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0.20. 주일오전 -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마가복음 7)


막0121to28 -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pdf


20121020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장 21-28절


우리는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는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건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갈릴리 같은 이 세상에서 건져 올리셨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우리의 삶과 말의 그물로 건져 올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이 풍성한 생명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부르심은 시작이고 과정이지 완성이나 끝이 아닙니다. 지금 부족해도, 지금 연약해도 괜챦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거절하지 않는 한, 그 부르심 속에서 우리를 다듬어 가시는 그 손길에 우리를 맡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를 부르신 그 분이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그물에 한 사람이라도 건져 올려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게할 수있다면 우리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하나남께는 참으로 값진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 일에 관심이 부족하시다면, 지금부터라도 더 큰 관심을 가지려고 기도하시며 애쓰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나의 삶이 이 영광스러운 소명에서 멀다고 느껴지신다면 더욱 더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에 여러분의 부족함을 맡기시고 이전보다 한걸음이라도 더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렇게 지금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에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통해서 그렇게 할까를 고민하지 마시고, 어떤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까를 고민하며, 어떻게 하면 나의 일상이 그런 아름다운 그물이 될 수 있을까를 궁리하시면 됩니다. 그 고민과 궁리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사람을 낚는 가장 좋은 그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거기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후,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처음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을 위한 아주 중요한 원리 하나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일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에 우리들도 이 일을 우선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도 처음 교회를 통해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함을 입은 베드로가 복음을 설교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 다음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처음 한 일은 다름 아닌 사도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그 무엇보다도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그리고 처음 교회도 모두들 다른 일보다 이 일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것 중심으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을 비롯한 처음 성도들은 다른 일보다도 그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그 일을 가장 열심히 하였을까요? 물론 그 내용이 구원과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온전한 진리이기 때문에 말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일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랍비들, 그러니까 율법선생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굉장한 권위를 지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랍비들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성과 권위를 인정받던 사람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국어과목 중에서 ‘고전하면 이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학원강사가 한 사람있었습니다. 저도 이 분의 덕을 톡톡히 보았는데요. 그 분이 바로 ‘서한샘’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굉장히 재미있는 강의방법으로도 유명했지만, 이 분이 그런 유명함과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사람이 단순한 강사가 아니라 자신이 강의하는 책을 직접 저술한 저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말씀의 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남의 책을 강의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의 원저자셨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그 말씀의 의미를 가장 제대로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니 완전히 아시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게다가 그 분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영감으로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권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그 때 회당 안에는 더러운 귀신에 들린 사람이 한 사람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 너무 놀라고 기뻐했지만 이 사람은 전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은 전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위대한 진리가 선포되는데도 그 사람은 기뻐하기는 커녕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무엇때문에 오셨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주목하신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입니다.” 사실 이것은 선재공격이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틀림이 없는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본다면,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십니다. 귀신들린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한 말은 ‘내가 너를 다 알고 있으니 너는 꼼짝마라’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던 셈입니다. 귀신은 두려워 떨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또 허세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멸하러 오신 분 앞에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이런 허세가 통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요동도 없으십니다. 그 귀신과 타협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대신 그저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길지도 않은 말입니다. 복잡하고 요란스런 행동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에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쫓겨난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그 이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 있었을 것입니다. 귀신에 들렸으면서도 회당에 나와 예배도 드리고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이 사람이 귀신이 들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테지만 그 누구 하나 이 사람을 문제삼거나 혹은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눈치만 보면서 그저 조심스럽게 공존하는 길을 택했겠죠. 사실 가버나움 사람들에게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귀신을 다룰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었던 이 사람을  예수님은 짧은 말씀 한마디로 완전히 제압하셨습니다. 제압하셨을 뿐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그 더러운 귀신을 완전히 쫓아내셨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파멸을 직감하고 크게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죽음을 통곡하고는 자신이 편하게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탁월하고 권위있는 가르침을 듣고, 또 이렇게 놀라운 일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라서 서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정말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야. 우리는 손도 대지 못했던,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던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령을 했는데 그들이 즉시 순종하다니!!!” 