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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09.23. 주일오전 -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마가복음 3)

요0301to08 -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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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가복음 3장 6-13절


우리가 어떤 일의 큰 그림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그 일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많이 틀려지게 합니다. 만약 회사에서 직원에게 어떤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에게 그 일이 전체 회사의 목표나 혹은 특정한 사업분야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준 후에 그 일을 맡기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그 일을 대할 것이고, 또 그래서 그 일을 더 열심히 하게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이 그러한 회사의 설명에 대해서 동의하고, 그래서 자신의 일이 가지는 가치를 확신한다면 만약에 회사에서 자신에게 하는 요구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어려운 요구라고 하더라도 그 일을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며, 그 일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그 요구가 신앙이라는 큰 그림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왜 중요한지를 알고 또 확신한다면, 그 요구가 힘들고 따르기 꺼려지는 그런 요구라고 하더라도  훨씬 쉽게, 심지어는 기쁜 마음으로 거기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했던 일들과 그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굉장히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를 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냥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요구했다고 되어있지만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거의 저주에 가까운 욕을 퍼부으면서 죄에서 떠나고 돌이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분나쁜 소리를 들으면서도 유대인들은 사방에서 몰려들어서 광야로 나왔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세례 요한의 요구대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란 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 그러니까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신들을 온전히 다스릴 그 왕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든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회개하라는 요구가 더 큰 그림 속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프고 힘든 요구였지만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사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그림의 일부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그림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메시지를 듣고 광야로 나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것은 자신이 지금 자신의 사역을 통해 오실 길을 마련하고 있는 그 왕에 대한 요한 자신의 소개였습니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그야 말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을 정도이니까요. 그런 그가 오실 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기대하게 만드는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은 종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는데, 요한은 오실 왕에 비하면 자신은 그 종만도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니 이 한 마디 말보다 예수님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더 빛나게 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며 흥분했겠습니까? 이제 곧 오실 왕은 이 위대한 선지자보다 그만큼 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움직여 가장 하기 힘든 회개를 하도록 만든 세례 요한은 무엇 때문에 자신은 오실 메시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천하고 능력이 부족한 자라고 말했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와 그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또 준비시키기 위해서 온 선지자는 급이 다를 수 밖에 없겠지만, 거기에는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은 바로 이것 때문에 오실 분이 자신에 비해서 그렇게 크시고 능력많으신 분이라고 소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요한의 이런 설명 속에서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진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는 요한이 주었던 죄사함에 이르게 하는 물로 주는 세례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며,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9절 이하로 가 보면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요단강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그 분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기 위해서 받으신 세례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죄가 없으니까요. 형식은 똑같았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는데 그 때,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예수님께로 임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을 말씀하시는 것같지만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아들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다는 뜻인데, 특히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온 세상을 위한 다윗과 같은 왕으로 세우신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왕이신 예수님의 즉위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바로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선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완전한 왕으로 즉위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왕이 되거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합니까? 왕궁이나 대통령 관사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내각을 구성하고 유력한 청치인이나 유명한 인물들을 불러모아 교제를 나누며 자기 자리를 굳혀갑니다. 그렇게 영향력을 확대해 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왕이 되자마자 광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험을 받으시며 짐승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마치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 곧바로 도를 닦고 고행을 하러 산으로 가는 것이나 비슷한 아주 이상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시기는 가셨지만 성령님의 강권적인 인도 속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거기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취임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성령님과 그렇게 왕이 되신 예수님 사이에서 처음 있었던 일들치고는 아주 이상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준비한 왕의 길로 오시는 왕이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성령충만하게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마가복음 1장 2절부터 8절까지의 가장 중요한 요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그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까요? 왜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의 충만한 거처가 되게 하시는 그런 감당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복을 주실까요? 또 우리가 그러한 성령충만함을 기다리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 속에 들어 있고, 그래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짧은 구절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라는 구절입니다. 별것 아닌 것같이 보이는 이 세 개의 단어들은 실은 우리에게 광야에서 굉장한 일이 일어났다고  알려줍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이 땅 위에는 광야가 생겨났습니다. 거기는 들짐승들의 땅이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두렵고 거친 곳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성 안이나 집 안에서 길들여진 집짐승들과 같이 지낼 수 있을 뿐, 광야에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뒤집으셨습니다. 광야에서 그것도 40일 동안이나 짐승들과 아무런 문제 없이 동거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문에 광야가 다시 에덴동산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일그러진 질서가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의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광야같은 이 세상 속에 천국이 들어오고 또 시작되었다고 이 세 단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일은 그냥 공짜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혹은 호의호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을 40일 동안 굶기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망이 최고조에 이르게 만들어 놓고 부족함이 없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유혹, 온 천하를 휘두를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유혹 등, 가장 현실적이고 또 치명적인 사탄의 유혹으로 시험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 시험들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단 칼에 무 자르듯 간단하게 물리치셨습니다. 시험을 이기시고 사탄을 몰아내신 것이죠.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40일 동안이나 광야를 에덴으로 만들어 가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첫번째 아담이 완전히 망가뜨려 놓은 것 같았던 세상을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제 자리로 다시 되돌려 놓는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광야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로마와 예루살렘과는 정반대가 되는 곳입니다. 힘에 의지하고, 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지해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광야를 그렇게 두려워하며 할 수 있으면 그곳을 피하려고 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를 광야로 불러 내십니다. 광야야 말로 우리들에게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훈련을 시킬 수 있는 최적의 훈련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부르심과 그 훈련에 잘 순종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놀랍게도 그 때부터 광야는 가장 풍성하고 부족함이 없는 곳이 됩니다. 그 어느 곳보다도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 수 있는 에덴동산이 되기 시작합니다. 증거가 뭐냐구요?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40년의 역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40일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40년을 의미했습니다. 그 분은 거기서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의 대표자요 또 첫번째 주자로 40일을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40일 동안 처음 광야에서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물과 양식도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완전히 굶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최악의 조건에서 인간으로서는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시험을 치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시험문제를 온전히 통과하셨습니다. 첫 아담은, 그리고 첫 이스라엘은 실패했던 그 시험에 만점을 받고 통과하셨습니다. 첫 이스라엘은 그 풍성한 은혜 속에서도 40년 동안이나 성공하지 못했던일을 예수님은 단 40일 만에 그것도 극한의 상황 속에서 모두 완수해내셨던 것입니다. 


