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2.05. 수요저녁 - 나와 함께 기뻐하라 1(빌립보서 14)


빌0212to18 - 나와 함께 기뻐하라(1).pdf


20121205WE (#1).mp3.zip





성경본문 : 빌립보서 2장 12-18절 


이 세상에 기쁨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없죠. 모두가 다 어떻게 하면 기쁘게 살까, 즐겁게 살까를 고민하며 그 방법을 찾아왔고 또 지금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법을 찾기도 어렵지만, 그런 방법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가져다 주는 기쁨이 그렇게 크지가 않고, 혹시 크더라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쁨이 그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참된 기쁨이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쁨의 기준은 굉장히 낮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얻으려고 하는 기쁨 또한 그런 모양의 기쁨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 기쁨을 위한 방법을 발견하고 그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얻게 되는 것은 그렇게 부족한 기쁨, 그렇게 흔들리기 쉽고, 사라지기 쉽고, 그래서 누리고 있으면서도 불안하고 오히려 그것이 사라졌을 때, 더 큰 공허함과 불만을 가져다 주는 그런 기쁨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요즘 수요일마다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해 기쁨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기쁨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찾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고 또 추구하는 기쁨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기쁨은 사형선고를 앞둔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누렸던 기쁨, 도저히 기뻐할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하였던 그 기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고 있는 기쁨을 얻는 방법들 또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쁨을 위한 일반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찾는 기쁨이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찾는 기쁨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 기쁨은 그 기쁨이 생겨나는 원천도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들이 찾는 기쁨은 그 원천이 경험과 환경에 있거나 아니면 그저 자기 마음 속에 있게 마련입니다. 내가 처해있는 환경이 나에게 불만스럽지 않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아니면, 그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적극적으로 생각하자.’, ‘기쁘게 살자’라고 자기 자신을 겨우 설득해서 어찌보면 자신을 속여서 얻어내는 기쁨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뀌거나 마음이 바뀌면 함께 흔들리고 사라져 버리는 기쁨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기쁨은 이런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가 찾는 기쁨은 그 원천이 땅에 있지 않고, 심지어는 우리 마음에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찾는 기쁨은 뿌리를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직접 우리 영혼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조건이나 마음상태 때문에 쉽게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찾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이 다른 기쁨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고 든든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쁨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기쁨을 생각할 때마다 꼭 떠올려야만 하는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을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녀들 때문에 화가 나고 속이 상했는데 그 자녀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습니까? 안돼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심히 속이 상하시고 화가 나셨는데 그런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풍성한 기쁨이 흘러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워낙 너그러우시고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풍성하고 든든한 기쁨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보면 우리가 수요일마다 찾고 있는 기쁨의 비결이란 기쁨 자체를 위한 비결이라기 보다는 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지금까지 찾아냈던 방법들 대로 살면 분명 하나님께서 먼저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3주간 우리는 예수님의 기쁨의 비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요. 기억을 한 번 되돌려 볼까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이 기뻐하실 수 있으셨나요? 어떻게 해서 그 영원하고 무한한 기쁨을 누리실 수 있으셨나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그만큼 기쁘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모든 기쁨을 함께 누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얻으신 기쁨이 다시 예수님의 기쁨이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도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또 하나님만 누리는 기쁨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면 그 기쁨은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방법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보다는 하나님의 기쁨을 먼저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기뻐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할까요?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포함하는 모든 삶 가운데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이루어가는 여정으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에는 아주 신비한 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구원이라는 것이 100퍼센트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또 그만큼 우리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 쪽에서의 올바른 반응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이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어서 하늘에서 감 떨어지듯이 우리에게 뚝딱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은혜로 주어진 구원은 우리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계속해서 더욱 더 온전해져 가야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우리가 처음 은혜로 받은 구원은 다이아몬드 원석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아이몬드 원석이 다이아몬드입니까? 아닙니까? 분명히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로 보석시장에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원석은 아주 세밀한 세공과정을 거치고, 또 세팅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온전히 가치있는 진짜 귀한 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은혜로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받은 구원도 구원입니다. 그것 자체로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처음부터 우리 삶을 통해 그 가치와 영광이 빛나게 되도록, 진짜 보석다운 보석이 되도록 우리에게 맡겨진 원석과도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 삶을 통해서 우리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필요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비교적 이 일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가르칠 때 그들은 자신의 구원을 구원답게 가꾸어 가는 일에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일이 큰 방해를 받고 있습니다. 주변의 어려운 상황과 빌립보 교회 내부적인 갈등과 문제들로 인해서 심각하게 망쳐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이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없다고 흐지부지하지 말고 내가 없기 때문에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예전에 하던 대로 해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복종’ 그러니까 ‘순종’입니다. 바울은 예전에 너희가 나 있을 때 잘 순종했듯이 내가 없으니 더 열심히 순종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었을 때 빌립보의 성도들은 바울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열심히 들었을 뿐 아니라, 그 요구에 순종했습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에 합당한 사람들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귀한 일이 상황 때문에 흐지부지되어져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순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예전에는 순종이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이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이  빌립보 성도들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큰 이유가 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예수님께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그 순종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쁨도 사라져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충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기쁨을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데에는 정말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면 아마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과 만족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게 오해이고 사실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이유가 아니라 진짜 기쁨을 얻도록 만들어 주는 방법이라고,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꼭 순종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이루어 가고, 또 기쁨을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돌이켜 보니 저는 이 기쁨의 원리를 조금은 느지막하게 배운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목사가 되어서도 자꾸 내가 내 앞길 정하려고 하고, 이건 되고 저건 안된다고 이리 저리 재고 계산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게 맞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과연 그런 삶이 저에게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그럴 턱이 없죠. 