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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교회 설교/설교듣기

2012.3월. 주일 1부 - 요나의 표적 밖에는


설교본문 :  누가복음 11장 27-36절


 

도입 : 기적에 대하여

요즘은 그런 집회들이 별로 많지 않지만 한 때 간증집회들이 굉장히 성행한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집회에 참석해 보셨겠지만, 그 간증집회의 대부분은 신앙 안에서 큰 기적과 복을 경험한 후에, 그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러 저러하게 신앙생활 했더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러 저러한 복을 주셨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못 고칠 병을 고치게 되었다.” 또 “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라는 것들이 그런 간증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런 집회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그런 고백과 경험을 들으면서 놀라기도 했고, 부러워하기도 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은혜를 주셔서, 저런 기적을 보여주시고, 저런 복을 누리며, 또 저런 능력을 갖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곤 했습니다. 

기적은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말합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하신 자연법칙을 깨뜨리면서까지 이 세상의 일들과 우리의 삶에 직접 개입하셔서 일으키시는 경이로운 일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생한 경이로움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기적에 매료되고 또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십니까? 그것을 소망하면서 신앙생활하십니까? 아마 성도들의 대부분이 그런 마음을 적어도 조금씩은 다 가지고 계시리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안에는 분명히 능력이 포함되어 있고, 또 그 능력은 충분히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믿는 믿음은 성경적인 신앙에 있어서 생략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능력으로 지금도 우리의 삶과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너무나도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거나 혹은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과 그 기적을 믿는 신앙이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의 질이나 성장과는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적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오해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기적은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기적을 보고, 기적을 직접 경험하면 갑자기 없던 신앙이 생기고 또 부족한 신앙이 완전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그렇게 원하는 것이구요, 그러나, 실제로는 생각만큼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분명히 신앙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 기적의 영향력이 오래도록, 그리고 강하게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원칙적으로는 그래야 하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기적은 놀랍고 충격적인 다른 것들처럼 거기 중독되고 집착하게 하는 역효과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신앙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그것만 추구하고 그것만 따라다니게 되는 것이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오늘 본문 첫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과 가르치시는 모든 말씀을 듣고 거기 모였던 사람들 중 한 여인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예수님이 얼마나 보배로은 분이신지를 잘 파악했고, 그래서 그런 예수님의 어머니인 여인은 얼마나 복될까하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만 것입니다. 진짜로 그렇습니다. 인간으로써 성자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는 일보다 더 큰 기적과 특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외침에 대해서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보다, 메시야의 어머니가 되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훨씬 더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보면 그 별 것 아닌 정말 평범한 사람을 온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께서 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함께 찾아보는 것이 그 첫번째 목적이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진짜로 가장 복된 사람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복된 사람이 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는 것이 두번째 목적입니다. 이 말씀을 함께 나누는 동안 주님이 가장 크다고 말씀하시는 이 복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으로 여겨지게 되고 또 그 복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깨닫고 순종하게 되는 복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모여든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대 사람들의 주된 특징이 표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붙들려 있고 또 거기에 집착되어 있다고 진단하셨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철석같이 믿는 시대도 없지만,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은 과학적인 증거나 손에 쥐어지는 물질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어찌보면 우리와는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들 또한 보이는 것이 붙들려 있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기적을 원하는 이유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악하기 때문에 표적을 구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사실 우리 머리 속에서는 기적을 원하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서로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뭏든 주님은 그러는 것이 악하다고 하시니 우리 자신이 이런 악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의 말씀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그 안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보여줄 기적이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 그런데 조금 이상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악하다면 표적을 보여주시면 안되는데 오히려 표적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적만큼은 그들이 원하는 그런 표적이 아니며, 주님께서 꼭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표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표적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표적입니까?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만약 이 ‘요나의 표적’이 그렇게 중요한 표적이라면 우리 또한 이 표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고, 우리도 이 표적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그가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갔다가 삼일만에 다시 밖으로 나온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일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무덤과 물고기 뱃속이 비슷하고 거기 머문 시간까지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예수님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아갔다가 삼일만에 나온 것처럼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는구나.”, “작고 그저 그런 기적들이 아니라 그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시겠다고 하는 거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요나의 기적’을 이렇게 이해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진짜로 보여주시려는 ‘표적’이 무엇인지를 영영 놓쳐버리고 맙니다. 

