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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1.11.주일오전 - 깨끗함을 받으라(마가복음 10)


막0140to45 - 깨끗함을 받으라.pdf


20121111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장 40-45절


인간의 몸은 유기체라고 부릅니다. 유기체라는 말은 각 부분 부분이 기계의 부품처럼 조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도록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한의원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허리가 안좋아서 2년을 넘게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요. 그 한의원의 원장 선생님이 침을 참 잘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침구의학은 정말 신기합니다. 아픈 곳은 허리인데 치료는 어뚱한데다 할 때가 많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엎드려 있는 것이 허리에 무리가 간다고 눕혀놓고는 손가락에 침을 놓는데, 그 효과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저는 실제로 거기서 허리에 침을 맞을 때보다 손가락에 침을 맞을 때가 훨씬 더 효과가 좋았습니다. 한 번은 그 분이 제 손에 침을 놓는데, 제가 어렸을 때 운동을 하다가 손가락을 반복해서 다친 적이 있고 그래서 그 곳이 조금 이상한 모양이 되었는데, 거기를 보시더니 여기를 이렇게 다쳐서 꼭 여기 놓아야 할 침을 놓지 못한다고 하면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습습니다. 허리가 아픈데 손가락을 보면서 안타까워 하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몸입니다. 그렇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유기체인 우리의 몸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몸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몸은 인간의 또다른 부분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생각하고도 연결되어 있고, 감정하고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몸이 아프면 생각이 부정적이 되고, 감정도 축 쳐집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그 스트레스가 심하면 큰 병이 생깁니다. 또 감정에 병이 생기면 몸도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또 생각도 뒤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때로는 이 모든 부분을 다 고쳐주고 바로잡아 주어야 비로소 진짜로 치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환자들을 피해서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전체를 여행하시며 사역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이니까요. 그런데, 갈릴리에 가서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기 전에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그 지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빠르고 넓게 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나서시자 마자 문둥병자 한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참고 삼아 이 문둥병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이 문둥병은 오늘날의 한센병과는 많이 다릅니다. 사실 어떤 분들은 문둥병자라는 말이 특정한 분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이라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문둥병자를 ‘한센병자’라고 고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점에서는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문둥병은 굉장히 광범위한 피부병입니다. 그저 피부가 변형되고 변색되거나 혹은 벗겨지는 모든 악성 피부병들을 모두 문둥병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당시의 의술로는 거의 불치병이었기 때문에 한센병처럼 악한 질병이었던 것만은 사실이지만, 당시 기록으로 보면 성경시대의 유대지역에는 지금과 같은 한센병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보면, 성경이 문둥병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저 고치기가 굉장힌 힘든 악성 피부병이라고만 생각하시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이 질병이 그렇게 심각한 질병이었던 이유는 이 질병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이 질병이 이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는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적이고 종교적으로 완전히 격리시켰습니다. 우선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 따로 거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마을 뿐만이 아니라 가족과도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떻게든 그 질병이 치료가 될 때까지 그 마을 뿐 아니라 다른 성읍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특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피치 못하게 사람들 앞으로 지나가야 할 때면 손으로 윗 입술을 가리고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계속해서 외쳐야 했고, 만약 사람들이 이들을 향해서 돌을 던진다고 해도 저항하거나 대들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은 이 질병이 큰 죄의 결과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병에 걸리면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크나큰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에 대한 이런 시각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분명히 문둥병이라고 불리는 질병에 걸리면 부정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죄때문에 생기는 병이라고 말하는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그저 부정하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이 부정하다는 것은 그것이 생명보다는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체도 부정한 것이고, 동물의 사체도 부정한 것입니다. 문둥병 또한 썪고 변질되고 색이 변하는 등 죽음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이지 그게 죄의 결과로 걸리는 병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하게 이 두 가지가 한 세트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사람들은 부정함은 곧 죄라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어 그런 시각으로 자신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둥병은 그러한 부정함 중에서도 가장 큰 부정함이었으니 그들이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또 어떻게 대했는지는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은 몇 배나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우선 육체적으로도 힘듭니다. 그런데, 거기다가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소외되고, 당시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종교와도 분리되고, 사람들의 정죄를 받는 동시에 스스로도 심한 죄책감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야 말로 몸도 마음도 그리고 영혼도 모두 만신창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병자가 바로 이런 상태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야 말로 복음 중의 복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다른 질병이 아닌 문둥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와 또 물리적인 장애물들을 극복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서는 안됩니다. 다가가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자포자기라는 장애물, 죄책감이라는 장애물, 사람들의 정죄라는 장애물, 또 길에서 만날지도 모를 사람들의 위협이라는 장애물도 넘어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이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위한 첫 계단을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선뜻 예수님께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나 이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분께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 분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구원은 그 어떤 정당한 이유를 막론하고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로 다가간 병자는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간청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는 고쳐달라고 요청하지도 못합니다. 