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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0.14. 주일오전 -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6)


막0116to20 - 나를 따라오라(2).pdf


20121014SM (#1).mp3.zip





성경본문 : 마가복음 1장 16-20절


제가 예전에 한 집사님의 상담을 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제가 보기에 정말 괜챦은 분이었습니다. 정말 진지하고 또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게다가 겸손하고.... 성도로서는 나무랄데 없다고 생각될 정도 였습니다. 이 분은 그 이전에 다니시던 교회에서 집사의 직분을 받아 섬기다가 교회를 옮겨오신 분이었는데요. 교회의 규정에 따라서 다시 서리집사 직분을 드리려고 하니 몇 번이나 사양하셨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서 이제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다고 여기셨는지 결국에는 집사의 직분을 받기로 하시기는 했는데, 연말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릴 때까지 저에게 여러차례 전화도 거셨고 또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는데 정말 집사 직분을 받아도 되겠느냐고 거듭 거듭 되묻곤 하셨습니다. 한 번 두 번 그러실 때는 괜챦았는데, 나중에는 조금 너무 민감하고 두려움이 많은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직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너무 하려고 들어서 탈이지만 이 분은 또 직분을 너무 무섭게만 생각해서 탈인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제가 서리 집사는 일년직이니까 일년간 감당하시다가 도저히 힘드셔셔 안되겠다고 생각되시면 그 때 내려놓으셔도 좋다고 말씀드리고 직분을 받도록 격려하고 안심을 시켜드렸더니 연말에 집사 직분을 받으셨습니다. 성도가 직분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생각없이 달려드는 것보다는 오히려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무겁게 생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저 부족하게 여겨지는 자기 자신에게만 너무 집착하여 직분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또한 그리 건강한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소굴인 갈릴리로 가셔서 천국 복음이라는 강력한 폭탄을 터뜨리시고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 내시고 그들 중에서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는 손대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환경도, 또 그렇게 무너져 버린 인생도 없습니다. 그 분은 그 어떤 악마의 소굴같은 환경 속에 있는 다 망가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삼으실 수 있고 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그 누구건 사람 낚는 어부로 불러내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한치도 틀임없는 섭리가운데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런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우리는 결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원래 결과는 주님의 몫이니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셨지 월척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거나 혹은 항상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풍어만 만나는 어부가 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물을 던지다 보면 큰 고기가 잡힐 수도 있고, 많은 고기를 낚을 수도 있지만 그건 열심히 그물을 던지다가 보니 생겨나는 보너스 같은 것이지 우리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고 또 항상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지구촌 구석 구석에는 수 십년씩 복음의 씨앗을 뿌리지만 눈에 보이는 그럴 듯한 열매 하나 보지 못하는 선교사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매일 매일 그물을 던져도 작은 고기 하나 보기 힘든 목회자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들이 실패한 어부들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어부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야 말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하나님의 어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야 말로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인내로 인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그 어떤 큰 고기나 풍어보다도 그들을 더 영광스럽고 더 신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진짜 어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결과 중심의 사고방식부터 버려야 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아야만 하고, 또 남에게 자랑할만한 큰 고기만 잡아야 좋은 어부, 성공한 어부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하늘나라 어부됨을 망치는 가장 큰 주범이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크고 많은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하니까 사람 낚는 어부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많고 큰 고기를 낚아올릴까만 궁리하게 되고, 그러다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으면 스스로를 성공한 어부고 좋은 어부라고 자처하면서 가지 말아야할 어그러진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럽고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는 그 부르심 자체가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부르심을 받는 우리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처음 이야기 속의 그 집사님처럼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일에 비해 자신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일은 그 일 자체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 일이 굉장히 심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물고기를 낚는 일만 생각해 보아도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부의 입장에서 이 일을 보면 그저 물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을 던졌다가 거둬들이는 일에 불과하지만 이 일을 물고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물고기의 생사를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 그물 안에 들어가고 그래서 건져 올려지는 순간 그 물고기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만큼 심각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어떻게든 도망쳐 보려고 본능적으로 발버둥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물며 이 물고기가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던져야 하는 그물이 우리의 일상과 직상생활 속에서의 삶의 모습이며, 또 한 마디 한 마디 말이라면 우리의 어부됨은 얼마나 심각한 일이 되겠습니다. 또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그물, 말의 그물을 던져야 한다면 우리가 맡은 일은 얼마나 더 심각한 일이 되겠습니까? 