이 작은 머리와 이 힘없는 손에 내 인생전체를 놓아두었으니 매일 매일 불안하고 참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저런 하나님의 다루시는 손길을 경험하면서 ‘아! 이제는 그저 하나님만 따라가자. 그게 최고다’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물론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그렇게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러면 큰일 날 줄 알고 그렇게 하면 행복끝 불행시작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불행 끝 행복 시작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내 삶의 길을 정하지 않고, 내가 내 삶에서 뭐 먹고 살까를 고민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편한 줄 아십니까? 그 자유와 넉넉함, 그리고 기쁨은 그런 삶을 선택하기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요즘 저는 가끔 아내에게 실실 웃으면서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여보야, 우리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살아도 되냐?”하고 말입니다. 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까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니 삶의 소소한 일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사라져 버리고 말아서 뭐 고민할래도 고민할 것이 별로 없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에 땅에 들어가야, 그 땅을 믿음으로 다 차지해야만 완성되는 것이 출애굽이라는 구원이었고, 그것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거치는 기간은 이제 그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믿음의 순종으로 증명해야 하는 그런 기간이었고, 그래서 이미 얻은 구원을 더 온전한 구원으로 다듬어 가는 그런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기간이 필요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나안 땅으로 한 순간에 옮겨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광야의 시험에 실패했습니다.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0일만에 끝날 여행을 40년 동안 계속했고, 그것도 출애굽이라는 그 엄청난 은혜를 경험한 1세대는 단 한 사람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 구원의 완성을 의미한다면 그들 중 누구도 그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영혼의 구원만 필요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곧바로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저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로 살아가면서 이미 주신 구원을 더욱 더 영광스럽고 빛나는 것으로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여정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더 온전하게 다듬어 가야만 합니다. 그게 우리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니까요.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구원을 이루어 가려면 꼭 피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게 가만히 보면 이것은 구원을 이루어 가려면 반드시 피해야 할만큼 중요한 것들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 뜻으로만 본다면 분명히 서로 원망하지 말고 서로 말다툼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무겁고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원망과 시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다툼이나 원망같은 시시해 보이는 잘못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 죄는 광야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이라는 약속된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한 원인이 되었던 가장 대표적인 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물과 양식, 심지어는 고기와 건강식을 주지 않는다고 광야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반항을 일삼았고, 하나님을 가장 악한 신으로 모함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인 모세와 다투는 일을 밥먹듯이 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피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광야의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닮지 말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상황이 좋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상황이 굉장히 나빠지면 그 때 사람들은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기가 쉽습니다. 인격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빌립보 교회는 거의 모든 면에서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많이 예민해져서 서로에게 대하여 거칠어 질 수 있습니다. 서로를 원망하며 또 다투기 쉽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바로 이런 문제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이런 경우 여기에 또 한 가지 더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반항이라는 죄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불평이 큰 죄가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어려운 경우에 하나님께 항변하는 것은 그다지 심각한 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무의시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한 두 번쯤 그렇게 반응하는 것은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것들이 잘못된 것들인줄도 모르거나,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전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나온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불만과 다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해서 기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게 하라’라는 말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원망과 시비의 문제는 우리의 기쁨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우리의 구원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구원에 관한 한 절대로 넋놓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어차피 구원은 은혜니까 대충해도 되겠지, 어떻게 해도 천국에는 가겠지’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꼭 버려야 할 악한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직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여전히 광야에 있습니다. 여전히 영원한 약속의 땅인 하늘나라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가는 동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구원을 더욱 더 영광스럽고 빛나는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삶의 길을 가는 동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때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이 힘에 겨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순례길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시비가 생겨나지 않도록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이 구원이라는 원석을 더욱 더 빛나는 것으로 다듬어 갈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원망과 시비가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과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을 더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의 순종으로 가장 값진 보석으로 빛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완성은 우리의 일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능력있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만약 구원을 더욱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일이 우리에게만 맡겨진 일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려고 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이루는 일에 실패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구원이라는 은혜를 더 영광스럽게 하려면 우리의 믿음의 순종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온전하게 완성시키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만 그 일을 맡겨놓지 않으시고 그 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가장 능력있게 이루어 가시고, 그 분의 완전한 지혜로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면서도 결코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완전하고 연약한 우리를 생각하면 두렵지만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과 불만이 생겨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 됩니다. 보석을 다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구원이 더 영광스럽게 빛나도록 애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가장 능력있게, 가장 효과적으로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순종해 나가며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그 분이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기쁨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이루어 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때에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항상 삶 속에서 보석을 다듬는 세공자의 심정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다듬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 구원이 나의 삶을 통해 영광스러워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쁨의 길로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