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1101to09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2012 대강절2).pdf
설교본문 : 이사야 11장 1-9절
이제 대강절 첫 주간이 끝나고 둘째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하셨습니까? 사실 저도 대강절을 이렇게 지키는 것이 처음인데요. 이렇게 해 보니 정말 유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거의 한 달동안 의도적으로 우리 주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또 주님의 은혜와 자신의 거룩과 정결함에 대해서 더 많이 기도하게 되니 성탄절 이브의 마음을 한달 내내 지닐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 것 같습니다. 새벽예배 시간에는 그냥 하던대로 계속 요한복음을 설교할까 하다가 나눠드리는 묵상자료집의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고 또 그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모이는 성도들과만이라도 함께 주님을 기대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어 보고 싶어서 갑자기 그렇게 정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더 많이 나오셔서 함께 하셨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아서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 혹시 나오실 수 있는 분들은 이 기간만큼이라도 새벽시간을 함께 보냈으면 어떨까 하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지난 주일에는 이사야서 9장 1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임마누엘이신 한 아기에 대해서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기를 우리의 메시야, 우리의 왕으로 보내셨습니다. 그 아기만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고, 욕심이나 어그러짐이 없이 온전히 우리만 위하시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믿음을 통해서 믿는 자들을 위한 선하시고 온전하신 왕으로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대를 막론하고 정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우리 삶을 왕으로 다스려주시는 그 풍성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강절을 지내면서 꼭 회복해야 할 것들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하고 온전한 왕이 되시며 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실 수 있다는 믿음 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혹은 우리의 능력이나 소유를 의지하면서 살아왔다면 이번 대강절에는 이런 믿음없는 모습들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정말 이 땅에서도 하늘의 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그런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고 찾는 자에게 분명히 이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 주님을 유일한 왕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히 풍성해지고 능력있어 집니다. 이 세상의 묶인 것들로 부터도 큰 자유를 얻을 수 있구요. 이런 것들만 해도 엄청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이 땅위에서 누리는 복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우리가 아무런 부족도 없고, 아무런 아픔도 없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믿음으로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 내가 괜찮다고 해서 온 세상이 괜찮은 것도 아니구요.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하게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많고, 우리가 다이어트 걱정하는 그 순간에도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어가는 어린아이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힘이 없어서 힘있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어느 부분에선가는 마음 아플 수 밖에 없고, 어느 부분에선가는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나오고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기 좋아지고 행복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결코 이 땅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이 세상에서는 진정으로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파하고 슬퍼하고 신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살아도 그런 세상 속에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이구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예수님께서 완전히 온 세상의 주인이 되셔서 이 세상을 완전히 다스리시는 그 날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진짜 그런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묵상했던 말씀이 주로 우리의 왕이 되시는 우리 주님 자신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그런 주님, 그런 왕이 완전히 다스리시는 나라, 온전히 그 분의 다스리심 속에 있게될 그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나라가 얼마나 좋고 또 좋은 나라인지 그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대강절에 이런 귀하고 아름다운 말씀을 통해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그 분 손에서 온전해질 그 나라를 마음 속에 품게 되는 일 또한 이 대강절의 빼놓을 수 없는 은혜일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처음 이 말씀을 제대로 만난 그 순간에는 저는 정말 기뻐서 눈물을 흘릴 뻔 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나라가 있다니! 그리고 이런 나라가 언젠가는 분명히 온다니! 게다가 내가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니! 저는 이 말씀이 약속하는 그 나라를 마음을 다해서 소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때 이후로 이 말씀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우리 주님이 만드실 나라가 이 정도가 아니라면 저는 그 나라를 소망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 나라를 기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나라가 아니라면 정도의 차이일 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나라나 그 나라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와 여러분이 기다리는 나라, 우리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그 나라는 오늘 말씀이 이야기 해주는 나라와 글자 그대로 똑같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설렐정도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그저 상징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 나라가 제일 좋은 나라가 되고, 완전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우리가 소망하는 그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그 나라의 왕이 되실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으로 모든 것을 가장 정확하고 바르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장 완벽한 계획을 세우실 것이며 그것을 이루어 나갈 적절하고 완전한 능력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크고 영원한 즐거움이시니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일을 위해 그 분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쏟아부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 나라의 왕은 결코 무엇이든 겉으로 보이는 대로, 그저 귀에 들리는 대로는 판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심지어 그 정직하고 공의로운 판단은 가난한 자들이라고 편들어 주지는 않을 정도로 완전히 의로울 것입니다. 그 분은 공의와 정직으로 옷을 입으셨다고 할만큼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대로만 다스리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음 속에 그려 보십시오. 이런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되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고 평안하겠습니까? 모든 일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완전하고 선하신 사랑의 왕이신 예수님의 정의롭고 공평한 다스리심 속에 있는 그런 나라는 얼마나 놀라운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찬 나라가 되겠습니까? 계속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지 않는 악인으로 남아있지 않는 한, 거기서 그 분의 날개 아래서 살게 될 사람들은 영원히 행복해 하고, 한없이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거기 살게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누가 그 좋은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되죠?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입니다. 믿으십니까? 그 나라가 가져다 줄 영원한 행복과 평안, 기쁨과 만족은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속에 그 나라를 다시 떠올리고 또 다시 그려넣는 그 일보다 우리 영혼을 더 기쁘게 하고 소망넘치게 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으며, 이런 나라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이 나라를 알고 있고, 또 그 나라에 가게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일 스위스 여행만 떠난다고 해도 밤 잠을 설칠텐데 말이죠.
