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가복음 1장 29-34절
1996년도에 한 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막가파 사건’이었습니다. 최정수라는 사람은 사회에 불만을 품고 여덟 명을 모아서 ‘막가파’라는 범죄조직을 만들었고, 이들은 부유한 부녀자들을 상대로 금품을 빼앗고 생매장을 했습니다. 주유소를 습격하기도 하고, 노상강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이들의 이런 악한 행동들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검거되고 나서 보인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전혀 뉘우침도 후회도 없어 보였습니다. 너무나 담담하게 범죄사실을 시인했고, 또 자신들이 한 행동을 당연한 듯이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사형을 언도받고 모두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스토리 속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결국에는 전부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제가 다니던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이런 악한 사람들을 전도하려는 소원을 품게 된 것도 정말 놀라운 일이지만 이들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더욱 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바로 두목인 최정수였습니다. 이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진심에 감동되어서 처음 받아서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를 믿고 난 후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몇 달간은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정말 어느 책 제목처럼 하나님이 고치시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과 동정심 마저도 잃어버린 사람들까지도 충분히 다시 고치시고 회복시키십니다. 다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요 또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신기한 일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히 하셔야만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가 자신의 범죄이건, 다른 이들이 저지른 폭력으로 인한 상처이건, 아니면 육체적인 질병이든 사람의 삶을 망가뜨리고 일그러뜨리는 모든 것들로 부터 우리를 풀어주시고 고쳐주셔야 우리를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삼으시고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건, 또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던 여전히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를 고쳐주시고 또 바로잡아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기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이 복음이 우리를 고치시고 세우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앞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분앞으로 가는 길의 유일하게 열린 문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은 없습니다. 과거가 어떠했기 때문에 현재도 그럴 수 밖에 없고, 미래 또한 그런 모습일 수 밖에 없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고정된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고치시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어둠이 아닌 빛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막가파의 두목은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런 엄청난 변화와 고침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붙들려 있는지도 모르면서 붙들려 있었던 더러운 영으로부터 완전히 풀려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이렇게 고치시고 바꾸시며 또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자신을 맡긴다면 우리의 삶과 존재는 얼마나 더 아름다고 온전하게 변하겠습니까?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시는 일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고치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고쳐져 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더 고쳐질 것입니다. 더 아름답고 온전하게 회복되고 다듬어져 갈 것입니다.
회당에서 아주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가르치시고 또 더러운 귀신을 내어쫓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거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 누워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열병은 단순한 열병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웃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열병을 고쳐달라고 의뢰했다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손댈 수 없는 아주 심각한 열병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말 없이 베드로의 장모에게로 다가가셔서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힘을 주어 베드로의 장모를 일으켰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것으로 열병은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열병은 더 이상 베드로의 장모를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들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치료가 얼마나 완전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다 죽어가던 병자가 그 짧은 순간에 여러사람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고쳐주시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만져주시는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회복은 의학적인 치료와는 전혀 다릅니다. 점진적인 회복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즉각적입니다. 그리고 온전합니다. 회복기도 필요가 없고, 안정기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잡아 일으키시는 손길 하나로 예전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손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그 손은 그 여인을 지으신 하나님의 생명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또 태초에 이 세상을 만드신 능력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 생명과 능력을 담아 만져주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가장 온전한 상태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이렇게 고치셨다는 소식이 마을 전체에 퍼졌고 사람들은 그 동네에 있는 병자란 병자, 귀신들린 사람이란 귀신들린 사람은 모두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서 해질 무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를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병은 고치시고, 사람들을 붙잡고 있는 더러운 귀신은 다 내어쫓아 버리셨습니다. 사실 병을 고쳐주시는 일은 몰라도 귀신을 내쫓는 일은 예수님께는 조금 조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곱게 나가주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야 말로 귀신들은 최후의 발악을 했습니다. 나가면서 예수님께 해를 입힐 수 있는 마지막 한가지 일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되었던 이유는 아직 사람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복음을 전하고 또 설명하시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어떤 메시아인지를 충분히 밝히셔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대로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생각을 교정시켜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그저 예수님께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실 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못 받아들이도록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고, 또 자신이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귀신들려 일그러지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꼭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원하시느냐 하면 자신이 불리해지고 또 오해받더라도 그렇게 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그 일을 하실 정도로 원하십니다. 그 분의 형상이 이 세상에서 붙들리지 말아야 할 것에 붙들려서 일그러지고 뒤틀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만큼 못견디어 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삼기를 그만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어떤 상태에 있든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그 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고치실 줄로 믿고, 온전히 바로잡아 주실 줄로 믿고,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 그리고 일그러진 것들을 우리를 그 사랑넘치는 전능하신 손길에 맡겨야 합니다. 이 일에 우리는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그것을 가장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우리는 지나치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 분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다 아십니다. 지금 설교를 들으시면서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여러분을 묶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당신의 손에 모두 맡겨드리니 당신이 알아서 고치시고 바로 잡으시고 세워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여러분의 무능력한 손에 붙들고 힘들어만 하지 마시고 그 분의 전능하신 손에 맡기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실망해도 주님은 우리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막가파 두목도 받아주셨습니다. 