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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0.15. 새벽예배 - 이 날은 안식일이니(요한복음 31)


요0510to18 - 이 날은 안식일이니.pdf


20121015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5장 10-18절


‘인지상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측은히 여기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야 하며, 불의한 일을 보면 분노가 생기고, 다른 이들의 좋은 일에는 함께 기쁨을 나누는 이런 등등의 마음들이 바로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지상정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런 인지사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일단의 유대인들은 40년동안 자리보전하고 누워있던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축하하고 기뻐하거나 자초지종을 묻는 대신에 대뜸 그 사람을 나무랐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고침받은 병자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조차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그 병자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그 사람의 모습과 표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기쁨과 감격에 충만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까? 만약 유대인들이 그가 40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였던 것을 알았다면, 그의 치유를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며 누가 그런 놀라운 일을 행했는지 물었어야 했습니다. 또 그들이 그 사람을 몰랐더라면 왜 그렇게 기뻐하느냐고, 무엇이 너를 안식일을 범할 정도로 기쁘게 만들었느냐고 물었어야 합니다. 비난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고 단지 그가 율법을 어긴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은 율법 차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소중히 여긴 것은 단지 율법을 어기면 안된다는 사실 그 자체 였습니다.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걸어가면 안된다. 그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라는 기준은 율법에 명시되어 있는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랍비들은 율법을 연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율법을 어기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생각해 낸 묘안이 있었습니다. 율법 주변에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일컬어 그들은 ‘울타리 치기’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흔히 성경에서 발견하는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그 율법 주변을 이러 저러한 금지사항들로 둘러쌌습니다. 그래서, 그것들만 지키면 율법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좋은 의도로 만들어 졌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마음에서 순수하게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그래서 받은 은혜를 지키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결국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그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 사람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데, 그 사랑이 없어진 껍데기만 붙들고 그 껍데기로 사람을 판단하고 죽이는 일들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은혜 받지 못한 채로 말씀에 대한 지식만 많은 사람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받지 못하고 말씀에 대한 지식만 많아지면, 그 지식을 가지고 세상을 재고 판단하는데 사용하게 됩니다. 판단은 기가 막히게 하지만 사랑이 없고, 용납이 없습니다. 성도가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에서 은혜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수많은 말씀을 듣고 또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교훈을 듣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다 일종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저런 기준이 생겨납니다. 이런 상태에서 은혜를 모르거나 혹은 은혜가 사라진다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더 완고한 사람이 됩니다. 더 가차없는 사람이 됩니다. 말씀으로 생겨난 기준과 틀을 사람들에게 들이대고 그들을 판단하고 나누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런 판단이 틀리지 않습니다. 말씀에 의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정말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채로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 기준을 붙드는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별 것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책망과 나아가서 저주를 받을만큼 심각한 일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은혜없이 말씀의 기준만을 가진 사람들은 그 기준을 자기자신의 삶을 돌아보는데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자기 자신을 살피는데 사용합니다. 그렇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그 말씀을 자꾸 다른 사람에게 들이댑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정신을 어기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율법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율법을 망가뜨리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주신 것인데 그 율법을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를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거울을 바라보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거울을 바라보면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나 자신입니다.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그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신앙의 규칙들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댈 때, 우리는 아주 큰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다른 사람을 향한 긍휼의 눈의 입니다. 사랑이고 이해하고자 하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인애를 잃어버린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꾸지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람에게 당신을 고쳐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를 믿거나 따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침받은 병자에게 한 것과 같이 예수님도 비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 병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을 고치신 이가 예수님이라고 전해 주었을 때에 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참 병도 이 정도면 고치기 힘든 만성질병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예수님은 그 안식일에도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하나님도 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한 가지 일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를 베푸시는 일입니다. 죄인들을 향해서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일만큼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무슨 말씀인지 다 알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듯이 자신도 그런 일을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은혜인 치유를 주신것이고 그 치유를 통해서 그를 죄에서 놓이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용서해 주시는 일은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십니다. 안식일에도 여전히 그렇게 일하십니다. 그 은혜와 긍휼이 한 순간이라도 멈춰지면 우리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아버지의 일을 그대로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틀은 항상 필요합니다. 틀이 없으면 내용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틀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틀과 내용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어떤 것을 버리는 것이 더 안전하겠습니까? 틀입니다. 물론 그럴 때 아직 그 틀 속에 있는 사람들의 오해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비난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틀보다는 내용을 붙들어야 합니다. 둘 다 붙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 있다면 내용을 붙드는 것이 더 안전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알지 못하면 이 내용을 붙든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은혜가 없을 때에는 틀이 내용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의 건전함을 지키기 위한 규준들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규준들이 오히려 신앙을 신앙되지 못하게 하고 은혜를 방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규준을 은혜를 담을 수 있는 모양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일, 즉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뒤따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은혜 없이 신앙의 규칙들만 붙드는 매마른 사람들이 절대로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없는 법을 생각하는 어리석고 무자비한 사람들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건전한 신앙을 위해서 지켜야 할 것들은 지켜나가십시오. 그러나,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여러분의 즐거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만족에 빠지게 하는 기준은 우리를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인간다움을 파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사람들의 신앙을 좋은 신앙, 참된 신앙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항상 은혜 가운데 거하면서 그 은혜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말씀에 자기 자신의 삶을 비춰봄으로써, 그리고 나의 주일, 나의 매일이 주님께서 일하시듯 나도 일하는 그런 날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넘치는 그런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