‘요나의 표적’은 분명히 표적입니다. 너무 너무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흔히 생각하는 그런 기적, 그러니까 물고기 뱃 속에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온 것같은 그런 종류의 기적이 전혀 아닙니다. 30절을 보면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라는 말씀하셨고, 32절로 가보면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두 구절이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요나에 대해 말씀하신 내용의 전부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구절 속에서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표적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과 요나서를 찬찬히 뜯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삼일이 걸려야 다 돌 수 있는 성읍을 단 하루만 돌면서 그것도 억지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성 전체가 심지어는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금식하며 회개에 돌입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 요나의 기적이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체도 하나의 표적이지만 요나 또한 표적의 역할을 했습니다. 어떤 표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파괴력이 있는지, 그래서 사람들을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큰 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예수님 시대를 위한 그런 표적이 되고, 또 그런 표적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표적,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이 반드시 보아야 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놀라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감각을 자극하는 그런 기적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세대의 경향을 바라보면서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기 때문에 그런 요구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정 표적을 요구한다면 표적을 보여주겠지만 단 한 가지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심판 때에 남방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우리는 여기 와서야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그 세대 사람들을 향해 왜 악하다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남방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이야기를 들으려고 먼 길을 여행하고 엄청난 댓가를 치르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하룻동안 전한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 사람들은 솔로몬이나 요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신 분이 그들의 메시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메시지, 정말 결정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도 전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놀라기도 했고 또 그 가르침을 즐겨 듣기도 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더 깊고 견고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이상한 일들만 보여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악하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가 지배적이었던 그 세대 사람들을 향해서 악하다고 평가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제 우리는 왜 주님께서 같은 연인으로서 마리아를 최고로 복되다고 고백했던 여인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세대는 그런 세대였습니다. 끊임없이 기적을 요구하고, 놀라운 일을 요구하는 세대, 눈에 보이는 복만을 갈구하는 그런 세대, 그러면서도 정작 참된 믿음과 순종은 전혀 없었던 그런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불신앙의 세대, 그러한 완악한 마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온전한 회개에 이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 본 사람일 것이고, 하늘나라의 초청장을 받은 사람일 것이며, 이미 그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가족, 하늘나라의 가족으로 인정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마리아보다 더 복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표적은 표적 자체로 의미가 충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생생한 증거이고 우리가 믿는 그 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살아 움직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그 표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눈 앞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고 해도, 심지어는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된다고 해도 그 표적이 진짜로 보여주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그 표적의 진짜 유익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당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랍고 더 자극적인 일들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들의 ‘눈’이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표적’을 볼 때, 그 진짜 의미를 생각하고, 거기서 하늘나라를 보며,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보고 있어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잠시 이 말씀을 실습해 보겠습니다. 모두 눈을 한 번 감아보시겠습니까? 보이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뵈는 것이 없죠? 그러면 밝습니까? 어둡습니까? 어두우시죠? 이제 눈을 뜨십시오. 이게 우리가 보는 일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이 반사한 빛을 보는 것입니다. 눈이 그 빛을 받아들이고 그 빛을 통해서 보는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력이 나빠진다는 것은 그 빛이 불분명해지거나 어두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우리 눈이 아무런 빛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눈이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은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눈이 밝으면 그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온 몸과 우리 삶 전체를 분명하고 확실한 것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만큼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도 불분명해지고 우리의 몸과 삶 전체는 불분명함과 어두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이적들도 행하시고 다른 표적들도 보이셨지만, 그런 표적들은 실은 한 가지 표적을 보도록 돕는 보조적인 표적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하시면서 정말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행하셨습니다. 정말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고, 하늘나라가 임했다고 여겨지게 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야라고 구원자라고 그러니까 이제까지 살던 삶의 방향을 바꿔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라고 주장하셨습니다. 마음과 생각, 삶의 목적까지 달라진 사람으로 하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말만 그렇게 하시고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분이 행하신 모든 일들이 그 분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 증거들  때문이라도 그 분이 하시는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기적을 ‘표적’으로 볼 눈이 없었습니다. 눈이 어두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을 보고 또 그 주인공이 되는 그 가장 큰 복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진짜로 보여주시기를 원하셨던 표적은, 진짜로 일으키시고 싶으셨던 기적은 바로 ‘요나의 표적’이었습니다. 그 분이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을 위한 ‘요나’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표적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그들에게 나눠주고 싶어하셨던 복은 병을 고쳐 주시는 것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삶의 난관을 해결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눠주시고 싶어하셨던 진짜 복중의 복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요나의 표적’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진리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 진짜 기적을 보며 진짜 복을 추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 사람들을 보시고 “내가 이 시대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한탄하셨지만 지금 세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더더욱 믿음이 희귀한 세대입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대는 증거를 보고 싶어하고 믿음의 실제적인 효과를 누리고 싶어하기는 해도 결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결코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리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나의 표적을 보고 가장 큰 복을 누리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보이는 것에 중독되어 있는, 그러면서도 보아야 할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는 우리 세대의 영적인 질병이고 반드시 치료되어야 할 영적인 고질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치기 어려운 병이 치료되는 것도, 해결되지 않던 일이 해결되는 것도, 내가 바라는 소원이 성취되는 것도 큰 기적과 복이지만, 기적 중의 진짜 기적, 복중의 가장 놀라운 복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가장  깊은 영혼의 갈구까지도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일어나기 힘든 기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새로워지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만을 기뻐하게 되고, 거룩한 삶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거룩을 갈망하게 되며, 자기 생각과 의지만 고집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기꺼이 순종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 그것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일으킬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이 세상 그 어떤 복보다도 가장 크고 귀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고 확신있는 삶을 살게 해 줄 뿐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을 보장해 주는 그런 복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으로 여겨지지 않고, 이것이 가장 큰 복으로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것을 사모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눈’이 그만큼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적과 복이 발하는 그 영광스러운 빛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좋은 것과 덜 좋은 것들이 섞여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에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그 일에 대한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복과 기적의 전문가이십니다. 그 분이 모든 선한 것과 능력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큼 이 일에 정통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꼭 보아야 할 표적이 있다면 그것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너희가 반드시 받아야 할 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복’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너희가 나를 통해 경험하고 또 보아야 할 가장 위대한 기적이고 복이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 복을 놓친다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만이 줄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독특한 복을 놓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하나님에 대해서 속속들이 바꿔놓는 일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면, 그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로 일으킬 수 없고 베푸실 수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이요 복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경험해야할 기적, 여러분의 것으로 삼아야 할 복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그 가장 큰 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그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항상 우리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하셔서 우리가 끊임없이 이 놀라운 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