그런 사람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도를 그에게 보내셨고 결국 그를 설득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언제든지 이 은혜의 능력을 믿으며 그 분의 손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맡기기만 한다면 그 분은 기뻐하실 것이고 그 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를 고쳐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항상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저께 아침에 아내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우연찮게 어떤 남편이 아내에게 사과를 하며 쓴 편지를 읽어주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아내는 까다로운 시부모 밑에서 시집살이를 하며 남편의 뒷바라지와 자녀들의 교육까지 모두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격상 편하게 편하게 하지 못하고 특히 어른을 모시는 일은 아주 조심스럽고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그것을 너무 너무 힘겨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일종의 죄책감을 느껴서 그것을 사과하고 또 앞으로 노력해 보겠다고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여성 사회자는 ‘그러다 병나죠. 그럴 때는 휴가를 주셔야 해요. 한 일주일이라도 여행을 보내주세요. 아니면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게 해 주세요.”라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나 맞는 말이었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너무 힘든 일입니다. 시부보와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어떻게 일주일씩 여행을 떠날 수가 있고, 또 일주일에 하루를 쉴 수가 있습니까? 쉬면 누가 그것을 기뻐하겠으며, 또 나중에 그 뒷감당은 누가 해야합니까? 그러니 꼭 쉬어야 하는데, 꼭 휴식이 필요한데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꼭 쉬어야 하는데 쉬지 못하고 지내다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을 얻은 분들을 여럿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꼭 쉬어야만 하는 사람인데 그가 쉬지 못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많이 안타까운 일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또 살리시며 바로잡아 주시는 일을 하루 종일 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이 일을 해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날이 어떤 날이었는지 아십니까? 그 날은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은 모든 피조물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가운데서 안식을 누려야 하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완전하지는 않아도 안식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별로 지장없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또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안식을 누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한 마을, 그 회당 안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고 있는 회당 안이야 말로 가장 온전한 안식이 있어야 했지만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거기 있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귀신은 그 사람을 붙들었을 뿐 아니라, 거기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의 회당 안이었지만 거기에는 평안한 안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풀어놓아 주셨고, 또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꼭 안식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들 모두를 안식 가운데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그 날 베드로의 장모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들 안식일이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쉼과 하늘양식을 기대하며 회당으로 갔지만 그는 열병에 붙들려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장모를 쉬지 못하게 하고 또 안식하지 못하게 한 것은 그 열병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심한 열병은 자신의 죄의 결과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셔야만 나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구약성경을 보면 열병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억측과 죄책감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통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이 그런 중병에 걸릴만큼 큰 죄를 짓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또 똑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총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병자들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살지 죽을지 모르는 중병이 주는 좌절감과 고통, 그리고 죄책감이 주는 절망감에 짓눌려 살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는 모든 면에서 안식할 수가 없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전혀 쉼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쉼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병은 죄의 결과라는 영적인 편견이 병자들을 볼 때마다 그들을 정죄하고 또 평가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그 사람들의 영혼이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일까지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죄를 당하는 사람들의 상처만 생각하지만 실은 편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사람의 영혼은 훨씬 더 심각하게 일그러져 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그러짐은 그들의 영혼을 항상 불편하게 하고 그래서 쉬지 못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잘 아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근심과 걱정으로 더더욱 평안한 영혼의 안식을 가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었습니다. 그렇게 그 여인을 묶인 것으로 부터 풀어놓아 자유롭게 해 주었고, 그래서 그 여인은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도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안식이 가득한 안식일에도 쉬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에 사로 잡혀서, 또 힘든 질병에 걸려서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일그러진 눈과 근심하는 마음 때문에 전혀 쉼다운 쉼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너무 너무 안타까워 하셨고 그래서 그들에게서 안식을 빼앗아가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시고 그들에게 참된 쉼이 있는 안식일을 선물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안식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식일이었지만 그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쉬지 않고 하루종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처럼 ‘일’하신 덕분에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그 안식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죄가 들어와 버린 이 세상에는 참된 안식, 완전한 안식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안식일 조차도 사람들에게 완전한 쉼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일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람들을 고치시고 바로 잡으시며 일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시니 우리가 그나마 불완전한 안식이라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오늘, 그러니까 주일이 안식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며 영혼의 평강을 얻고 새로운 힘을 얻으며 쉴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다 오늘도 쉬지 않으시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의 상처입고 병든 영혼을 고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은혜 덕분입니다. 이 예배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이유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늘의 식탁을 차려놓으시고 우리를 섬겨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일은 우리의 안식을 위한 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주 한 주 주일이 거듭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일하시는 은혜를 덧입고 이 자리에 나오고 또 하늘의 안식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옆에 앞치마를 두르시고 환하게 웃고 계신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평안한 얼굴 속에서 당신의 기쁨을 찾고 계시는 그 분의 빛나는 미소가 보이십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주일이 어떤 날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일은 단지 예배드리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고치시니 고침을 받아야 하는 날입니다. 그 분께서 바로 잡으시니 우리가 곧게 되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 분이 풍성한 하늘 식탁을 베푸시니 그 분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을 배부르게 해야하는 날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누리며 그 분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와 안식을 누리는 일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쉬고 먹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날입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가 왜 주일을 지켜야 하고 왜 꼭 주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이런 질문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제가 오늘 그 답을 드리겠습니다. 가장 짧게 말씀드리면 주일은 우리의 영혼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 날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날입니다.
