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001to06 -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pdf
본문 : 요한복음 10장 1-6절
제가 목회를 하면서 살펴보니 성도들은 대개 바른 설교보다는 은혜로운 설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바르면서도 은혜롭게만 설교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제로 진리라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옳고 그름에 그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를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만약 은혜나 아니면 바른 것이냐 할 때는 바른 것에 우선권이 주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누구를 가르치든지 항상 해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회자만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도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목회자들도 소경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소경인 목회자가 있으니 틀림없이 목회자들 중에서도 소경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소경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본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지도하죠.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는 신앙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배워야만 하는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분별력입니다. 제가 성도들도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성도들은 적어도 누가 눈을 뜨고 있는 인도자인지, 누가 눈을 감고 있는 인도자인지는 스스로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런 분별력이 없다면 열심히 따라가다가 구덩이에 빠져버릴 수 있으니까요.
집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는데요. 시추라는 가장 흔한 종인데, 키우기는 참 좋습니다. 식성좋고 성격좋고 귀엽고... 그런데 한 가지 흠이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면 거의 아무나 따른다는 것입니다. 공원에 가서 풀어놓고 함께 산책을 하다보면 강아지가 안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둘러보면 저쪽에서 어떤 아주머니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얼릉 쫓아가서 다시 끌고 오기는 하지만 참 어이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무슨 강아지가 그렇게 지조가 없고 개념이 없는지 헛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만약 광야의 양이 만약 저희 집 강아지 같다면, 그 양은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워낙 양을 속여서 도둑질해 가려고 하는 도둑들이 많기 때문이죠. 영적으로 볼 때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해 가려는 도둑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잘못된 설교나 비성경적인 가르침들 뿐만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세상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등 우리 영혼을 도둑질 해가려는 도둑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도둑들과 목자를 구분해 내지 못한다면 영적으로는 완전히 망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도둑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는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만 잘 분별하고 조심하면 안전할 수가 있습니다. 그 도구란 바로 ‘목소리’입니다. 도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목소리를 사용해서 우리를 부르고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항상 어떤 ‘주장’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아니면 경험되는 것이든 그들의 ‘목소리’에 들어있는 주장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 주장을 잘 분별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안전할 수 있습니다. 진짜 목자가 오기까지 우리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주장들이 너무 너무 많고, 그래서 일일히 하나 하나 분별하고 걸러내기가 굉장히 힘들다는게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비슷 비슷한 가짜 중에 진짜가 딱 하나 섞여 있다면, 우리는 진짜를 골라내기 위해 그 모든 가짜들이 왜 가짜인지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 밖에 없는 진짜를 진짜로 알아볼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만 챙기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도둑질하려는 수많은 도둑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도둑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주장으로 우리를 꼬득이려고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누가 우리의 목자인지만 분별하고 그 목자만 따라가면 됩니다.
3절부터 5절까지를 보면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며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이 구절들을 가만히 보면 중심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목자나 혹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양들입니다. 목자가 서서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은 그 부르는 소리를 듣고 목자에게로 나옵니다. 목자는 앞서 가면서 목소리를 내어 양들을 인도합니다. 양들은 그 목자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양들은 그 사람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망칩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양입니다. 양의 분별력입니다. 때로 교묘한 도둑들은 목자가 양을 알듯이 양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혹 하는 것이죠. 왜 사람들이 점쟁이에게 혹하나요? 왜 이단에 빠지고, 세속적인 주장에 그렇게 쉽게 끌리나요? 그것은 그런 것들이 다 그럴 듯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것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목소리’입니다. 아무리 비슷해도,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들려도 목소리가 다르면 따르면 안됩니다. 그래서 양은 무엇보다도 목자의 목소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익숙해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아랍의 목자들은 자기 양들에게는 반복해서 똑같은 멜로디의 피리소리나 독특한 소리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장에서 풀을 뜯는 수많은 양들 중에서 자기 양을 골라낼 때, 피리를 불거나 목으로 이미 수없이 들려주었던 그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정신없이 풀을 뜯다가도 고개를 쳐들고 목자들을 향해 나온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어쩌면 여러분은 세세하게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에 익숙해 져서, 그 목소리에만 반응하고 쫓아갈 수 있는 분별력 만큼은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게 쉽지 않을지 몰라도 거기 여러분의 영적인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에 꼭 갖추셔야 합니다. 여러분, 저라고 다 맞을까요? 저라고 오류가 없을까요? 물론 제가 여러분의 영혼을 망하게 할만큼 여러분을 이상한 곳으로 인도하는 도둑이 되지는 않겠지만, 저도 틀릴 수가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틀리는 곳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는 여러분은 저를 따라오시면 안됩니다. 맞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알아보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은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이상하다 생각하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분별력은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목자의 소리’, ‘예수님의 음성’에 익숙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익숙함을 얻으려면 사실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래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또 어떤 것은 싫어하시는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요구는 반드시 하시지만 어떤 요구는 절대로 하지 않으시는지 이런 것들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들도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정직해야 하고, 또 우리의 겉사람보다는 속사람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음성은 정직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속사람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익숙해질 수 있고 그래서 분별될 수 있는 바른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부르는 것은 목자이지만, 그 부름이 목자의 부름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할 책임은 양들에게 있습니다. 수많은 거짓 목자들이 저마다 우리를 부르지만, 그 속에서 우리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그 음성만 따라가야 할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생각하시고 그 분은 우리의 겉사람이 아니라 영혼이 잘 되는 것에 가장 큰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누구를 통해 듣고 배우던 그런 기준으로 분별하셔서 정말 목자의 음성을 아는, 그래서 목자가 아닌 자의 주장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런 분별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