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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2.14. 새벽예배 -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대강절 열 두번째날)


사0710to25 -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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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이사야 7장 11-25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근거가 되는 아주 은혜로운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거나 묵상할 때마다 마치 추운 날 모닥불 곁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포근함과 평안함이 느껴집니다. 겨울에 외롭고 쓸쓸해지기 쉬운데 얼마나 계절에 꼭 필요한 은혜를 전해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지금부터 2700년이나 전에 주어진 이 언약이 지금은 완전히 이루어져 우리가 이 약속을 확신과 기쁨을 가지고 바라보며 또 그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게 정말 놀랍도록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말씀만 보면 이 말씀은 정말 은혜로운 상황 속에서, 아마도 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허락하신 약속인 것 같습니다. 대개의 중요하고 은혜로운 약속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에 대한 선물로 주어질 때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사실 오늘 말씀이 처음 주어진 상황을 보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그런 상황에서, 그런 사람에게 이런 중요한 약속을 주셨는지 정말 의아해질 정도였습니다. 


아하스 왕 때에 아람 왕인 르신 왕과 이스라엘의 배가 왕이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유다백성의 마음은 광풍에 흔들리는 수풀처럼 공포에 질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불러 아들인 스알야숩과 함께 아하스를 찾아가 아하스를 안심시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의 동맹군이 대단해 보여도 그저 연기나는 부지깽이처럼 별 볼일 없을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만약 아하스가 어떤 징조라도 구한다면 그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하늘 높은 곳에서의 징조를 구하면 그 징조를, 그리고 바다 깊은 곳에서의 징조를 구하면 그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믿음의 고백같습니다.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으니 징조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하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실상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하스는 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였을까요?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붙들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그가 이런 여유를 부렸던 것은 아하스는 이미 앗시리아의 왕인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해 놓았고, 그것을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까지도 거절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큰 불신앙입니다. 또 얼마나 큰 위선입니까?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을 대놓고 무시했으니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사야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악하고 교만한 아하스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 어찌보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약속을 전해줍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구해주실 것이라는 징조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구원에 대한 징조와 약속을 모두 담고 있는 그런 중요한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그런 악한 왕에게, 그것도 징조같은 것 다 필요없고,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거들먹 거리면서 최악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사야가 아하스를 찾아갈 때, 아하스 편에서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랬더라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하스는 이미 앗시리아 왕에게 원군을 청해놓은 상태였고, 그래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수모를 당하시면서도 아하스에게 받기 싫다는 징조를 기어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주시고 다시 유다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하스의 영적인 상태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어진 일방적으로 주신 약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누구때문에, 그리고 왜 주신 것일까요? 


첫째는 이 약속은 아하스 때문이 아니라 다윗 때문에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다윗의 나라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케 해 주시고, 사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은총을 아주 거두어 들이는 일은 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자손들이 악을 행하면 징계는 하시겠지만 계속 다윗 왕조는 이어지게 해 주시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또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건이 있는 언약이고 하나는 조건이 없는 언약입니다. 앞의 것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우리에게 주어질 복들에 대한 약속이고, 뒤의 것은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중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약속은 바로 뒤쪽에 속하는 약속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많은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며, 또 불순종하는지 모릅니다. 아하스 왕처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해서 살아가며, 또 현실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버림을 받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부족하나마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들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 어두운 중세를 지나면서도 하나님은 교회를 지켜오셨습니다. 그 어두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지켜주시고 또 자녀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즘의 우리나라 교회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타락했습니까? 얼마나 세속화되어 있습니까? 오히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분별력 없이 저지르는 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교회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와 그런 지도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구원하고 계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덕분입니까? 이미 주신약속 때문입니다. 조건없이 이루시겠다고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 때문에 엉망진창인 아하스를 도우셨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맺으신 우리를 위한 구원의 약속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둘째, 그래서 이 약속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약속이었습니다. 상황도 최악입니다. 지도자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최악입니다. 믿고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의지할 대상이 되어주시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인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영원한 현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약속이 아니라 그저 사실에 대한 설명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느끼든지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 말입니다. 


우리 민족은 대부분의 역사를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럴 뿐만이 아니라 온갖 잡신들을 섬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두신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성도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느지막하게 예수를 믿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그 때까지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버려두셨던 것일까요?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전혀 몰랐을 때에도, 우리 개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임마누엘’이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교회가 있고,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2700년전에 아하스에게 주셨던 약속을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임마누엘되심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임마누엘이 되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는 임마누엘이셨고 또 임마누엘이심을 증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를 의지했습니다. 충분히 의지할만한 나라였죠. 그러나, 그 앗시리아는 유다의 형제나라인 이스라엘을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유다도 공격해 왔습니다. 


우리도 아하스처럼 항상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을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시험을 받습니다. 손쉽게 붙잡을 수 있고 더 확실해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것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지 임마누엘이 되어줄 수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을 주시면서까지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던 우리 하나님만이 진정한 임마누엘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다.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어주실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묵상하는 이 계절에 임마누엘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을만한 것이 없어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만한 것이 있어도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회복하시고 든든하게 하셔서 영원히 임마누엘의 하나님과 더불어 사시는 복을 꼭 붙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