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마가복음 2장 13-17절
가끔 교회에는 술을 거나하게 드시고 교회를 찾아오시는 분들이 들어오실 때가 있습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도 가끔 그런 분들이 계셨는데요. 그 교회에서는 그런 분들을 예배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주 정중하게 부탁드리기는 하지만 예배실에 들어오시면 예배실 밖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주 순순히 따르시지만 어떤 분들은 소리를 지르기도 하시고 화를 내고 교회를 나가버리기도 합니다. 여러분, 예배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 거룩함은 지켜져야 하구요. 또 현실적으로 예배를 드리러 오신 분들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면 술을 드시고 교회에 오시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찾아오신 분들이 그렇게 쫓겨나고 또 화를 내면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또 개인적인 고민에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과연 예배의 거룩함, 성도의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그 거룩함은 그저 지켜지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가? 정상적으로 예배드리러 오신 분들의 예배에 대한 권리를 지키는 것이 그래도 술이라도 드시고서 용기를 내어 교회에 찾아오신 분들을 배제하고 또 그렇게 불쾌하게 해서 교회에서 발걸음을 돌이키게 할만큼 중요한 일인가? 목회자로서 또 한 사람의 성도로서 이런 저런 생각에 한참을 답없는 고민에 빠지곤 했습니다. 어디다가 가치판단의 기준을 두어야할지 너무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만약 어느 날 여러분이 길을 지나가다가 제가 어떤 사람하고 술집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것을 그것을 평범한 일로 보아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저를 철석같이 믿는다면, 그런 모습을 보고 ‘무슨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이해해 주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러분에게 ‘목회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술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라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다면 저를 예전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시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저를 보실 때마다 ‘술집에 간 목사’라고 생각하실 것이고, 그래서 점점 더 좋지 않은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기가 쉬울 것입니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어떤 생각이 한 번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그 고정관념을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이유여하를 따지지 않고 그저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옳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일을 보고 있었던 세리 레위를 부르시는 일과 그 일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도 여느 날처럼 똑같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세리 레위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정말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만나러 가겠다는 통보나 가서 너를 내 제자로 삼겠으니 마음에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것같은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우연히 지나가시다가 눈에 띤 노점상에서 본 김에 군고구마 한 봉지 사가듯이 그렇게 레위를 부르셨습니다. 전에도 제자들을 그렇게 부르시더니 이번에도 똑같이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를 부르는 예수님도 그렇지만 그렇게 부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뭐 길게 설득한 것도 아니고 된다 안된다 실랑이를 벌인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나를 따르라”고 하시자 그냥 그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이 일의 배경을 알면 이 일은 더더욱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15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당시 세리는 죄인 중의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 중의 한 부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정식 세금공무원은 아니고 그저 말단 세금징수원이었습니다. 당시 이런 세리들이 그런 취급을 받았던 것은 모두 당사자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면서도 로마의 관리가 되어 동족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과도한 세금을 거둬드렸고 그 일로 재산을 모았던 그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부정직함의 대명사였고 나아가서 매국노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제자로 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리를 자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레위는 그 부름을 받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리의 경우, 이런 부름에 이렇게 즉각적으로 따른다는 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어부들이야 나중에도 다시 어부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세리는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만두고 나면 다시는 그 자리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레위는 자신의 생계와 편안한 삶을 위해서 어찌보면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모두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매국노가 되었고, 가장 악한 죄인들 중 한 사람,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내놓은 인생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레위는 그렇게 할 수 없는 모든 이유와 장애물들을 마치 옷에 붙은 검불 털어내듯이 툴툴 털어내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부르신 것도 그렇고 그 부름을 받아들인 것도 그렇고 참으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레위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기념으로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대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레위의 친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친구래 봤자 레위와 똑같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죠. 그러니, 이 모임은 정말 혐오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모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상종해서는 안되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있는 것만으도 충분히 이해하기가 힘든데, 게다가 함께 식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바리새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인지라 율법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규례와 전통들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죄인과의 교제와 식사는 그들이 율법적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강하게 금지하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넘어갈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아주 불만스럽게 묻습니다. “왜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이해하고 또 수긍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정결하게 살아가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큰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함과 정결함이란 절대로 깨지고 더럽혀지면 안되는 얇은 사기그릇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내려고만 했고, 그것을 더럽히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물건이나 음식은 물론이고 그것이 사람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될 때는, 사람마저도 사람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럽게 여기고 멸시하며 자신들의 울타리에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너무나 잘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니 세리와 죄인들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자신을 더럽히고 있는 예수님마저도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오해였고 또 판단이었습니다. 첫째로 이들은 예수님을 자기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아니 훨씬 더 낮은 수준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거룩함과 순결함이 깨질까봐 전전긍긍해야 하는 그런 수준으로 생각했고, 그런 주제에 죄인들하고나 어울리며 자신을 더럽히는 그런 사람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비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고 그래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은 지켜야만 지켜지는 것도 아니었고 부정한 것에 닿으면 부정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거룩 자체이시고 거룩의 원천이십니다. 여러분, 태평양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진다고 흔적이나 남습니까? 솟아 오르는 샘물에 구정물 한 방울 떨어뜨린다고 샘 근원이 오염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솟아나는 샘물은 절대로 그 근원이 오염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닿는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해 줄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죄와 아무리 자주 반복되는 죄를 가지고 그 분께 가더라도 다시 깨끗해지고 다시 정결해 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는 예수님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더러움도 그 분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 분께로 가면 죄는 모두 타 없어집니다. 깨끗하게 씻겨져 정결하게 됩니다.
