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0428to30,0439to42 - 예수의 말씀으로 믿는 자가 더욱 많아.pdf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28-30절, 39-42절
우리는 믿음은 다 같은 믿음이고 모든 믿음이 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요한복음이 믿음이라고 이름붙이는 수많은 모습들이 있지만 그 모든 믿음을 참된 믿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에 모두 다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시는 수수께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스스로 이 믿음들 중에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으로 인정할만한 믿음은 어떤 것인지 찾아보라는 그런 수수께끼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첫째 그런 참된 믿음이 되려면 적어도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지, 둘째는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이 우리 영혼을 구원하기에 넉넉한 믿음이 되려면 앞으로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성장해가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앞에서 지금까지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그 남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사실을 발견한 여인은 놀랍게도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자기 동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는 일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그 여인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분명 여인은 그 이전에는 그리 믿을만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가 보기에도 이번에 이 여인이 보이는 이 진지한 태도는 그저 무시해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여인의 변화된 모습이 이전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여인의 말에 설득당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여인이 자기가 만난 남자를 메시야라고 소개하는 데에는 확실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생전 처음보는 유대인이 자기의 과거사를 전부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 바로 그 근거였습니다.
때로 가장 설득력있는 전도는 우리의 변화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예전에는 전혀 하려고 들지 않았던 일을 하려고 하고, 또 예전에는 진지함이라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사람이 묵직한 진지함을 가지고 나타났을 때, 아마도 그것은 백 마디의 말보다도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메시지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자신이 하는 이야기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지금 그것을 말하고 있다면 그 누가 함부로 그것을 거절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복음을 증거하기 전에 그 복음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이것이 설교자자인 저에게는 큰 고민이기도 합니다. 제가 전하는 모든 진리가 저 자신을 깊이있게 변화시킨 그런 진리들이면 좋겠는데, 솔직히 그렇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이 그것을 이야기하니 목사로서 전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말씀을 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신을 볼 때마다 많이 힘들어 지고 그래서 그 부분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왔고 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3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은지라” 자신의 경험에 대한 여인의 증언을 들은 사마리아인들 중의 많은 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로 왔고 예수님에게 며칠만 더 계실 수 없겠느냐고 간청했습니다. 그 간청으로 예수님은 그 마을에서 이틀 동안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바랬던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말씀해 주시기를 원했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시려고 이틀을 더 계셨던 것입니다. 이게 우연일까요? 아니죠. 주님의 계획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면서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41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인해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성도 여러분, 누군가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을 듣는 것과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믿음을 효과적으로 자라나게 해 줄 것 같으십니까? 우리나라 성도들은 앞쪽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더 많은 것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진리에 대한 갈증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진리를 들을 때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람의 경험담이나 감성을 터치하는 예화를 들을 때 더 기뻐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이 과연 그래도 좋은 모습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저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성도들도 비슷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실제로 아주 당당하게 저에게 “저는 성경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움직이는 스타일이라 그런 건 저에게 맞지 않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청년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청년의 이야기 속에서 잘못된 점을 찾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 사람들은 저마다 스타일이 있습니다. 선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에는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개인의 스타일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또 그렇게 해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위에 믿음을 더하는 일은 자신의 스타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진지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힘써 여호와를 느끼자. 힘써 여호와를 경험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만 이야기 합니다. 아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 그것을 통해 신앙을 다져 간다는 것은 단지 그저 은혜롭게 여겨지는 이런 저런 설교를 듣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소위 인기있다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보셨으면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인기있는 설교들이 여러분의 신앙의 깊이와 견고함을 많이 더해주던가요?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고 하나님의 앞에서의 내 삶을 많이 바뀌게 하던가요?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의 깊이와 견고함은 당장의 웃음이나 감성적인 터치와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요전에 불교에 오랫동안 계시다가 자녀들 때문에 우리 교회에 나오셨는데 이제는 연로하셔서 교회에 오시지 못하는 두 노부부를 심방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분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는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분별력은 예수를 믿는 분들보다 훨씬 더 훌륭했습니다. 그 분은 너무 안타까워 하시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기독교 방송을 계속 보는데, 텔레비젼에 나오시는 목사님들 중에는 정말 존경스러운 분도 계시지만 어떤 분들은 왜 저 분이 목회를 하실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인 분들도 많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그 분 보시기에도 그런 분들이 전하는 메시지 속에는 기독교가 없고 진리가 없다고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열광하는 그런 설교자인데도 말입니다. 믿음이 거의 없어 보이는 그 분들도 그렇게 쉽게 아는 것을 왜 오랫동안 예수믿은 성도들이 그렇게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오히려 제가 더 안타까웠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성도들의 신앙은 이런 성향 때문에 그렇게 깊고 견고하게 성장해 가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원래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또 믿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의 영혼은 가장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운 진리를 들을 때, 거기에 가장 강력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처음에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이 자신의 몸으로, 그리고 경험으로 증거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이 39절의 사람들도 믿었다고 말하고 있고 40절에서 새롭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은 사람들도 믿었다고 말하지만 첫번째 믿음과 두번째 믿음은 전혀 다른 믿음입니다. 그저 숫자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믿음도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 이 구절이 그 증거입니다. 처음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저 간접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엉망으로 살았던 여인이 너무도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 이야기하니까 그것 때문에, 그것에 비추어서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두번째 믿음에 첫번째 믿음이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두번째 믿음은 첫번째 믿음과는 기초가 전혀 다른 믿음이었습니다. 전에는 그 여인의 말 때문에 예수를 믿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듣고 그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입니다.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알게 된” 그런 믿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 믿음, 참으로 구원얻는 믿음이 되려면 우리는 다른 것보다 우선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분의 교훈과 말씀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뭐 그 당시에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그저 기록되어 있는 말씀 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때만큼 말씀으로만 믿음이 자라나기는 힘든 거 아니냐고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물론 성경은 그저 기록되어 있고 인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그 말씀이 기록되어질 때 성령님의 감동 속에서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 기록된 말씀들을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때처럼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때와 똑같은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서 그 말씀을 읽고 듣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때 사마리아인들에게 생겨났던 그 믿음을 오늘날에도 똑같이 가질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믿음은 더 이상 남의 간접적인 이야기나 경험담을 듣는데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그 믿음에는 충분할지 몰라도 그 후에 많은 시간을 지내온 우리가 계속 머물러도 될만큼 든든한 기초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인 줄 앎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진리를 읽고 또 들을 때면 우리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될 수 있어야 하며, 또 가장 큰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직접 확인하는 믿음입니다.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만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전해주시는 진리를 듣고서 생겨나는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것보다 중요한 은혜의 수단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도와 구원에 이르게 해 줄 만큼 능력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말씀에 여러분의 믿음이 합해질 때, 그 때에만 우리는 넉넉히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되고 또 이 땅에서도 약속을 믿는 믿음의 능력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말씀에 믿음을 더하라고 말씀드리고 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그 분의 진리를 들려주시고, 우리는 그 진리를 기뻐하므로 그 진리 위에 든든히 세워지는 우리의 삶과 신앙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