그 이후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전역을 휩쓸게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이 마치 이 안식일의 회당 안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삶의 전 영역에는 쫓아내야할 ‘더러운 귀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나라 안에, 또 교회 안에, 직장 속에,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삶 속에... 이런 것들을 망가뜨리고 무너뜨리는 더러운 귀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과 싸워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제가 속해있던 교회 대학부 수련회를 따라갔었는데, 거기 처음 참석했던 후배의 친구가 알고보니 귀신에 들려 있었습니다. 당시 전도사님과 대학부 지도교사, 그리고 몇 몇 선배들이 그 귀신을 제압해 보려고 정말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는 무척 화가 나고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일그러지게 만들 수 있는지 그 실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 손아귀에 들어가면 저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고, 또 지금도 그렇게 망겨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귀신은 더럽습니다. 모든 것을 더럽히고 썩게 만들고 죽게 만듭니다. 파괴하고 무너뜨립니다. 사탄이라는 놈, 성경이 귀신이라고 부르는 놈은 결코 무엇을 세우거나 아름답게 만들거나 유익하게 하지 못합니다. 당장 보기에는 그렇게 해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다 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사탄의 요구를 따르며 죄를 지으면서 인생이나 어떤 일의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폭탄을 터뜨려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얻으려는 것이나 독을 먹고 배를 불리려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탄도 선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얼핏 보기에 선처럼 보이는 그것을 이용해서 더 큰 악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입니다. 사탄에게 선이란 마치 마약이 가져다 주는 환상적인 흥분과도 같습니다. 당장은 행복하고 기분좋지만 결국에는 파멸로 몰고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과 정확하게 반대가 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시지만 그것은 결국에는 그것을 통해 더 큰 선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미 타락한 이 세상 속에 절대선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악을 선용하시며 그 분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마가복음 속에 여러분 등장할 것이기 때문에 이 귀신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귀신이라고 하면 이미 머리 속에 가지고 있는 그림이있습니다.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는 풀어 헤치고 입에는 칼을 물고 피를 흘리는 처녀, 얼굴이 없는 괴물...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귀신의 실체가 아닙니다. 귀신은 영적인 세력입니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점령해서 악한 영향을 미치고 악하게 만드는 아주 구체적인 힘을 지닌 영적인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귀신은 원래 무섭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영이니 겉모습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습,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속입니다. 무서워하게 하여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귀신, 그러니까 사탄을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은 언제나 망가뜨리고 무너뜨리고 어그러뜨리는 일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나라를, 그리고 교회와 개인을 그렇게 못쓰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하거나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됩니다. 사탄은, 그리고 더러운 귀신은 당장은 달콤한 약속을 하고 사탕 하나를 던져주지만 결국에는 그것으로 우리 삶 전체를 무너뜨리려 드는 무시무시한 놈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당장을 보지 말고 일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사탄의 유혹과 거짓을 물리쳐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삶은 그 안식일의 회당안과 너무 닮아있습니다. 회당에는 더러운 귀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안에는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 속에는 더러운 귀신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세상의 힘으로는, 그리고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더러운 귀신이 들어오는 것도 막을 수 없고 또 들어온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편한 동거, 아주 위험한 동거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쫓아내야 하는데, 몰아내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크게 말썽만 부리지 않으면 된다고, 잘 달래며 데리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사탄은 본질적으로 ‘더러운 영’입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존재 자체가 주변을 오염시키고 더럽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들에게는 영적인 패배감과 무기력함을 만들어 냅니다. 


회당에 모였던 유대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동거하면서 그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살아가는 일이 그들에게 영적인 활력을 주었을까요?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넘치게 하였을까요? 그 안식일의 그 회당 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패배감과 무기력함에 빠져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꽉 막히고 짓눌려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교회,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악과의 동거는 항상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마련입니다. 당장 드러나는 문제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더러운 영과 함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악과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그 모든 영역을 이미 더럽히고 있고 또 병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동거할 존재가 못됩니다. 당장 말썽부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놓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당 안 같은 세상 속에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더러운 귀신을 몰아내야 하는 줄 알면서도 그럴 능력이 없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종 말씀드리지만 계속해서 안에서 답을 찾는데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밖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땅에서 답을 얻을 수 없다면 하늘에서 답을 얻어야 하고, 우리에게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 주님에게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힘으로 안되는 일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향하게 하도록 도와주는 도우미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게 해 주는 망원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회당 안에 있는 우리들은 회당 안이 아니라 회당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 우리의 믿음의 눈을 돌려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여러분, 귀신의 절망 섞인 하소연이 들리십니까?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분이 행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가버나움에서,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자리잡고 살고 있는 더러운 귀신을 끝장내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분은 그 옛날 사탄의 소굴같은 갈릴리에서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세상 어디서든 그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 개인의 삶 속에서 그 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비록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일은 이미 시작하셨으며, 이미 십자가에서 그 가장 큰 부분을 이루셨습니다. 마지막 승리는 오직 않았지만 결정적인 승리는 이미 이루셨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주님 편에 설 것인가? 그리고 그 분의 군대로 계속 싸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힘들지만 더러운 귀신과의 불안하고 위험한 동거를 끝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꾸짖었을 때, 귀신은 곧바로 그 사람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 안에서, 그 회당 안에서, 그 회당의 사람 안에서 거할 곳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 모든 일을 보면서 “어떻게 된 일이냐? 