하시고 친밀히 돌보신다. 그러나 교만한 자, 스스로를 높이는 자는 그냥 알고 계신다. 그가 스스로를 높이는 자임을,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떨어뜨려 놓은 자임을 알며, 그가 그 자리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신다. 사람이 스스로를 높이면 자신이 높아져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가 발생한다. 높이면 높일수록 하나님과 멀어진다. 그리고 그 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에게로 향하는 하나님의 은혜도 그만큼 멀어지고 희미해 지게 한다. 그는 그렇게 점점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가 자기 힘으로, 자기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그 분의 은혜가 가려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아신다는 것은 교만한 자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환란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신앙에는 확신만 있지 않다. 거기에는 간절한 간구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확신과 간구는 정반대편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불안해 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그리 간절한 기도는 터져나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호와게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고 흔들림 없이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에 문제가 될 것이 무엇이겠는가? 결국에는 모든 것이 완전해 짐을 확신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런 확신은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불안한 간구와는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신앙 속에는 이 두 가지가 항상 병존한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는가 하면, 그 이면에는 버림받음에 대한, 홀로 남겨짐에 대한 불안이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우리가 불완전하다면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의 믿음은 우리 생각처럼 완전무결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런 믿음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불완전함의 의미이다. 마지막 세 구절의 역설은 바로 여기서 역설이 아닌 지극히 논리적인 우리의 믿음에 대한 설명이 된다. 지금 확신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자. 그 뒤 어딘가에는 연약한 불안함이 있으니까. 지금 불안하다고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자. 그것이 우리의 불완전함이라는 존재의 현실이니까. 확신가운데 있을 때 교만하지 않으며, 불안한 가운데 있을 때 좌절하지만 않으면 된다. 언제나 변함없이 겸손함으로 더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 이것만큼은 기억해야 한다. 잊으면 안된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불안한 순간에 가장 깊게 묵상하고 확신해야 할 신앙의 명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 것이다. 왜냐 하면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 영원하심 속에서 그 분의 완전하신 계획을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고 나약하지만 항상 이 믿음 가운데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결국 그렇게 해 주실 것이다. 삶의 현실이 아닌 믿음의 결국을 바라보자. 잠정적인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러면서 그 약속 위에서, 모든 ‘신들’ 앞에서 그 분을 찬양하며 감사하자. 앞으로 베풀어 주실 모든 은혜로 인해...

하나님, 모든 신들 앞에서 하나님께만 찬양하고 하나님께만 전심으로 감하사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비록 때로는 연약하고 또 불완전하지만 그것을 부인하지 말고, 그것을 겸손의 이유로 삼아 더욱 주님을 찾게 하시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우리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이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이유가 됨을 알게 하시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견고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