그의 질병은 그에게는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가장 절실한 문제였지만, 그 병 때문에 낮아질 대로 낮아진 그의 마음은 그 절실한 문제를 온통 예수님의 ‘원하심’에만 의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낮은 간청은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원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원하심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소원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심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정결함은 사람이 줄 수 없습니다. 정결함은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고백은 자기 필요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이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우리를 낮아질 대로 낮아지게 하는 상황은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얼마나 괴롭고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보면 이런 상황만큼 유익한 상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되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려 드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지면 그 동안 크고 훌륭해 보였던 나 자신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가 없어진다는 것, 나는 무능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주님을 향해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외치는 탄식은 이 세상 그 어떤 외침보다도 능력있는 외침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이제는 그동안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았던 우리의 자아라는 장애물이 사라져 버렸음을 선언하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라는 고백은 그 자체로는 너무나 낮아진 사람이 외치는 측은하고 고통스러운 고백이지만 그 고백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면 가장 능력있고 풍성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은혜가 흘러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활짝 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나와 상관없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능력, 내 상황, 내 처지... 이 모든 것들과 상관없이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는 그런 때는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전혀 나를 의지할 수 없을 때, 나는 전혀 의지할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이런 참되고 능력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낮아짐 조차 복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가장 낮은 바램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와 꼭같은 마음이 되어서 그의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만져주셨습니다. 사실 문둥병자는 그 누구도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접촉조차도 하려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부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건 그와 닿게 되면 그 사람처럼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만질 수 없는 사람에게 손을 뻗으셨고, 또 그렇게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정해 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거룩함을 잃어버리셨을까요? 사람들 사이에서 정결하고 거룩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법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코 정결함이 부정함을 내어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정결함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다 결함이 있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끼리는 부정함과 정결함이 만나면 정결함이 부정함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결함이 부정함 때문에 더럽혀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거룩함은 완전합니다. 그 분의 정결함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부정함이라도 그 분과 닿으면 다 깨끗해 집니다. 마치 대양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지는 것처럼 금새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처리하지 못하실 더러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 앞으로 가져가지 못할 더러움은 전혀 없습니다. 혹시 여전히 주님 앞에 내놓지 못하는 죄나 허물이 있다면 다 주님 앞에 내놓으십시오. 그리고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니다”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이런 일에는 염치가 필요없습니다. 주저함도 필요없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 어찌해 보기 힘든 반복되는 죄를 짓게 되면 그런 죄들을 주님 앞에 내놓는 일들을 주저합니다. “나도 양심이 있지?”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내놓지 않는 것이 양심이 있는 행동이 아니라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양심이 없는 행동입니다. 더러움은 반드시 깨끗해 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꼭 주님께로 가져와야 합니다. 그 분이 만져 주시고 그 분과 닿으면 아무리 심한 부정함이라도 정결케 되기 때문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으신 주님은 곧바로 그를 만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소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의 더러움이 그 분과 닿아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더러움을 처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내가 나의 더러움이 처리되기를 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더 우리의 더러움이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더러움을 그 분께 가져가는 일은 그 분의 소원과 바램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누리는 크나큰 은혜이지만 동시에 그 분의 가장 큰 바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당신의 소원을 담아 말씀하시며 그를 만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가 정결케 되었습니다.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할 때 주님은 그저 그의 눈에 보이는 질병만을 치료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님이 굳이 그 병자를 만지셨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말로만 하셔도 치료는 될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를 만졌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주님은 그 만지심을 통해 그의 상처입고 병든 모든 부분을 고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만지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근처에 가기도 싫어합니다. 스스로도 스스로의 몸에 손을 대기 싫습니다. 그 몸의 망가짐이 자신의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니 스스로도 스스로가 혐오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의 몸에 스스럼없이 손을 대셨습니다. 무한한 사랑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 때, 주님의 손에 만져진 것은 그의 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마음에, 그리고 그의 영혼에 손을 대신 것입니다. 얼마만에 대해보는 인간적인 대접이었을까요? 얼마만에 느껴보는 사랑이었으며, 얼마만에 누려보는 따뜻함이었을까요? 그 손이 그저 단순히 한 사람의 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어루만짐은 그 문둥병자에게 커다란 위로와 치료를 가져다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만진 손은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그 사람을 만드셨던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생명가득한 손이었습니다. 