정말 권위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라고 놀라워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겉으로 보이는 것은 더러운 귀신을 내쫓은 사건이지만 그 중심에 들어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니까 그 분의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또 배워야 하는 두번째의 정말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기쁘게 하고 또 더러운 귀신을 내쫓는 모든 일들이 전부다 그 말씀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늘나라의 놀라운 일들이 전부 다 주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안에만 우리 영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또 그 말씀 안에만 우리의 삶 속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만이 이 세상에 하나뿐인 ‘권위있는 새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후, 그 제자들과 동행하면서 행하셨던 첫번째 기적이고, 주님께서 이 땅 위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에는 예수님 자신의 특별한 사역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제자들을 위한 실물교육이라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하나 더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교육과정의 첫번째 가르침이었던 셈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받고서 그 수습과정에서 첫번째로 받은 교육이었던 셈이지요.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바로 그 모든 놀라움의 중심에, 그 모든 능력의 중심에 예수님의 말씀, 그 분의 ‘권위있는 새 교훈’이 있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주님의 일을 할 때, 믿음의 삶을 살려고 할 때는 바로 이 ‘권위있는 새 교훈’에 의지해야한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일은 바로 사람을 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어디서 건져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건져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알든 모르든 그 사람 속에 거하면서 그 사람을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그 ‘더러운 귀신’으로부터 사람을 구하는 일이 바로 사람 낚는 어부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우리 힘으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힘을 빌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빌리는 일은 우리 주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을 배우는 일에서 시작되고, 순종하는 일로 완성됩니다. 그 순종이야 말로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능력을 밖으로 끌어내는 아주 중요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자로 일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처음에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노력도 했구요.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잘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제대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제대로 설교해야한다’라는 말 안에는 여러가지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중에는 말씀을 정말로 믿고 순종하는 설교자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 들어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데요, 저는 이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 전에 저는 목사는 그냥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려고 애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차피 진리가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깨지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정말 믿고 순종하는 어떤 진리에 대해서 설교하기 시작했을 때, 그 이전보다 청중들 속에서 더 큰 기쁨과 변화가 생겨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정말 우연한 경험이었지만 저는 이것을 통해 정말 설교자로서 놓칠 수 없는 값진 진리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을 내쫓으려면 그 귀신을 꾸짖을만한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권위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권위있는 새 교훈’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 진리를 잘 익혀야 하고, 믿어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 개인의 온전하고 복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살펴보십시다. 또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안에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얼마나 많은 더러운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얼마나 많은 더러운 영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까? 또 우리를 두렵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얼마나 많은 ‘더러운 영’의 속박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는 ‘더러운 영’의 속임수와 파괴는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몰아내고 싶지만 몰아내지 못해서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얼마나 많은 악한 동거자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내면과 삶 속에서 이러한 ‘더러운 영’을 계속 몰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자유와 평강이 무엇인지를 더 풍성하게 알고 또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그 누구를 위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자신을 더러운 영으로부터 건지면서, 또 다른 사람들을 건지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빚어져 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더러운 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세상이건, 교회이건, 가정이건, 혹은 나 자신이건 간에 그 모든 것을 풀어놓고 제 자리로 돌려놓아 회복시킬 능력은 ‘권세있는 새 교훈’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권세있는 말씀, 그 능력있는 생명의 말씀이 우리 삶과 이 세상 구석 구석 울려퍼지기 시작할 때,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더러운 영들은 우리 곁을 떠나갈 것입니다. 소리지르면서 나가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듣고 배우는 이 말씀에 우리의 믿음을 더하여 순종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 새 교훈의 권위에 순복하게 될 때, 그 말씀은 나의 삶과 우리의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풀어 자유케 하는 능력있는 교훈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은 우리들이 주님께 배워야할 또 다른 귄위있는 새 교훈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러운 영도 순종케 하는 우리 주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 그 놀랍고 기이한 주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더 열심을 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에 믿음을 더하고 순종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더러운 영들은 소리를 질며 쫓겨날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늘나라의 어부로 살아가며 많은 이들을 더러운 영으로부터 구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순종의 복과 능력을 허락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먼저 이 시간에는 우리 주님 앞에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의 흔적들과 그런 악한 것들이 만들어 내는 아픔과 힘든 것들을 고백하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주님의 권위있는 새 교훈만이 몰아낼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능력있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에만 몰아낼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새 교훈을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고, 그것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먼저 나의 삶을 건지는 사람낚는 어부가 되고, 나아가서 주변의 그런 사람들을 건지는 어부들로 살게 해 달라고. 혹시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위한 어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 한 번 간절히 기도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