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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2.23. 주일오전 -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기에 이르면(대강절 네째주)


사5310to12 -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기에 이르면(2012 대강절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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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이사야 53장 10-12절


오늘은 대강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 예수님의 첫번째 오심을 기념하고 또 두번째 그리고 마지막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절기는 복음을 위한 절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주님의 탄생과 더불어 그 성취가 시작되고 재림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강절 동안은 이 복음에 대한 소망과 믿음, 그리고 감격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바로 그런 절기로 귀하게 지내라고 해마다 대강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올해 대강절도 다 지나가고 있는데, 올해 여러분의 대강절은 좀 어떠셨습니까? 조금이라도 더 우리 주님을 생각하고, 또 믿음과 소망을 회복하는 그런 절기로 보내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절기를 뜻깊고 유익하게 보내신 것입니다. 남은 이틀도 잘 보내시고 함께 영혼 가득히 기쁨과 은혜가 넘치는 그런 성탄절을 함께 맞이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럴분, 사람이 진짜 뛸듯이 기뻐하게 될 때가 어떤 때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꼭 해결해야하지만 결코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그래서 내가 그 일의 혜택을 고스란히 누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복음이 복음인 이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 복음이 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가장 절실하지만 해결불가능한 죄라는 문제를 우리대신 모든 대가를 치르시고 해결해 주셨고 그 결과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분이 우리의 지옥을 가져가시고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허락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진짜 복음이고,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가장 크게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이 받는 우리 쪽에서는 정말 말할 수 없이 좋은 소식이지만 이 복음이 우리에게 복음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그 엄청난 대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두 분의 사랑 앞에 철없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을 것 같은 감정을 갖게 됩니다. 아들을 비천하고 낮은 삶과 죽음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대로 하늘영광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비천하게 사시다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아 순종하신 성자 하나님. 우리가 복음을 복음으로 듣게 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복음으로 인해 구원과 하늘나라를 허락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 분의 우리들을 향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헌신 덕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말씀이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구절들이었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시고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요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게 해 주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이 아닌 종으로 낮고 비천하게 나셔서 낮고 비천하게 사시다가 우리의 불순종과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목숨을 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을 대신했고, 그 분의 순종이 우리의 불순종을 대신했으며, 그 분의 낮은 삶이 우리의 교만한 삶을 대신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셨고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은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이 두 분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많은 것을 비우고 내려놓아야만 하는 그런 과정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의 그 모든 일들을 마치셨을 때, 그 일은 거꾸로 두 분께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낮은 삶과 죽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가득차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낮고 고통스러운 삶과 그 비천한 죽음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거나 혹은 어쩔 수 없이 당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온갖 병으로 시달리는 연약한 삶을 사시고, 궁핍한 삶을 사셨으며, 또 매맞아 찢기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셨던 것은 결코 약자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고 그렇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원하심이 꼬마아이가 엄마 손에 있는 선물을 원하는 것처럼 그런 들뜨고 기쁜 원함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상함을 받는 것을 원했으며, 그래서 예수님께서 질고를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계획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신 것 또한 억지가 아니었고, 그 기쁘신 하나님의 계획을 기쁘게 이루어 드리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기쁜 순종이었습니다. 비록 그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런 고통과 아픔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기에 이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속건제로 내놓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죄가 하나님께 입힌 갚을 길 없는 손해를 갚기 위해 대신 예수님의 목숨이 내놓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지막 계획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가장 고통스러운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가지 못하시면 그의 낮고 천한 태어나심과 비천한 삶, 그리고 고통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까지 가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우리의 갚을 수 없는 빚을 갚는데 내놓으셨습니다. 여기까지는 너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여기서 부터는 즐겁고 복된 일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이루어 드린 예수님에게 큰 기쁨을 상으로 주셨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이 땅 위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남겨 놓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세대에 세대를 이어 믿음을 이어가고 순종하는 삶을 지켜가는 즐겁고 영광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부모들에게는 자신을 닮은 자녀들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건강하고 바르게 잘 살아주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바로 부모들이 받는 최고의 상이겠죠. 