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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14. 새벽-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3(요한복음 10)


요0143to51 -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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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43-51절


       우리는 그제와 어제 이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참된 이스라엘인 나다나엘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나다나엘들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놀라운 약속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참 이스라엘을 위해서 십자가의 그 모든 풍성한 복을 약속해 주셨다는 것을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보물이 있고 그것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도 만약 거기까지 가는 길을 모른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물을 찾으려면 지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위한 가장 귀한 보물은 바로 십자가의 부요함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흘러들어오는 하늘의 풍성하고 선한 모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보물은 나다나엘들,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는 곳에 쏟아질 것입니다. 바로 거기가 그 보물이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거기까지는 어떻게 가야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간사함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져 갈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 해답,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잠깐 야곱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엄청난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간사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디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까? 바로 얍복강 나루터에서 였습니다. 가족과 전 재산을 모두 먼저 강건너로 보내고, 야곱은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근심과 걱정, 그리고 두려움이 얼마나 깊었겠습니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형과 아버지까지 속이고 집을 버리고 도망까지 갔었지만, 이제 고향 땅 앞에서 화가 난 형 에서를 달래려고 그렇게 해서 얻은 그 많은 재산을 식구들과 함께 선물로 먼저 보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에서가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준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시비를 걸어옵니다. 야곱은 그와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붙들고 레슬링을 합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사람이 누군지 몰랐지만, 씨름을 하면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력을 다해 그를 붙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의 허벅지를 걷어찹니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고 맙니다. 사자는 야곱에게 말합니다. “이제 나를 가도록 내버려 두어라”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자는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 주면 나를 놓아주겠느냐?” 야곱은 대답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복을 빌어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자는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은 대답합니다. “야곱, 간사한 자, 사기꾼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야곱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속이고 속으면서 살아온 모든 과거, 그러고도 강조차 건너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 사기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고 불릴 것이다.” 야곱이 그 사자의 이름을 묻지만 그 사자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축복하고 떠납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얼핏보면 이 이야기가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 이긴 후에 새 이름을 얻은 사건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여 이긴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나님보다 센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왔던 사람과 싸워 이겼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혹시 그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져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야곱에게 져 주시고, 새 이름을 주시려고 야곱을 찾아간 것은 아닐까요? 또 한 가지, 야곱이 새로 얻은 이름을 보면 분명히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읽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씨름을 하다가 다리를 걷어차는 것은 반칙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넌센스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는 했어도, 그것은 그냥 뒤엉켜 싸우는 싸움이었지 룰이 있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싸움에서 허벅지 한 번 걷어찬 것을 반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반칙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그 싸움을 승리로 끝내신 것입니다. 패자는 야곱이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졌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승리의 선물로 영광스러운 이름을 새로 주십니다. 그리고, 그 날 야곱은 형을 만났지만 또 옛날의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긴 이스라엘이 형이 두려워서 다시 야곱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참 이스라엘이 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도 이름만 이스라엘인 채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맙니다. 


      그런데, 이 일에 성공한 한 사람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 앞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이 말씀은 나다나엘이 야곱이 실패한 일에 성공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간사함을 처리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싸워 이겼지만 진짜 이스라엘이 되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싸워 이겼을 뿐만 아니라 진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 승리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지만 나다나엘은 그 승리를 계속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이기는 길이며, 그 승리를 계속 이어가서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 되는 길일까요? 그래서 십자가의 그 풍성한 복을 보고 또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될까요? 


        성도 여러분, 사실 하나님께서는 지시기 위해서, 져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어오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 인생의 얍복 나루터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결투를 신청하십니다. 그 싸움은 사실 하나님께서 결코 지실 수 없는 싸움이고, 또 실제로도 이기시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싸움에서 완전히 이겨놓고, 우리의 허벅지 뼈를 어긋나게 해 놓으시고도 “내가 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기시고도 지셨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언제 그 분의 승리를 우리의 승리로 넘겨 주시는 것일까요?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그 때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가 졌다”고 하신 때는 야곱이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복주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고백했던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렇게 야곱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약자이고 또 패자라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내가 졌다고, 내가 지고 하나님께서 이기셨다고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때 우리에게 승리를 넘겨주시고, 승자가 얻는 선물, 그 영광스러운 이름인 이스라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패배를 철저히 인정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누리며 사는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분도 아기고 또 나도 이기는 놀라운 비결인 것입니다.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이름 속에는 그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며 고백하며 거기 의지해서, 거기 만족하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그 이름에 어울리는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도 사람인지라 이기적인 욕심도 있고, 그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이런 저런 방법을 사용하고픈 유혹도 받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되고 싶을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때마다 자기만의 얍복 나루터, 그 이름모를 무화과 나무 아래로 갔을 것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이름을 붙들고 싸웠을 것입니다. 나는 나다나엘이라고, 나는 모든 좋은 것들, 모든 만족스러운 것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그렇게 살겠노라고, 그렇게 살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복을 빌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다나엘로 빚어져 갔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를 만족시키는 것을 내 힘으로 얻으려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 속의 야곱은 또 다시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우리를 야곱의 삶의 방식으로 몰고 갑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여전히 이리 저리 흔들리는 간사함 속에서 항상 목마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우리 속의 야곱이 많이 나다나엘이 되지 못해서 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의 얍복 나루, 나의 무화과 나무 아래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져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거기서 나는 이제 야곱이 아니라 나다나엘이라고, 그러니 나다나엘이 되게 해 달라고,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게 해 달라고 부르짖으며,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해야 합니다. 내가 믿었던 나의 힘의 원천인 숨겨진 허벅지 뼈를 그 분께 내어드리고 그 분께 철저히 항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은 나에게 져 주실 것입니다. 그 분의 승리를 우리에게 넘겨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그리고 매일 새벽, 이 예배당 안을 여러분의 무화과 나무 아래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리쳐 기도하십시오. 나는 나다나엘이라고, 나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그 믿음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렇게 마음 속의 야곱을 몰아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십자가의 그 부요한 은혜를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그 분의 놀라운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철저히 항복함으로써 이기는 삶을 사시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