흔히들 이 세상을 광야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광야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힘들어 하고 또 근심하기도 합니다. 확실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광야같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넉넉하게 공급해 주지 않으며, 틈만 있으면 우리를 헤치려는 짐승들이 도처에 숨어있습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진짜 광야보다도 더 광야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믿는 우리가 그 광야를 무서워해야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 광야에는 시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말만 들으면 더 많이 소유하고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해 주겠다는 유혹, 더 큰 힘을 갖게 해 주겠다는 유혹, 너 자신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도록 해 주겠다는 사탄의 치명적인 유혹이 있기 때문에 광야는 더 위험하고 더 두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이런 광야보다 더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항상 부족하며 위험이 있고, 또 아주 아주 견디기 힘든 유혹들이 끊임없이 도전하는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광야를 떠날 수 없고, 그러면서도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살도록 부름받은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셨습니다. 40일 굶으면 돌도 떡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모든 유혹에 가장 취약해져 버리는 인간 말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셨다고 배고픔도 없고, 유혹도 느끼지 않는 그런 분이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분은 저와 여러분과 꼭같은 몸을 지닌, 그래서 모든 필요를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셨던 예수님은 그렇게 가장 유혹에 취약한 상태에서, 그 모든 가장 집요하고 강력한 유혹들을 모두 이겨내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성령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을 힘입어 싸우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답입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죄와 유혹을 이기며 살아가는 승리의 비결은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철저히 따르고 또 그 분의 능력에 의지할 때 우리들도 그런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우리의 첫 주자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려고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우리에게는 성령세례가 꼭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성도 여러분, 물 세례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씻어줄 뿐, 거기에는 죄의 그 집요하고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낼 능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은 물세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크고 중요한 목적은 도무지 성령을 모시고 살아갈 수 없었던 우리에게 성령을 모실 수 있는 준비를 시키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말한대로 성령세례는 실제적인 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 표현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는 우리가 광야의 유혹을 이겨낼 수 없고, 그래서 죄를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힘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죄 용서만 받고 다시 용서받기 이전처럼 죄에 대해서 꼼짝 못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시 예전에 있던 그 비참하고 악한 자리로 돌아간다면 우리에게도 그리고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신 하나님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은 것만도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은혜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 더 크고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주시기 위한 준비입니다. 바로 광야같은 세상에서 죄를 이기며 사는 능력있는 성도로 살게하는 은혜,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진짜 선물이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선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제 큰 그림이 다 그려졌습니다. 회개는, 죄 용서를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는 작은 그림이고, 더 큰 그림의 일부분입니다. 죄 용서와 회개에는 성령세례가 더해져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됩니다. 성도 여러분, 회개는 어려운 것입니다. 로마와 예루살렘의 삶을 청산하고 정말 주님의 은혜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준비과정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유혹을 이기고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 그렇게 능력있는 자녀들이 되는 그 영광스러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밑그림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하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꺼려지더라도 그렇게 해야할 가치가 충분한 일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회개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성령충만하면 좋지만 안그래도 상관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시험에 지지 말고 이기며 살아가라고 부름받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그 부르심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무시하고는 결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반드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죄의 유혹을 이기는 성도가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광야를 에덴으로 회복시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결코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땅 말입니다. 


떠나야할 죄가 있다면, 버려야 할 로마와 예루살렘을 닮은 모습이 있다면 하나씩 하나씩 버리고 떠나십시오. 그리고 성령충만함을 덧입으십시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와 죄의 유혹을 이겨낼 때, 우리가 부름받고 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 광야는 적어도 우리에게는 에덴과 같은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는 젖과 꿀이 흐르며 만나와 메추라기가 공급되는 만족한 땅이 될 것입니다. 이제 믿는 것으로 만족하던 자리에서 성령충만을 덧입는 자리로 여러분의 신앙의 자리를 옮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신실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를 성령충만하게 해 주실 것이고, 또 광야의 유혹을 이겨내고 에덴의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지극한 성령충만의 복과 능력을 허락하셔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죄를 이기게 하시고, 또 광야같은 우리의 삶을 에덴으로 바꾸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