그 손에 그의 병든 마음과 영혼이 닿았을 때 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의 마음과 영혼은 다시 새롭게 창조되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고쳐지는 수준을 넘어서서 완전히 온전케 되지 않았을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저와 함께 드린 첫번 예배 때부터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예배에 기대를 갖자, 이 예배를 통해 베푸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큰 기대를 갖자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만지심이 이 예배시간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바라면서 설교하고 또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있는 만지심, 이 생명 가득한 만지심, 그래서 그 누구라도 온전히 새롭게 하고, 그 누구라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만지심이 이 시간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허락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만지심은 그저 위로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손은 전능하신 손이기 때문에, 그 분이 만져주시면 모든 아픔과 상처가 치료됩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 깊은 곳의 일그러짐까지도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항상 그래야 하지만, 우리는 특별히 이 예배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놀라운 은혜가 부어질 것을 믿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는 것을 꿈꿔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소원과 기대를 품고 예배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그 능력의 손으로 만져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모든 치료는 끝났습니다. 그의 몸도 마음도 완전히 치료되었습니다. 그를 더럽혔던 모든 더러움은 그를 떠나갔습니다. 이제 그저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제 깨끗해 졌으니 네 자리로 돌아가라. 그런데 돌아가거든 무엇보다 먼저 율법대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정해진 제물로 제사를 드려라 그렇게 해서 네가 온전히 깨끗해 졌다는 것을 증명해 보여라”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사실 그것으로 치료는 다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가장 중요한 치료가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사회적으로 정결함을 인정받는 것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율법적으로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문둥병을 진단내렸던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에게 정결함을 공인받는다면 그것은 그가 다시 유대사회 속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을 갖추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그 일을 통해서 이 병자가 당당한 유대사회의 일원으로 온전히 복귀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치료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소극적으로 치료를 받는 일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치료가 이루어져야 마지막 치료가 완료되는 것으로 보셨고, 그래서 그에게 이것까지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의지로 율법을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으신 경험이 있는 분들 중에는 그 은혜에 북받쳐서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오히려 예전보다 더 거칠어 지고 예전보다 더 많이 부딛히며, 더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그러한 모습이 전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이며, 아직 치료가 완료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은혜는 우리를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저 우리의 병을 낫게 하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역할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우리가 모든 면에서 다 온전케 되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몸도, 마음도, 생각도, 감정도 치료하기를 원하시며, 그래서 우리를 더욱 더 윤리적이고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을 기대하시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 율법과 복음을 전혀 상관이 없으며, 심지어는 복음이 온 이후에는 율법은 완전히 폐기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 폐기된 율법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결법과 제사법입니다. 이 두 가지는 완전히 폐기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구약의 성결법과 제사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들 속에 들어있는 정신은 그대로 남아있고, 특히 사회법이나 도덕법들은 그 정신이 더 강해졌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은 율법을 폐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참된 율법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복음을 더욱 더 온전하게 지키도록 하는 능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윤리적이어야 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보다 법도 훨씬 더 잘 지켜야 하고 또 훨씬 더 정직해야 합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법을 어기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정직함을 파는 은혜받은 사람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하는 일은 우리를 영적이고 도덕적인 의무들로 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속사람도 겉사람도 전부 다 하나님의 백성답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문둥병자가 그저 육체의 질병만 치료받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마음과 영혼만 치료되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모든 면에서 다 온전하게 치유되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가 온전히 유대사회 속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치료받기는 원합니다. 질병이 치료받기를 원하고, 마음의 상처가 치료받기를 원하고, 가정이 치료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진짜 치유는 그런 치료들을 넘어서서 그가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된 백성이 되는 것, 그렇게 양심을 지키고 법을 지키며 거룩함을 지키며 사는 것인데, 그것을 잘 모르고, 또 알아도 그 치료는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과 신앙은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성도들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이 복음인 이유는 복음에는 우리를 그렇게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킬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치료하고, 우리의 마음을 치료하며, 나아가서 우리의 양심과 윤리성까지 회복시키는 능력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실패한 율법의 대안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온전히 치유하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은 주님이 계획하신 복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져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전능하신 손, 생명가득한 손, 영혼과 마음까지 고치시는 그 손으로 우리를 만져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곳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것을 원하십니까? 몸 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 뿐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비뚤어진 성향과 양심과 도덕성까지도 만져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을 그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한 주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는 우리를 주님 앞으로 가지 못하게 막는 모든 장애물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준이나 이목, 내가 당할지도 모를 작은 위험이나 손해, 또 내 속에 있는 뿌리 깊은 죄나 말못할 상처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런 것들을 넘엇, 그리고 그런 것들을 들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간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 가장 낮은 곳에서 드리는 가장 능력있고 온전한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를 고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더럽고 추한 부분을 만져주실 것이며 내 가장 깊은 상처와 아픔을 온전하게 해 주시고, 우리를 참되고 정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날마다 우리를 고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악함과 약함을 내어 맡김으로써 항상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사는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