그런데, 그 나라는 사람들만 행복하고 사람들에게만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들, 커다란 짐승부터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들 또한 똑같은 행복과 평안 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리는 양을 음식으로 여기는 놈들입니다. 양만 보면 침을 흘리는 놈들이죠. 그런데 그 나라가 되면 이리가 슬쩍 양에게로 다가와 함께 살자고, 나도 너희들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치근댈 것입니다. 양이 풀을 찾아 움직이면 이리도 그리로 또 옮겨와 또 비비적 거리게 될 것입니다. 또 표범은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것입니다. 자기 뱃속에 집어넣고 이빨쑤시며 드러눕지 않고 나란히 함께 누워서 뒹굴게 될 것입니다. 어린 염소가 오른쪽으로 구르면 표범도 오른쪽으로 구르고, 왼쪽으로 구르면 왼쪽으로 구르고... 표범은 생전 놀아보지 못한 어린 친구와 생전 해보지 못한 놀이를 즐기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표범의 고귀한 자존심을 다 팽개치고 말입니다. 또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은 어린 아이가 가자는 대로 이리 저리 끌려다닐 것입니다. 모든 어린 것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로 어울려 지낼 것이며, 모든 짐승들이 사람에게 순종하는 그런 태초의 풍경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될 것입니다. 암소는 암콤의 집에 초대받아 함께 식사를 합니다. 새끼를 낳아놓고 한껏 예민해져 그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못하게 하던 어미 곰이 암소를 불러들여 한 밥통에서 밥을 나누어 먹을 것입니다. 어미들 뿐만이 아닙니다. 어미들이 그러니 새끼까지 덩달아 그렇게 합니다. 송아지와 새끼곰이 함께 엎드려 놉니다. 그 다음은 정말 말도 안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정말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말되 안되는 소리죠. 풀을 뜯어먹게 될 놈이 개가 아니라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사자가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셔서 생전 처음듣는 이상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으시거든 ‘아, 이게 그 소리구나. 이게 바로 사자가 풀 뜯어먹는 소리구나’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천하의 독사가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을 무서워하게 될 것입니다. 독사가 뭘 제일 무서워하게 될까요? 땅꾼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젖먹는 어린아이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나라에서 요만한 애들은 독사굴만 보면 손을 집어넣고 주물럭 거리게 될테니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독사들이 아이들만 보면 실실 웃으면서 뒷걸음을 치게 될 것입니다. 안된다구요? 뱀은 뒤로 가지 못한다구요? 아닙니다. 그 때가 되면, 뱀은 다시 다리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뱀도 모든 저주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니까요.
우리는 양육강식이 당연한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연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고, 그게 철칙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진화론이 대세가 된 이후에는, 인간도 다른 짐승들과 다름 없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믿게 된 이후에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양육강식은 너무나 당연한 질서고 오히려 어겨서는 안되는 철칙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약육강식이 자연과 이 세상의 당연한 질서인가요? 강한 놈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고 사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강한 놈의 권리이고 약한 것들의 운명인가요? 그래서 나도 무조건 강해져서 강한 자의 권리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타락한 질서, 망가져 버린 질서입니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덴이 회복되면 그 모든 것은 다 제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저런 풍경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힘들지만 여기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연습을 해 두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안 그러면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갑자기 변화된 환경에 적응이 안되서 천국을 지옥처럼 여기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계속 사자처럼 살고 독사처럼 살고, 힘센 곰처럼 살다가는 그 나라에 가서도 나도 모르게 여기서 처럼 살려고 하다가 왕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우리는 하늘나라 하면,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부족함도 없고 배고픔도 없고... 그러나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없기만 한 나라가 아닙니다. 없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지만 있어야 할 것은 있는 정도가 아니라 흘러넘칠 정도로 많은 곳입니다. 웃음 한가지, 기쁨 한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런 나라에 산다면 우리 얼굴에서 웃음이 가실 날이 있겠습니까? 매일 매일 사자가 풀뜯어 먹는 소리를 듣고 또 독사가 젖먹이만 보면 슬슬 뒷걸음 치는 모습을 보면서 사는데, 표범이 길거리에서 이리 딩굴 저리 딩굴하면서 새끼 염소와 깔깔대는 모습을 보며 사는데, 매일 매일 그런 즐거운 코미디를 보게 될텐데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 웃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곳에 가면 웃게 될 것입니다. 아주 실컷 배가 아프고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그렇게 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비록 여기 이 땅 위에 산다고 해도 하늘나라의 그 유쾌하고 즐거운 광경을 마음에 그릴 수만 있다면, 여기서도 실컷 웃게 될 것입니다. 아파도 웃고, 없어도 웃고, 부족해도 웃고, 힘들어도 웃고, 그렇게 그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그 나라의 그 유쾌하고 행복한 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시름과 괴로움을 잊고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슬픔도 많고, 아픔도 많고, 괴로움도 많고, 부족함도 많은 여기 이 땅 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이 곳이 전부입니까? 