제가 전도사 시절에 교회 청년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던 다른 전도사님의 처가댁에 놀러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 중 하나가 그 전도사님의 장모님에게 저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얼마나 웃기는 분인지 몰라요. 그런데, 설교할 때는 완전히 달라져요. 딴 사람이 되세요.”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얘가 처음보는 분 앞에서 나를 이런 식으로 소개하다니....’하는 생각이 들어 심히 불쾌하게 여겼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만큼 저를 잘 소개할 수 있는 말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십니까? 제가 강단에서 좀 심각하죠? 좀 무겁죠? 혹 여러분 중에서는 저의 그런 심각함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실제로 적어도 강단에서의 저는 심각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가 여기서 설교를 하는 일을 사람을 낚는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제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존재 전체, 혹은 여러분의 삶과 신앙의 어떤 부분이라도 낚아 올려서 참된 생명으로 인도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제가 받은 소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처음 전도사로 성도들을 섬기기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더 강해지면 강해졌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심각할 것입니다. 계속 그럴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혼을 대하면서, 어떻게든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무거운 일을 하면서 가벼워질래야 가벼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이 일을 저에게 맡기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또 여러분의 영혼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습니다. 목회만 그럴까요? 설교만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일 자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식하고 있건 그렇지 못하건 이런 저런 모양의 다양한 사람 낚는 어부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굉장히 무겁고 심각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심각함에 비하면 우리 자신은 너무 가볍고 부족하게만 여겨지구요. 그래서 부르심의 무게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겁고 부담스럽게만 여겨지기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우리 성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물론 이 일이 무겁고 심각한 일이니 그렇게 여기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그 부르심의 무게와 중요성에 비하면 우리는 항상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을 감당해야할 우리 자신의 부족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일에 비해서 많이 가볍고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오히려 우리들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어쩌면 그 분이 보시기에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부족하고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일에 충분한 자격과 능력, 그리고 무게를 지닐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시고 그냥 갈릴리 바다가를 거니시다가, 조금 더 가시다가 우리가 일하고 또 살아가는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르심이 잘못되었을까요?  이 부르심이 하나님의 실수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실수도 없습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음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한 통로가 되는 구체적인 역할이나 직업이 나에 비해서 너무 무겁고 크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과 마음이 고개를 들 때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너는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완전한 어부야. 전혀 부족함도 없고 연약함도 없는, 네가 맞게 될 일에 비해서 전혀 꿀리지 않는 충분하고도 빈틈없는 완벽한 어부야”라고 말씀하시거나 “너는 너 스스로 사람 낚는 완전한 어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대신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다가 본문 속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또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부족하고 연약하기만한 저를 부르시고 손에 잘 맞지도 않는 연장같은 저를 지금까지 사용해 오실 수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기뻐서 한글성경만 그런가, 혹시 우리말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해서 원어성경과 이런 저런 영어성경을 모두 찾아보니 다 한결같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우리의 희망이고 이게 우리의 가능성입니다. 이게 우리의 자유이고 또 이게 우리가 받은 부르심이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되는 이유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거나 기용할 때, 앞으로의 가능성보다는 지금 당장의 유용성이나 능력을 봅니다. 그러니까 그 시점에서의 완성도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너는...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너를 ....가 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어떻다는 것을 보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실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며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처음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죽었던 우리를, 죄인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원수되어 하나님께 대들며 살고 있었던 우리를 왜 부르셨습니까? 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심하게 망가져 버린 우리를 부르실 수 있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충성스런 종들이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작지점에서 그 분이 만들어 내실 끝을 바라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너무 무겁게만 생각하거나 혹은 너무 가볍게만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처음 믿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끝이기는 커녕 오히려 시작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져 가는 시작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존재로 만들어져 가는 시작이며, 이제 하늘나라를 향한 첫 발자국을 내딛은 것에 불과합니다. 구원이든 소명이든 부르심을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것을 너무 함부로 대해서 망가뜨리기도 하고, 반대로 스스로 그 무게에 짖눌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이든 사람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든 혹은 교회의 직분이나 역할이든 우리가 그 부르심을 받는 순간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놓치게 되면 그것 때문에 우리 자신이 망가지고 그 부르심 자체도 망가뜨리고 맙니다. 너무 가볍게 여기게 되면 구원얻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고 또 살아가게 되는 것을 놓치게 되고, 그 소명이 우리의 존재와 삶에 요구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오히려 하나님과 자신을 욕되게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목격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눈쌀 찌푸려지게하고 또 부끄럽게 하는 거의 모든 일들은 모두가 다 이런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반대로 너무 무겁게 생각하게 되면 그 일의 무게에 눌려서 신앙의 기쁨과 감격을 빼앗기게 되고, 복음이 주는 자유를 잃어 버리고 맙니다. 열등감과 자책감에 빠지게 되거나 일만 하다가 지쳐서 오히려 더 거친 형상을 가진 사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부르심의 부작용들이 우리를 망가뜨리고 또 교회를 망가뜨리며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것이 무슨 부르심이 되었든 시작이며 과정이지 결코 그것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부르심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셨던 일들을 이루어 가면서도 또한 우리 존재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목적들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두 하나님의 선택이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보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제자들이 어떻게 참으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그 부르심의 중요성과 심각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다운 제자, 사람을 낚는 어부다운 어부들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자기들이 차지할 자리를 놓고 싸웠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자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걸것같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그나마 용기를 예수님을 따라갔던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그것도 저주까지 해 가며 예수님과 자기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자신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도 못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 속에 사람 낚는 어부는 없습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그 씨앗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걸림돌의 모습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결국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능력있고 온전하게 일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제대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바로 예수님 덕분입니다. 