둘째로 이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의사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자신의 거룩을 지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고치고 변화시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열병을 고치셨으며, 나병환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중풍병자도 고치셨죠. 정말 수많은 병자들이 참된 의사이신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짜로 고쳐주시기를 원하시는 병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신도 잘 알고 있고, 다른 사람도 잘 알고 있는 병자들, 그래서 스스로도 소외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도 열외인간으로 취급하는 그런 고칠 수 없는 병자들 말입니다. 그런 병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세리들이었습니다. 자타공인 죄인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자신이 원해서, 자신이 선택해서 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래서 자신을 가장 깊은 소외 속으로 몰아 넣었던 가장 심한 영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의사는 병자가 있는 곳에 있게 마련입니다. 병자와 함께 하고 그들을 진단하고 고쳐주려면 반드시 병자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의사는 병자들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갑니다. 찾아가서 그들이 병에 걸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또 치료해 줍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의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의사이신 예수님께서 정말로 고쳐주시고 싶어하셨던 질병은 육체의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질병, 그러니까 죄라는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을 반겨주시고 함께 기뻐해 주시고 그렇게 그들을 온전히 치료해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일한 영혼의 의사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몰랐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자 마자 예수님이 자기 영혼을 고칠 의사라는 사실을 알아 보았습니다. 이제 레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레위가 예수님이 부르시는 그 단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요?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도 너무 기뻐서 대연을 베풀었을까요? 바로 의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고칠 수 없었고, 또 고쳐주려고 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뿌리깊은 죄의 질병을 고쳐줄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의사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불치병 환자가 자기 병을 고쳐줄 단 한 명의 의사를 만났다고 생각한다면 마태의 행동과 기쁨은 오히려 너무 당연한 것이 되고, 마태의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는 오히려 너무 조촐한 만찬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에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세상에 의사가 필요 없을만큼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 죄를 용서받고 또 죄로 부터의 자유를 얻지 않아도 될만큼 거룩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영혼의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을만큼 건강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 분의 용서와 온전케 해 주시는 치료가 필요없을 정도로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죄인이고, 그래서 모두가 다 그 질병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해질 수 있고, 그래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은, 그리고 세리들을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저희 어머니는 지금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평생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타고난 건강도 그랬지만 항상 피곤하게 살 수 밖에 없어서 이런 저런 질병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반 의사가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런 점이 없지 않았구요. 그런데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몸이 좋지 않으면 스스로 진단도 하고 처방도 합니다. 병원에 다녀와서는 하루 이틀 약을 먹다가 약을 먹지 않습니다. 또 무리를 합니다. 왜 약을 먹지 않느냐고 하면 이만하면 됐다는 게 돌아오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 무리를 합니다. 정말 다 되었을까요? 어머니 판단대로 다 나은 것이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며칠 지나면 또 아픕니다. 제가 속이 터지겠습니까? 안터지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똑같은 대사를 반복합니다. “엄마가 의사야? 왜 약 안 먹어! 빨리 약 더 먹어! 제발 좀 쉬어!”하고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다행이죠. 그래도 아픈 것은 알고 인정하니까요. 그렇지만 아픈데, 정말 많이 아픈데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혹은 아픈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경우는 정말 심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도와줄 수도 없고, 고쳐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심각한 질병일수록 자각증상이라는 것이 늦게 찾아옵니다. 병이 있어도 여전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고, 조금 아프더라도 그러다 괜찮아지고 또 그러다 괜찮아집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러다가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질병 중에 가장 심각한 질병이 바로 죄라는 영혼의 질병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의 자각증상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다고 몸이 아픈 것도 아니구요.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길만한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서 살아갑니다.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야할 일들은 빼놓지 않고서 합니다. 그러니 자각증상이 없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본성까지 한 몫을 더하니 이 질병을 치료받기가 더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결코 예수님이 의사란 사실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병자라는 사실을 몰랐고 또 인정하기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죄인과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 말입니다. 