예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득세하는 세상, 그리고 그러한 사탄을 닮아가며 점점 더 망가져가는 하나님의 형상들만이 늘어갔던 그 곳에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고 자신의 형상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어가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는 일은 우리 주님께 얼마나 만족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그 모든 것이 자신이 땅에다 가져다 준 죄 용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 덕분임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에게 그 일은 얼마나 더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받으실 상은 이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누어 주실 것입니다. 사탄으로부터 되찾은 나라의 영원한 왕이 되는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그 나라를 되찾고, 그 나라의 백성들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으며, 가장 악한 범죄자 취급을 받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예수님, 거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자신의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아끼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나라까지 아끼지 않고 기쁘게 내주실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계획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계획이기도 했습니다. 그 복음이 이 땅 위에 온전히 성취하는 날이 되면 두 분의 영광과 기쁨도 가장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는 것,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시는 것.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두 분을 위한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계획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통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부분이 이루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모두를 만족스럽게 하고, 가장 기쁘게 합니다. 우리들을 기쁘게 하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우리들을 만족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족하게 합니다. 태초에 우리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계획은 결국 하나님과 우리들 모두를 가장 기쁘고 만족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가 됩니다. 그런데, 그 중간에는 당신의 삶과 죽음을 우리를 위한 속건제로 하나님께 드렸던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했던 예수님의 대속적인 삶과 죽음이 모두를 가장 크고 완전한 기쁨 가운데로 인도해 주었던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제가 아는 목사님의 교회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들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흔한 일이어서 덤덤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이야기를 또 다시 전해듣는 저의 마음은 굉장히 착잡했습니다.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권사님 한 분이 그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출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권사님이 아시는 또 다른 성도님을 인도해 왔구요. 그런데, 정작 먼저 오신 권사님은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으시고 다른 교회로 가셨고 그 분을 따라 오셨던 성도만 그 교회에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고보니 그 권사님이 그 성도님께 이렇게 아주 당연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다 마음에 들지만 상가에 있는 교회여서 나는 그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다, 분명히 나중에 건축헌금 내야 할텐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너무 흔한 이야기인가요? 이제 이런 모습은 오히려 상식이 되어버렸나요?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런 모습들이 상식과 당연한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만 변해가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두들 받으려고만 하지 주려고는 하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날 성도들은 더 이상 성도들이 아니라 종교 소비자들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더 이상 의미있는 헌신이나 가치있는 섬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교회,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교회만을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갖출 것 다 갖춘 교회들은 미어 터지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도 그렇지만 교회도 더 이상 참된 기쁨과 만족이 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주는 이가 없으니 받는 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지 않으니 나도 받지 못하고 그러니 행복하고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다’라는 아주 유명한 기독교의 경구가 있습니다. 모든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참된 지혜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이 경구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최고의 지혜를 십자가라고,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자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천사도 그리고 사탄도 예측할 수 없었던 인간의 구원을 위한 최고의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속의 원리 그러니까 십자가의 지혜는 조금 더 크게 보면, 구원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장 행복해지고 또 모두가 가장 만족스러워지는 지혜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대속물로, 속건제로 우리를 대신해서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모든 유익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기쁨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우리의  평안과 만족도... 우리가 신앙 안에서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은 죄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네 것은 네가 챙기라고 말합니다. 내어주지 말고 빼앗으라고 말하며, 바로 거기에 행복과 만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어주라고, 나눠주라고,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또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 둘 중에서 맞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고 또 따라가야 할 지혜는 어떤 것일까요? 



