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03. 새벽예배 -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한복음 23)


요0416to26 - 네 남편을 불러오라.pdf


20121003D (#1).mp3.zip




저는 지난 교회에서 사역할 때, 공교롭게도 성도들의 상담역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언가를 상담하러 오신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정도쯤이면 이야기를 알아들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경우를 꽤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도 이상하게 계속해서 변죽만 울릴 뿐 도무지 핵심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핵심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잘못이나 치부까지도 다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보니 어떤 경우에는 알면서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핵심을 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경우는 자신이 자신에게 속고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꼭 필요한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심리적인 조작을 가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방어기재라고 부르는데요. 자신이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혹은 불리한 경우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불리한 기억을 무의식에 묻어버려서 아얘 기억이 나질 않게 하거나 혹은 뻔히 알면서도 알아차린 사실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다른 거창해 보이는 것으로 그것을 가려놓아서 스스로도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어제까지 묵상한 본문을 살펴보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본질적인 문제와 그 해결책을 거론하시는데 여인은 정반대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여인은 단 한번도 그런 하늘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없었으니 그럴만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꽁꽁 감춰진 문제가 있음을 알고 계셨고,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감추느라고 알아들어야 할 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껍데기는 생각보다 무척 단단했습니다. 직접적인 충격을 주기 전에는 전혀 깨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법의 물을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같은 그 여인에게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갑자기 왠 남편입니까? 이야기가 안통하니 남편과 이야기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던 이유는 그 여인에게 있어서 남편이란 끊임없이 파고 또 파고 있으면서도 거기서는 단 한 번도 갈증을 해결해 줄 물을 얻지 못했던 터진 웅덩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야 말로 그가 가장 집착하는 것인 동시에 또한 가장 감추고 싶은 치부였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여인은 아직까지도 핵심을 피해가려고만 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그 여인이 알고 있는 유일한 터진 웅덩이인데 그것을 포기할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공격은 더 강력해 집니다. 피할 곳을 주지 않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갈아치운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섯 번째 남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앞의 다섯 명이 네 남편이 되지 못했듯이 지금 있는 네 남편도 남편이 아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남편을 샘 근원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남편은 항상 터진 웅덩이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열이 되든, 백이 되든 결국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이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자신을 둘러쌌던 모든 방패들을 거두어 들이고 예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또 도망갑니다. 


여인은 갑자기 예배장소의 문제를 묻습니다. “제가 보니 선생님은 선지자인듯합니다. 그래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뉜 뒤부터 여기 이 그리심산에서 계속해서 예배드려왔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주장이 맞습니까?” 우리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을 때 야곱과 그의 우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예수님께서 야곱보다 크냐고 물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 이 여인은 예루살렘과 그리심산이라는 제사의 정통성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굉장히 거창한 문제들이고 또 진지해 보이는 문제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들이 이 여인의 진지함을 보여주는 증거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자신의 드러내고 싶은 문제를 가리는 방패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숨기려면 방패가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될 수 있는대로 큰 방패, 그것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유대인인 예수님도 그 함정에 걸려들 줄 알고 말입니다. 여인의 예상대로라면 예수님은 갑자기 예민해지면서 화를 내야 합니다. “너희 마음대로 아무 산에다 성전을 지어놓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면서 그게 정당하다고? 그건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부드럽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이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대한, 예배의 장소와 예배자에 대한 최고의 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여전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정상적이라면 이러한 예수님의 설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시는 이가 오실 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라” 여인의 대답은 정말 완전한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자신이 효과적으로 도망쳤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가장 민감한 문제를 거론했고, 스스로 메시야가 오시면 그 문제도 분명하게 알려주실 것이라는 최종적인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가장 충격적이고 도저히 피해가지 못할 대답을 내놓으셨습니다. “너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바로 메시아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추격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윗도 시편 139편에서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때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조차도 하나님을 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그렇지만 뻔히 알면서 잘못된 곳에서 만족을 얻으려 하고 있을 때, 그 때 주님이 우리를 찾으시면 우리는 못 들은 채, 못 알아들은 채 하고 주님의 손 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 때, 내가 그 사실을 알든지 모르든지 우리가 가장 손쉽게 들고나오는 것이 바로 거창하고 진지한 문제입니다. 내 속사람이나 내 영혼과는 별 상관없는 그런 문제를 꺼내들기 쉽습니다. 정치문제, 특정한 사건에 대한 문제, 교계의 문제, 교육계의 현실 등과 같은 문제들 말입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내 속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가리는 방패로 사용될 때는 문제가 커집니다. 이런 분들은 입만 열면 이런 거창한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의 거듭남의 문제나 혹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문제, 그리고 자신의 내면 깊이 숨겨져 있는 문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때로는 한 걸음만 더 가면, 저 것만 치워버리면 거기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 길을 그런 것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니까요. 또 그 뒤에 숨어 목말라 하는 성도들의 영혼을 보니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모른 척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어디로 피하고 자신을 어떤 방패로 가려놓든지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우리를 추격해 오십니다.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십니다. 지금 피한다고 계속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내가 어디까지 가야한다고 알려주는 내 영혼의 울음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남편은 샘 근원이 아니라고, 돈은 갈증을 풀어줄 수 없다고, 명예나 지식은 결코 생수를 가져다 줄 수 없다고 말해주는 영혼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피하고 또  피하고 계속 도망치는 여인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다. 오기로 되어 있는 그리스도다.” 사실 이것은 그 여인이 이미 예수님께 드려야할 답변이고 고백이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 이십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도망치려고 한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유보다 크시고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며 안 계신 곳이 전혀 없는 그 분에게서 우리가 어디로 피해 달아나겠습니까? 그러려는 시도는 우리만 힘들게 할 뿐이고 온전히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만 뒤로 미룰 뿐입니다. 힘만 들고 손해만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이리 저리 피한다면 주님은 언젠가 우리에게 언젠가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저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돈도 남편이 아니었고, 명예도 남편이 아니었고, 쾌락도 남편이 아니었고, 건강이나 편안함도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자식도 남편이 아니었고, 아내도 남편도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나에게는 남편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 날 주님 앞에서 얼마나 부끄럽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이제 내가 남편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팠던 터진 웅덩이들을 모두 메꾸시기 바랍니다. 또 그러느라고 이렇게 저렇게 가려놓은 그럴 듯한 방패들을 모두 치워버리시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이제 나에게는 남편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나의 남편이십니다. 이제 나에게는 샘근원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이 나를 다시는 목마르게 하지 않는 유일한 샘근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실 것입니다. 참된 시원함을 주실 것입니다. 이번 토요일에는 교회 대청소가 있는데요. 그 전에 우리 속 사람을 먼저 청소하고 그 분을 흔쾌히 맞아들이셔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마르지 않는 샘 하나, 바꿀 필요 없는 남편 하나 꼭 마련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