세리들이 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죄인들이었다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줄 모르는 죄인이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한다는 것은 과히 유쾌한 일도 아니고 오히려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이라는, 죄라는 질병을 앓고 있는 병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큼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우리 영혼을 고치시는 예수님께로 인도해 주고, 우리에게 죄라는 질병이 치유되는 은혜와 자유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픈 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고, 또 그 죄가 남긴 상처와 아픔이 있다는 것 자체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며, 그래서 내 영혼의 의사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죄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우리 영혼의 의사되시는 예수님을 기쁘게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크고 치명적인 질병들을 치료받는 그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치료는 단 한 번에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렇게 잔치를 벌였지만 그가 제자다운 제자가 되는 것은 그 이후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긴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의 역사, 모든 성도들의 역사가 다 그러니까요. 이제 죄는 용서받고 또 그 죄의 커다란 상흔은 치료받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죄가 남긴 수많은 크고 작은 상처가 있고 환부가 있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죄로 기울기 쉬운 성향도 남아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야 하며, 평생동안 더 온전해지고 더 거룩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가 아직도 완전히 치료되지 않았고, 여전히 죄라는 질병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병자들임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께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의인은 더 이상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처럼 이미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잘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사랑하십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밖에 있는 양들도 사랑하십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들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들을 찾아헤매는 목자처럼,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때문에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 여인처럼 우리를 부르시고 또 찾으십니다. 하늘나라는 양 아흔 아홉마리의 나라가 아니라 백 마리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아홉 드라크마의 나라가 아니라 열 드라크마의 나라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가 백 마리가 될 때, 아홉 드라크마가 열 드라크마가 될 때 비로소 기뻐하는 잃어버린 자들과 죄인들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좋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복음이구요.
언젠가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선전글귀가 있었는데, 우리는 ‘죄인이라서 행복합니다’, ‘병자라서 행복합니다’라고 선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인이라서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병자라서 의사에게로 나아갔으니까요. 그래서 죄를 용서받고, 병이 치료되는 기쁨을 알고, 하늘나라가 얼마나 은혜로운 나라인지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우리 주님은 여전히 죄인을 반기십니다. 죄인이 자신에게 나아오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당신에게 온전히 치료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언제나 죄인을 부르고 계십니다. 죄인이 거룩하게 되게하시고, 더러운 자를 깨끗하게 하시며 부족한 자를 온전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죄의 상처가 있다는 것, 지금 거룩하지 않은 것이나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까지도 그것 자체로는 우리 주님께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분께로 가서 고쳐달라고 더 건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거룩함은 연약한 거룩함입니다. 우리 영혼의 건강은 항상 불안한 건강입니다. 그래서 더럽혀지기 쉽고 또 악화되기 쉽습니다. 또 상처입고 또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영혼의 의사되시는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하며 또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점점 더 온전해져야 하며 점점 더 건강해져야 합니다.
올해도 오늘로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주일이 쉰 세 번 이었지만 그래도 다 지나갔습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자주, 더 가까이 우리 영혼의 의사되시는 예수님께로 함께 나가십시다. 그래서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죄 때문에 일그러진 것들을 고쳐달라고, 더 깨끗하게 해 주시고 더 거룩하게 만들어 달라고 더 간절히 기도하며 애쓰십시다. 주님은 우리를 반겨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고쳐주시고 더 온전케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속에 치유의 기쁨이 넘치게 해주실 것입니다.
내년에는 우리 영혼이 더 건강해지고 우리의 거룩함이 더 견고해져서, 지켜내기에 급급한 신앙이 아니라, 우리 주님처럼 누군가를 치유하고 또 누군가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온전한 거룩함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올해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수없이, 그리고 간절하게 부르셨습니다. 더 거룩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더 온전하게 치료해 주겠다고 말입니다. 한 번 돌아보십시다. 내가 그 부르심에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기쁘게 응답했는지 그래서 지난 한 해 동안 내 영혼과 존재는 얼마나 거룩해지고 또 건강해 졌는지 말입니다. 부족하다면 잠시 회개하시고, 내년에는 우리가 좀 더 자주, 간절히, 그리고 기쁘게 주님께로 가겠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겠습니다. 나를 더 온전하게 만들어 주시고 더 거룩하게 만들어 주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