십자가의 지혜는 단순한 희생의 원리일까요? 그저 포기하고 내려놓은 삶이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하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십자가의 지혜는 손해보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어리석고 바보같은 삶의 방식인 것 같습니다. 움켜쥐고 긁어 모으고 더 쌓아 놓아도 부족한 판에 희생하고 나누라고 말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이 그렇게 어리석기 때문에 더 큰 능력이 됩니다. 그렇게 바보같아 보이기 때문에 반대로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원리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지혜는 결코 다른 사람들만 행복하고 유익하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가장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 주는 가장 유익한 방법입니다. 


제가 이렇게 저의 삶을 생각해 보니, 세속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제가 자꾸 손해보는 방식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현실적이기 보다는 이상적인 선택을 하려는 저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저를 그런 삶으로 몰아가는 저의 과거의 경험이 그 뒤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 손해보는 선택을 했던 것은 단지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순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결코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당장은 불리했던 것이 나중에 가면 굉장히 유리한 조건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니 힘들기는 해도 자꾸 손해보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아주 복잡한 그물망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손해를 보았는데, 저기서 채워지구요, 여기서 선한 선택을 하느라 미움을 받고 오해를 받았는데, 저기서 인정을 받고 존중을 받습니다. 여기서 베풀었는데, 저기서 채워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여기서 내려놓고 손해보는 것보다는 저기서 얻게되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습니까? 준 것보다는 받은 것이 많아서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지금까지 더 많이 주면서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더 많이 얻었겠죠? 그래서 지금 더 풍성한 삶을 살고 있겠죠? 이것은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그물망이기 때문에, 그게 선이든 악이든 나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항상 열매가 씨앗보다는 많게 되어 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ㅏ. 


십자가의 원리, 대속적인 삶의 원리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넉넉하게 하는 실제적인 생활의 원리이며 지혜이기도 합니다. 다만, 얕은 지혜가 아니라 깊은 지혜이기 때문에, 움켜쥐는 지혜가 아니라 나눠주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 열매를 천천히 보여주는 지혜이기 때문에 선뜻 선택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당장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쥐어지는 열매가 없더라도 나의 섬김과 나의 내려놓은 덕분에 이 세상에 기뻐하고 행복해 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그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나중에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들은 보너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살면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억울하게 당하는 크고 작은 고통과 손해들도 얼마든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감당해 내는 오해와 핍박들도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이런 고난과 고통들은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의로운 고난과 손해들이 이런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이리 흐르고 저리 흘러서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의미있는 역할을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다 볼 수 없고, 또 이해할 수 없어서 그렇지 언젠가 내가 선택했던 그 손해보는 선택은 지금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유익을 주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에게도 가장 큰 영광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고, 또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고 물었던 이사야는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우리는 1절의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이 12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그 분은 이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셨지만,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없었고,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철저히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속에 뭍혀 계셨습니다. 사실 손해보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 그리고 남을 위해서 내려놓는 삶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이 이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생각,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나만 손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사람은 갚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갚아주십니다. 땅에서 얻는 것은 없을지 몰라도 하늘의 것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없어질 것들은 얻을 수 없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들은 영원히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칭찬과 주님의 기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낮게 오셔셔 낮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낮은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우리의 유익,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그러한 대속적인 삶과 죽음을 마다하셨다면 우리들 중 한 사람도 구원의 은혜와 삶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들을 알 수도, 누릴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기적이고 각박해져 가는 우리 주변과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기쁨과 풍성함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삶을 살고 또 누군가의 구원을 위한 도우미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대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흉내내서 조금은 더 손해보는 방식의 삶을 택하고, 조금 더 어리석은 방식의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의 한 조각을 누군가를 위한 속건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해만 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럽기만 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물론 손해도 있고 고통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아주실 좋은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땅에서도 그럴 것이고, 하늘에서는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씨를 뿌려야 수확이 있습니다.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가장 궁핍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가장 큰 어리석음 입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마지막 주일에 우리를 위한 속건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분에게서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우며, 또 풍성한 삶의 지혜를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장 눈에 보이는 지혜가 아니라 바로 그 지혜를 따르는 가장 풍성한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 지혜는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지혜이니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갚아주실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작은 것을 심어 큰 것을 거두시고, 좋은 것 심어 더 좋은 것 받으시며, 사라질 것을 심어 영원한 것을 거두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