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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10. 새벽예배 -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요한복음 28)


요0443to45 -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pdf


20121010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4장 43-45절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줄 확신했습니다. 비록 유대인들로부터 더러운 자들이라고, 변절자라고 버림받고 인간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그들이었지만, 바로 그런 사마리아인들 속에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부흥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이들의 믿음이 더욱 귀했던 것은 이들이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믿음을 갖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진실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으니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거두시지 못했던 풍성한 영적인 추수를 사마리아 땅에서 거두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고 기쁜 마음으로 다시 여행을 계속하셨습니다. 


사마리아를 떠난 예수님은 이번에는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갈릴리로 가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다지 편할 수가 없었고 그 발걸음은 즐거운 발걸음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갈릴리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 중의 많은 사람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보았고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들의 이러한 환영은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참된 믿음이나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으로부터 나온 영접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영접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 마치 시골 작은 마을에서 고시 패스한 사람 맞이하듯이 우리 지방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다고 좋아하는 것 같은 환영이었습니다. 이것을 미리 아셨던 주님께서는 갈릴리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시고서 별다른 기대와 기쁨도 없이 갈릴리로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이미 예수를 믿는 우리도 주의 깊게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선지자는 항상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선지자의 고향은 언제나 선지자에 대해서 너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지자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상 그것 때문에 선지자의 메시지에 결코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익숙해 진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신앙에 있어서 익숙해 진다는 것은 그 자리에 머물러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일에 익숙해 지면,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스톱하고 맙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일에 실패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자라난 사람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잘 안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일을 가장 크게 방해한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은지 오래되신 분들 중에서 신앙적인 권태에 빠져계신 분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반짝이는 눈망울, 기대감에 찬 얼굴표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은혜로 환하게 빛나는 표정도 보이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다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설교는 시큰둥하고 복음은 더 이상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바로 나는 이미 잘 안다는 그 생각이 주님을 더 깊이 제대로 알아가는데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과연 우리 주님을 다 알 수 있을까요? 충분히 알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나 깨닫는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럴 수 없는 진짜 이유는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분입니다. 퍼 내도 퍼 내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분입니다. 우리가 평생 주님을 알아간다고 한들, 우리는 그 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 분은 더 알고 싶은 분이 되고, 알면 알수록 더 놀라운 분이 됩니다. 또 믿으면 믿을수록 더 확고히 믿고 싶어지는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알아가고 또 믿는 일에 있어서 충분하다는 말과 권태란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앙의 권태를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고 알아가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가 이 착각과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주님의 그 풍성하심을 깨닫는 일에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목사인데요. 목사는 평생 설교를 해야하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마다 항상 하지 않으면 않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낯설게 하기”입니다. 이것은 제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법을 배울 때 기초적인 것을 다 배우고 난 후 꼭 배우게 되는 성경해석의 원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성경의 어떤 본문을 읽을 때, 그 본문이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항상 같으십니까? 아니면 달라지십니까? 우리가 어떤 성경 본문에 익숙해지면 우리에게 한 번 들려준 이야기를 빼고는 새로운 이야기를 전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한 본문으로는 매번 똑같은 설교 밖에 전할 수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마다 아무리 익숙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마치 생전처음 대하는 본문처럼, 무엇을 말하는 본문인지 전혀 모르는 척 하면서 성경을 대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들을 성경에서 캐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성경본문에 대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그 본문에 대해 얼마나 낯설어 질 수 있느냐 하는데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낯설게 하기는 사실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함입니다. 내가 성경의 진리를 모두 다 알 수 없고,  말씀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성경 앞에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낮아지기 시작할 때,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 줄 때가 많습니다. 말씀의 진짜 은혜는 그제서야 부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은 원래 진리 앞에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에 있어서 만큼은 익숙해지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는 프로가 되는 것이 가장 불리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익숙해지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에 익숙해 지는 것을 막으려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고 또 의도적으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 무궁무진한 유익을 가져다 주는 충분히 그렇게 해야할 가치가 있는 일이며, 우리 주님도 칭찬해주실만한 미덕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은 주님 앞에서 우리들을 겸손하게 해 주며 계속해서 주님을 기대할 수 있게 하고, 또 거듭 거듭 우리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의 영혼을 언제 살아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께 대한 초보로 머무시기 바랍니다. 항상 믿음의 풋내기로 남아 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선한 신앙과 더 깊은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주님께 대해서 낯설게 하시고, 익숙해지지 않게 하셔서 우리를 날마다 더 깊고 풍성한 믿음과 은혜 가운데로 나아가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