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46편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해야할 일들 중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설득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사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 첫번째 발자국을 옮겨놓기도 힘들거니와 그렇게 사는 일이 약속된 열매로 맺혀지기 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로 부터 자기 영혼을 설득해야할 필요도 생겨나지만 또 그 영혼을 설득하는 일의 어려움도 생겨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잘 유지해 나가려면 자기 영혼을 자주 자주 설득해야 하며 또 그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오늘 시편 또한 그런 시편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아마도 흔들리는 자신의 영혼을 앞에 놓고 그 영혼을 설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런 방법은 굉장히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을 흔들며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현실로 부터 빠져나와 자기 자신을 제 삼자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제 삼자로 만든 자기 자신에게 그 현실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쩌면 이런 방법은 그저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시편에는 그런 기도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옛 믿음의 선조들도 이 방법을 즐겨 사용했던 것같습니다.
오늘 시편은 굉장히 기운찬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영혼을 향해서 너도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찬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저절로 찬양이 흘러나올만큼 좋은 상황인 것 같지만 실제 상황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냥 찬양하면 됩니다. 굳이 자신의 영혼을 향해 나도 찬양할테니 너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은 찬양을 하려면 굉장한 의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힘을 의지해서 아마도 추측컨데 옳지 않은 방법으로 어떤 상황을 해결하고픈 강한 유혹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향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도 드러지 않습니까? 의지해서는 안되는 사람이나 방법을 의지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때, “아냐, 아냐, 너 그러면 안돼!”하고 자신을 설득하죠. 다윗은 우리에게 이러한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 하나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의지해서는 안되는 인간과 마땅히 의지해야 하는 하나님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는 불안해 하는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려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결국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은 그에게 나를 기억하고 특별하게 생각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그 기억이 얼마나 지속될 줄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생명조차도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지나치게 의지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옳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를 정말 위험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만 끝난다면 이 이야기는 대안이 없는 공허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간 말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멈출 수 있는 잠시동안의 짬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에게 네가 의지하려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한 후 다윗은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셔도 놓고 “야 너, 그 사람 말고 이 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고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의 비열함과 신실하지 못함, 그리고 제 멋대로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야곱에 대한 신실한 사랑과 동행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목숨처럼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지 못했는데도 그처럼 붙들어 주시고 책임져 주셨다면 누군가가 그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고 의지한다면 그 사람이 누릴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더 크고 놀랍겠습니까? 그러니 야곱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그 여호와,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 보면 사람은 이렇지 않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6절부터 9절까지 한 목소리로 함께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분이 저와 여러분이 믿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신 줄을 아십니까? 진심으로 믿으십니까? 그러니, 이런 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 크신 능력으로 절대로 신실하심을 저버리지 않으시고 선하심과 올바르신 성품을 따라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분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러니 그렇게 자신을 설득할 수 있고 또 그래서 하나님을 다시 신뢰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런 하나님을 다시 찬양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 나는 맹인이어도 좋습니다. 비굴한 자리에 있어도 좋구요, 의롭게 사느라고 손해보는 자리에 있어도 좋습니다. 나그네여도 좋고 과아와 과부라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께서 그런 나를 눈뜨게 하시고, 일으키시고 사랑해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믿는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의롭게 살기 위해서 힘들고 낮은 길을 선택한 자신을 하나님이 분명히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임을 믿는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싶은 유혹, 정직하고 바르지 못한 방법과 사람들을 의지하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 자신의 영혼을 잘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리고 다윗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자신을 잘 설득하시고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는 더디 열릴 수 있지만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영원히 달고 시원한 열매가 될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히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다스리심만이 완전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든든하고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제목입니다. 오늘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고, 그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결국 모든 것을 가장 올바른 자리로 돌려놓으실 선하시고 정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아버지께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도를 드리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