고기만 잡던 어부들, 자기 자신 밖에 모르던 이기적이고 비열한 갈릴리의 어부들 속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모습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신 예수님 덕분입니다. 또 그들을 그렇게 빚어가시고 만들어 가셨던 하나님 덕분이었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느냐고 물어오면 항상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하게 되었다”는 대답입니다. 저는 처음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고 될 수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기질상 조금 천방지축입니다. 아주 자유분방한 쪽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저는 자라오면서 목회자의 좋은 모습보다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더 많이 보면서 자라왔습니다. 저는 자신의 기질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그러면 나는 나에게 실망을 준 그런 분들과 다르게 목회할 자신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도 그렇고 주님의 부르심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정말 당장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너 목사할래? 죽을래?”라고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네.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요. 그렇게 해서 신대원에 입학하고 전도사가 되고 강도사가 되고 결국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야 말로 시간이 흐르니 그저 된 것입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목사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얼마나 큰 고민과 갈등 속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남들은 저에게 목사라고 부릅니다. 하는 일도 목사의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저는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얻어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저의 존재도 삶도 그리고 능력도 전혀 목사답다고 생각할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열등감과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 했습니다. 한동안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그런 세월이 목사가 되고 나서도 한 5-6년은 계속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질문이 제가 생각하기에 도 웃기는 질문이지만 어떠십니까? 그래도 여러분 보시기에도 지금은 제가 아주 아주 쬐끔이라도 목사같아 보이시지 않으십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제가 적어도 아주 쬐끔은, 아주 쬐끔은 목사라는 생각을 하고 삽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같아도 제 입장에서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너무 너무 감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평생 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평생 맞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옷이 이제는 많이 어색하지 않고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지가 올해로 18년이 되었습니다. 별로 길지는 않지만 그 동안의 세월을 돌아보니 적어도 목회자로서의 저 자신, 그리고 성도로서의 저 자신은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목회가 저를 만들고 또 고쳐왔다고 밖에는 고백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제가 이렇게 큰 복을 누려올 수 있었을까요? 다 하나님 덕분입니다. 제가 스스로에게 좌절하고 힘겨워할 때도, 너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고민할 때도, 교회는 커녕 저 자신 하나 조차 건사하지 못했던 그 때에도 하나님은 저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저를 그 분의 손에서 빚어가고 계셨고, 그렇게 목회자가 ‘되어져 가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저의 목회가 저에게 고욕이 아니라 복이 되었고, 상처가 아니라 치유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아직도 저는 목회자로서의 저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많이 되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분명히 18년전보다는 10년전이, 그리고 10년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더 좋아졌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점점 더 나를 나아지게 해 주고 계신다. 그렇다면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지금이 끝이 아니다. 내가 주님을 의지하는 일을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그 분이 나를 빚어가는 손길을 내가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그 분 안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지금보다는 10년 후가, 그리고 10년 후보다는 그 이후가 훨씬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저를 향한 부르심을 시작이요 또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그래서 그 부르심이 주는 부담과 짐을 거부하지 않고, 또 계속해서 저를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한, 저는 그 분 안에서 계속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다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도 아니고, 충분하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맡기신 것도 아닙니다. 그 분의 부르심은 시작이며 또 과정입니다. 결과도 아니고 끝도 아니며 완성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는 일도,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받는 일도,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가는 일도 그 분이 되게 하시고 또 힘주셔서 감당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자격이나 힘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더더욱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는 것, 그 분의 자녀가 되는 것, 그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되게 하심 속에서 우리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그렇게 그 분의 다듬어 가시는 손길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면 됩니다. 따라오라시는 부르심에 곧바로 따라나섰던 제자들처럼 지금은 부족하고 지금은 연약해도 미루지 말고 핑계대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그 분을 따라간다면 우리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져 가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부르심 자체나 나 자신 보다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부족한 나 자신과 무겁기만한 부르심에 짓눌리지 마시고 나를 되게 하시는 하나님, 나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해서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최선을 다하며 한 번 또 한 번 그물을 던지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런 복과 은혜가 오늘 주님의 손길에 거칠은 우리 자신을 맡기기를 소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한 번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항상 연약합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 바라보고 살다가는 주님 앞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거기 붙들려 사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탄의 계략입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주신 소명이 크고 무겁지만 그렇기 때문에 되게 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께 나를 맡기겠다고, 다듬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에 순종하겠다고,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져 가겠다고. 이제는 더 이상 나 자신만 바라보며 교만해저거나 낙망하는 삶을 살지 않고 되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당당한 백성의 삶, 어부의 삶을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