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2.27. 새벽예배 -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67)

   

요1007to16 - 나는 선한 목자라.pdf


20121227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10장 7-16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양의 우리 비유’는 사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가 마치 아주 친밀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 너무 생생하게 와 닿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당시 목자와 양의 관계는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에서 보는 것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목자와 양은 단순히 짐승과 그 짐승의 주인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거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비슷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목자들은 양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양들을 서로 구분할 수 있었고, 또 양들은 자기를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움직일 정도로 관계가 아주 친밀했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정말로 들려주고 싶어하시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알아들었지만 그 이야기의 진짜 이야기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말씀을 풀어주십니다. 7절부터 18절까지가 모두 그 설명인데요, 그 설명 또한 비유입니다. 요한복음의 비유들은 다른 복음서의 비유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른 복음서의 비유들은 주로 하늘나라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면, 요한복음의 비유는 그 중심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비유를 읽을 때는 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 하시는가를 찾아내면 그 중심이 되는 메세지를 찾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첫째로 예수님을 양의 문이라고 표현합니다. 양의 문이란 돌로 만든 양 우리에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출입구를 말하는데요.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목자들은 그 출입구를 나뭇가지 같은 것으로 막아놓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밤새도록 그 울타리의 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의 문이기 때문에 목자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목자가 아닐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양은 그 사람들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양들은 양의 문이면서 동시에 목자인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에 드나들어야 합니다. 그의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아서 말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고 또 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뜻이 아니라 참된 신앙과 영적인 풍성함은 온통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일컬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그 분이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유일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한가운데에는 항상 예수님께서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믿음이 정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인지 그것을 잘 챙겨야 하고 또 내 믿음을 온전케 해 주시는 분 또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꼭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만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는지 또 나의 삶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풍성하고 온전하다고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진실로 목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항상 구원의 확신 가운데 기뻐할 것이고 또 영혼의 풍성함으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내가 우리 예수님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금석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즐거움과 영혼의 만족이 부족하게 여겨진다면 ‘아, 내가 지금 예수님을 꼭 붙들지 못하고 있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선한 목자에 대한 주님의 설명은 처음부터 충격적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목자들은 정말 자신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맹수들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런 목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좋은 목자라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한 이야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삯군, 그러니까 양도 제 양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저 품삯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을 돌보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험이 닥치면 자기 몸부터 챙깁니다. 양떼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 버립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목자를 욕하거나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결국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세상에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목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 주님이 얼마나 선하고 좋은 우리의 참 목자이신지를 다시 기억하며, 이미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더 온전히 하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를 위해서 존귀한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던 지극히 선하신 우리의 목자가 계십니다. 바로 이 말씀을 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따라가야 할까요? 누구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 밖에 또 다른 답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신뢰가 흔들릴 때마다 우리 주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가장 선한 목자이심을 완전하게 증명해 보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과 그 분이 돌보시는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엄청난 사실을 전해줍니다. 여러분, 우리와 예수님 사이는 얼마나 친밀할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성경이 어떤 관계 안에서 상대방을 안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주 친밀하고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안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14절과 15절은 그 앎이 어느 정도인지, 그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이 돌보시는 양인 우리가 목자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는 것같이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양이라면 그렇게 안다고 말씀하고 계시며, 그래서 목자되신 예수님은 그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러한 앎 때문에, 그리고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시듯이 아십니다. 이건 완전히 아신다는 뜻이고 완전히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알고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알듯이 우리도 주님을 알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주님의 관계가 그렇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고 인격적인 것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만 우리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을 그만큼 알고 그만큼 사랑하는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신앙이 성숙하는 것을 철이 드는 것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신아이 철이 드는 것은 결국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가 철이 드는 것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철이 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반응하면서 부터, 그 사랑에 설복되어서 부모를 사랑하면서부터 인 것같습니다. 신앙의 성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설복되고 그래서 그 분을 진실로 깊게 사랑하기 시작할 때, 신앙은 비로소 철이 든 성숙한 신앙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주님이 우리를 알듯이 우리도 주님을 안다고 하신 말씀 속에는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듯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그런 소원이 담겨 있고, 주님은 그것을 내다보시면서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참 목자가 되어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잘 알고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양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 주님을 우리 신앙의 중심으로 놓고, 그 분만을 신뢰하며 살아가려고 애써야 하며, 그 분이 우리를 알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깊고 충만하게 우리 주님을 사랑하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우리 주님을 더 알고 또 더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님을 정말 잘 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해서 주님을 더 많이 알아가시고 더 의지하시고 또 더 사랑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우리를 향한 이 깊고 풍성한 사랑 속에서 날마다 주님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되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