몸에만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아니 더 많이 필요합니다. 몸에만 휴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도 필요합니다. 우리 영혼에 에너지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또 쉼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매말라가게 됩니다. 영혼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공급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쉼은 그 분의 영광을 보고 그 분 안에 거할 때 얻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어도 일주일 중의 하루를 의무적으로 그 분에게만 집중하면서 보내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영혼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의무인 동시에 아주 귀한 선물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생존하기 위한, 그리고 그 영혼이 풍성한 양식과 쉼을 공급받기 위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여러분은 오늘 ‘주님 안에서’ 쉬셔야 합니다. 적어도 이 하루만큼은 번잡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깊고 풍성한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풍성한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진리로 가득 채우셔야 합니다. 그 진리를 믿음으로 소화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쉬고 먹는 것이 주일의 여러분의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쉼은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쉼을 의미하지만은 않습니다.
주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분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였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즐겨 드시는 양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일’을 하신 덕분에 안식을 얻게 된 베드로의 장모는 병상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시중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부엌으로 가서 열심히 요리를 했고, 그 요리를 날라 식탁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식사를 하시는 내내 옆에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안식일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규정만 보면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과연 이것이 일이었을까요? 노동이었고 고역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일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 너무 하고 싶어서 너무 너무 기쁜 마음으로 선택한 섬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안식을 얻게 된 베드로의 장모는 이제 자신의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안식을 선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교회에서 하시는 일이 여러분에게 힘든 일입니까? 아닙니까? 그게 노동입니까? 아닙니까? 어찌보면 그것은 일이고 노동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일이고 노동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안식일 내내 하셨던 일이나 예수님 덕분에 치유와 안식을 얻은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해서 한 일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일이면서도 동시에 단순히 일일 수만은 없는 그런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기쁘게 감당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는 여러가지 일들은 그저 내가 교회의 일원이고 또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만 하는 그런 일들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몸된 교회의 지체이기 때문에 지체로서 마땅히 해야할 역할과 일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렇게 나에게 맡겨진 일들 속에는 다른 이들을 치유하고 쉬게하며, 그들의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주일은 결코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안식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일은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서로에게 쉼을 주고 서로를 치유해 주는 그런 안식일입니다. 섬김 속에서 기쁨과 쉼을 얻는 그런 예수님의 안식일을 닮은 안식일, 베드로의 장모의 안식일을 닮은 참된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수고해도 평안하고 만족한, 기쁨이 넘치는 그런 안식일이어야 하는 날입니다. 우리의 주일은 원래 그런 안식이 있는 날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주어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일은 이런 날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면서 이 하루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피곤하고 배고픈 채로 일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일이 이런 안식이 있는 좋은 날이 되려면, 우리는 우선 하나님께서 이 안식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과 안식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기쁘게 섬기시며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식탁에서 먹고 마셔야 하며, 또 그 분의 고치시는 손길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주일은 서로가 서로를 쉬게하는 그런 아름답고 온전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가 함께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내가 그런 은혜들을 진실로 기대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그것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늘도 나에게 그런 풍성함과 회복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내 영혼의 입을 넓고 크게 열고서 하나님의 채우시는 은혜를 받아누리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하루종일 일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르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내어쫓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만큼 우리를 쉬게 하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모든 것들로 부터 풀어놓아 참된 안식을 맛보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쉬지 않으시며 오늘도 우리를 고치시고 먹이시기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모든 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들에게 쉼을 선물하기 위해 기쁘게 수고할만큼 넉넉하고 너그러운 영혼을 지닐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일으켜 또 누군가를 기쁘게 섬기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고치시고 먹이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온전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일 내내 이 사실을 생각하시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준비하신 그 쉼과 회복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또한 우리가 서로가 서로의 안식을 위해서 기쁘게 섬길 수 있게 하시려고 우리를 모으셨습니다. 주님이 일하신 것처럼 일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모으셨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하나 하게 되더라도 그 모든 일들 속에 이러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행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주일에 우리가 이런 복을 누리고 이렇게 섬기며 일하는 연습을 한다면 우리의 평일의 일상의 삶의 자리 또한 우리가 만들어 내는 회복과 쉼들로 채워져 갈 것이고, 우리들 또한 그 속에서 주님처럼,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처럼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시는 온전한 고치심과 안식을 누리며 또 누군가를, 그리고 어느 곳인가에 안식을 선물하는 행복한 섬김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