여기가 우리가 아는, 우리가 살 수 있는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저런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영원히 즐거운 나라, 영원히 유쾌한 나라, 그래서 가장 큰 소리로 영원히 아무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거기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영주권이 아니라 시민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 오시는 날,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예수믿는 우리는 거기 그 나라의 참된 국민이 되어 해같이 빛나는 우리 주님과 참 기쁘고 즐거운 나날을 영원히 영원히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아름다운 나라를 기대하지 못하고, 이런 완전한 나라를 영혼 속에 그리지 못하고,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보다도 덜 사랑하는 그런 분들을 보면 너무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 땅만 바라보느라, 이 땅만 생각하느라 현실보다 더 확실하고 확고한 그 나라, 여기 이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이 즐겁고 유쾌한 그 나라, 그 무엇을 보아도, 그 누구를 만나도 기쁘고 만족스러운 그 나라를 볼 줄 모르는 분들을 보면 정말 정말 안타깝습니다. 저는요, 마음 속에 하늘나라만 그리면 자다가도 웃음이 나옵니다. 슬픔도 사라지구요. 소망이 가득찹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확실해지게 됩니다. 살아갈 의욕이 팍팍 생겨납니다.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그게 우리의 본향, 약속된 우리 집입니다. 생각만 해도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하늘나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완전한 우리의 고향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선배들이 톱에 썰리면서도 웃을 수 있게 했던,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드릴 수 있게 했던, 그 좋고 능력있는 나라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씀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신데렐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왕족이면서도 이 땅의 걸인으로 살아가고, 하늘의 기쁨을 지녔으면서도 이 땅의 슬픔에 빠져 삽니다. 그러지 않아도, 정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구요. 그래서 힘이 없구요. 그래서 능력이 없습니다. 믿는게 정말 무엇이 유익한지를 잘 모릅니다. 저는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마음에서 흐르는 감사의 눈물, 기쁨의 눈물을 참았는지 모릅니다. 또 몇 번이나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옥한흠 목사님에게서 그 나라의 소망과 기쁨을 전해 받았던 것처럼 저도 여러분에게 그런 귀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저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하늘을 알고 보고 느낄 수 있는 그 은혜를 달라고 몇 번이고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나라 때문에 살고 그 나라를 위해 살고 그 나라를 기뻐하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여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기 이 곳, 이 땅 밖에 모른다면, 땅 때문에 살고 땅 때문에 기뻐하지 못하고서 산다면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 하늘나라를 생생히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그래서 여기 이 곳보다 그 곳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 때문에 여기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기쁜 사람들, 그 나라의 그 유쾌한 피조물들.... 그들 모두가 온전한 조화와 평화 속에서 만들어 내는 그 아름다운 풍경, 그 완전한 풍경,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는 그 풍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려지지 않는다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려지기는 하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르시겠다면, 오늘부터 궁금해 하십시오. 그게 얼마나 좋길래 저기 저 장목사는 그 나라 때문에 저렇게 이상하게 되었는지 그것이라도 궁금하게 여기시고 그래서 그 나라에 관심을 좀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붙들고 그 나라가 정말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 될 때까지 묵상하십시오. 그 나라에 빨리 가고 싶어 안달이 날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도 그 기쁨을 알게 해 달라고, 나에게도 그 소망을 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 마음 속에도 지워지지 않는 하늘나라의 그림이 그려지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 꼭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 나라의 기쁨으로 여러분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성탄절도 가까이 오고 하니 여러분에게 특별한 선물 하나를 드리려고 합니다. 노래선물인데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 중의 하나입니다. 하덕규 집사님이시라고 예전에는 대중가요를 부르시다가 예수를 믿고서는 기독교적인 노래를 많이 지으시고 또 부르시는 분이 계신데요. 그 분이 지은 노래입니다. ‘풍경’이라는 노래인데요. 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 노래만큼 하늘나라를 정확하게 표현한 노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꼭 불러드리고 싶은데, 혹시 한 분이라도 원치 않으시면 그냥 가사만 읽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여러분께 불러드려도 좋겠습니까? 그래도 이해해 주시고 욕하지 않으시겠죠? 여러분도 이 풍경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하고 또 사랑하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 노래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사를 읽어드리고, 제가 한 번 불러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함께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풍 경.. 풍 경
가사도 멜로디도 아주 간단합니다. 먼저 제가 불러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노래부르기)
(함께 부르기)
이 대강절, 우리 주님 다시오심을 고대하는 이 계절에, 우리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그 아름답고 복된 나라에 대한 생생한 꿈이 우리 모두의 영혼 속에 되살아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주님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너무 너무 좋은 하늘나라를 가져오시고 또 그 나라의 왕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그 나라가 그려지는 은혜를 주시고, 그 나라를 사모하는 은혜를 주시고, 그 나라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이 회복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