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9장 39-41절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이상하게도 큰 병은 약한 사람들이 잘 안 걸립니다. 오히려 너무 너무 건강했던 사람들, 그래서 건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더 많이 걸립니다. 사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약한 사람이 큰 병에 더 강하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역설이 아니라 당연한 이야기가 됩니다. 저도 체력이나 몸이 강한 편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사실 어느 곳 하나 온전히 든든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일찍부터 스스로 조심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제 성격도 그렇지만 저는 될 수 있는대로 크게 무리를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일도 몰아서 하지 않고 나눠서 하고 꼭 일정시간 동안 일을 했으면 그 다음에는 만사 재쳐놓고 휴식을 취합니다. 그러려고 애를 씁니다. 때로는 제가 느끼기에도 게으르다 싶을 정도로 일부러 느긋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제가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약한 사람들은 이렇게 평상시에 조심합니다. 그리고 약간만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병원에 갑니다. 워낙 자주 다니는 병원이라서 별로 거부감도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건강한 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난 건강하니까’가 그런 분들의 표어입니다. 그래서 조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건강한 분들이 갑자기 넘어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연구에 의하면 그게 그렇지를 않다고 합니다. 큰 병이 찾아올 때는 항상 ‘전조’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다가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건강한 사람들은 그 전조를 무시합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병원도 별로 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병원에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다 병을 키우고 또 큰 병을 만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약한 사람들이 큰 병에 더 잘 걸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이 큰 병에 더 많이 걸린다는 이상한 역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강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일이 이것을 닮아있는 것 같습니다.
고쳐주신 맹인을 다시 만나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확고하고 명확한 믿음을 갖게 해 주신 예수님은 그 일을 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갑자기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이 맹인의 치유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설명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사건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앞을 볼 수 없었던 나면서 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온전히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눈 뿐만이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도 온전히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눈을 더 어두워지게 하고 멀게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이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눈뜨게 해 주시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행하신 일이었지만 거꾸로 자신은 눈을 뜨고 있으며 그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스스로를 더 짙고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을 행하신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만이 참 빛이시고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않고서는 자신과 이 세상을, 그리고 구원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알려 주시기 위한 표적이었지만, 사람들이 그 참 빛 자체를 거부하는 바람에 일이 완전히 거꾸로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 3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은 자신이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이 가지는 어쩔 수 없는 양면성 때문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습니다. 구원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멸망받는 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순종을 하게 되면 그 순종은 누가 불순종하는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삶과 구원을 위한 진리로 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법처럼 어쩔 수 없이 듣고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되시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 맹인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빈정거립니다. “당신의 말은 우리도 맹인이라는 것인가? 그러니까 당신의 말은 우리도 맹인이기 때문에 당신은 우리도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는군.” 바리새인들은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를 거꾸로 알아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추호도 자신들이 맹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만심, 그렇지만 비참한 자만심에 빠져있는 이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맞다. 너희들은 맹인이다. 내가 눈을 만들어 주어야 하고 그 눈을 씻어주어야 비로소 참 빛을 볼 수 있는 맹인들이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부인하는 구나. 다 본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 너희가 본다고 하면서도 나를 부인하니 너희는 너희 스스로를 심판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모르고 부인하는 것, 보지 못해서 거절하는 것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모른다는 사실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면서, 본다고 말하면서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은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는 안다고 말하는 것, 나는 본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유죄를 확정하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자만과 만족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서 성도들을 가르쳐 보니 정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 자만과 만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개 자만과 만족에 빠지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신 분들 중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고, 이제는 중직이라는 직분도 얻었기 때문에 이런 분들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다 안다, 그래서 새로울 것이 없다. 더 배울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냉정하게 평가해 보면 아직 기독교 진리의 기초조차 알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저런 조각 지식들은 굉장히 많이 알고 있는데, 그것 조차도 죄송한 표현입니다만 어디서 귀동냥으로 들은 것들이나, 인터넷을 검색하면 근거없이 떠도는 그저 은혜롭기만한 이야기들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분들은 성경공부를 해 보면 배우려는 마음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기에 바쁘고 그래서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쳐도 별로 성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스스로를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는 것이 정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길을 갑니다. 처음에는 아무 말 못합니다. 스스로 공언하듯이 아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정말 달라집니다. 모르니까 배웁니다. 무식하니까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의 든든한 기초를 마련하기 시작하며 그 위에서 정말 쑥쑥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정말 진지하고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 분 스스로도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스스로를 무식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직도 많은 부분이 눈 멀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영적인 유익을 줍니다. 우선은 겸손하게 합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고 기독교의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터 저는 제가 얼마나 무식한 사람인지를 정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하나를 제대로 알면 모르는 것이 두개가 생깁니다. 두 개를 제대로 알면 네개가 생깁니다. 그렇게 모르면서도 몰랐다는 사실조차를 몰랐던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래서 얻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물론 여전히 알량한 지식으로 잘난척하려고 들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무엇을 진짜로, 전부 다 안다고는 말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저 이제 막 맛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둘째로 자신의 무식함을 인정하고, 또 자신의 눈멈을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정직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은 기독교의 진리는 그 누구도 혼자서 완전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그런 태도는 우리를 계속 성장하게 하고 계속 더 밝은 빛으로 나아가게 하고, 계속해서 더 풍성하게 합니다.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멈출 수 밖에 없지만 스스로의 무지함과 눈멀어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더 알고 더 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만 더 알게 하시고 더 보게 해 주시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에 대해서 진심으로 무식하고, 진심으로 눈 멀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그 누구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본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전부 다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하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믿음의 참된 능력과 유익에 대해서 어느 부분인가는 항상 부족하고, 어느 부분인가는 여전히 캄캄한 채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오히려 우리는 진짜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과 삶은 더 풍성해지고 더 확실해져 갈 수 있습니다.
다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본다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과 신앙에 더 알아가고 더 밝아질 부분을 항상 남겨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더 알게 하실 것입니다. 더 풍성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더 보고 더 밝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족하고 무식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이 풍성한 복을 놓치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들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