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0219to24 - 17 디모데의 연단을 아노니.pdf
본문 : 빌립보서 2장 19-24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죠? 그리고 여러분 개인도 우리 교회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신앙생활 하시기를 원하시죠? 아마 이런 질문은 하나 마나한 질문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없을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하면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고, 또 그 안에서 우리들 또한 큰 기쁨을 누리며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그것을 위한 또 하나의 성경적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사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냐 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는 정말 수없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 문제를 다루는 책이 나오면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많이 읽게 됩니다. 성도들 또한 좋은 교회의 성도가 되는 일에 관심이 아주 많기 때문에 요즘에는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나면 다니던 교회의 직분이며 관계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런 교회로 교회를 옮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책들이 이야기하는 방법대로 해 보아도, 그리고 좋다고 하는 교회로 가 보아도 좋은 교회를 만들고 또 진짜로 좋은 교회를 발견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 목사가 되고 나서 얼마동안은 좋은 교회를 만드는 방법이나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를 알려주는 책들을 구입해서 읽어보곤 했습니다.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지만, 결국에는 무언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부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책들 속에는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있고, 좋은 교회의 겉모양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정작 진짜로 있어야 할 것들이 빠져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생략했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요소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들려면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적절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교회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렇게 하시는데 사용하시는 도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만 교회가 세워질 수 있고,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으며 그러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한하면 그 교회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하나님께서 교회에 은혜를 부어주실 때까지 인내하며 은혜를 위해 간구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들고 그 교회를 붙들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함께하고 움직이는 것은 바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들은 교회란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꾸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 안에서 기쁘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그 교회인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고, 어떻게 변화되어져 가야 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해야 하는지, 어떤 관계를 가꾸어 가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채로 그저 좋은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귀한 포도주를 따르는데 깨진 그릇, 더러운 그릇에다 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포도주를 망치게 되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포도주라면 교회 안의 성도들은 바로 그 은혜를 담는 그릇입니다. 건물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교회라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로 그 은혜를 담는 그릇입니다. 온전하고 깨끗한 그릇이라야 그 은혜를 제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성도라는 그릇 하나 하나, 그리고 그 성도들이 만들어 내는 관계라는 더 큰 그릇이 깨끗하고 온전할수록 은혜도 그만큼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담기고 유지될 수 있게 되고, 교회는 그만큼 좋은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 자신이 중요하고, 우리들이 만들어 가는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에만 은혜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직접 빌립보에 가 보고 싶었지만 옥에 갇혀 있는 몸이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려고 계획을 세웠고 먼저 가는 서신 편에 곧 디모데를 보낼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바울하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고, 믿음에 있어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 어떤 순간에도 기쁨과 평강을 유지했던 그런 강철같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합니다. 물론 바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생사를 결정할 재판을 앞둔 상태로 굉장히 열악한 감옥에 갇혀있지만 넘치는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자신의 소명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가진 모습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것과는 정반대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려고 하는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속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바울은 디모데를 할 수 있는대로 빨리 빌립보로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하루라도 빨리 빌립보 교회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듣고 그들에 대한 불안함을 해결하고 위로를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위로가 필요했고 안심하는 일이 필요했다는 말은 바울이 지금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식들 때문에 굉장히 힘들어 하고 있고 불안해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는 일로는, 그리고 생사를 결정을 내를 재판을 앞두고 있는 일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의 성도들로 인해서는 굉장히 힘들어 하고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이런 마음을 위로받기를 원한다고 자기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런 믿음과 이러한 불안함, 그리고 그러한 강인함과 이러한 연약함은 도무지 함께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가 모순되어 보이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목숨을 걸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에 헌신하지만, 핍박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위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존재, 그리고 그렇게 안심하고 싶어하는 연약한 마음을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인간을 생각할 때,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인간으로 생각하려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흔들리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 속에는 그 어떤 연약함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 그건 믿음이 없다는 증거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사람을 그렇게 보니까 생깁니다. 그것 때문에 오해하고 속단하고 또 그릇되게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 사람의 연약함과 정서적인 필요를 헤아리지 않고 마치 은혜받은 기계 대하듯이 대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런 기계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씁니다. 한국교회에 인간미가 없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람의 온전함을 마치 기계적인 완전함처럼 이해하니까 믿으면 믿을수록 인간적인 모습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완전함은 기계가 가진 강인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완전함은 부족함과 연약함을 포함한 완전함입니다. 끊임없이 위로가 필요하고 안심이 필요한,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야 비로소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약한 완전함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도, 천하의 바울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위로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런 바울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는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그런 관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사람입니다. 여전히 연약하며, 여전히 부족하며,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마음 졸이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현실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삶의 주된 태도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적어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서는 마음 아파하고 또 노심초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고, 사람들의 위로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내가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잘못되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다른 사람 또한 그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하며, 또 다른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보는 일을 불편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거칠고 공격적이며 악한 감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나의 연약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또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보았을 때는 찾아가 이야기를 걸어주고,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고, 또 기도해 주어서 다시 견고해 질 수 있도록, 안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이해하며 그 사람의 연약함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다가갈 때,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기쁘고 풍성한 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위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성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서 디모데를 추천하는 내용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직접 빌립보로 갈 수 없었던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대신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디모데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이유를 먼저 빌립보 교회에 편지로 적어 보냈습니다. 우리는 그 첫 구절에서 ‘이 밖에 없음이라’, 그러니까 나 대신 보낼 사람이 디모데 밖에 없다는 말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조금은 이상한 말입니다. 그래도 평생을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키워온 바울인데, 바울 주변에 분명히 그에게 배운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로마에도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텐데 그 사람들 중에서 바울이 자신의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이 디모데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은 누군가에게 진실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것도 중요하고 긴급한 일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이라면 그저 덮어놓고 믿어줄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정말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반대로 여러분에게는 그 사람이라면 묻지도 않고 믿어 줄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메주로 맡을 만든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굉장히 드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니까요.
바울은 자기대신 보낼 사람이 디모데 말고는 없어서 디모데를 보낸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바울의 마음이 되어서 진실되게 생각하고 걱정할 사람이 디모데 말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진실되다는 말은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디모데만이 빌립보 교회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끝까지 걱정해 줄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보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정말로 신뢰를 받으려면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로는 정직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실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정직해도 금방 변해버릴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가 없으니까요. 디모데는 정직하고 동시에 신실했습니다. 거짓이 없었고 지속적으로 신뢰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왜 다른 사람들, 다른 사역자들은 믿을만하지 못했는지, 바울이 그들을 왜 진실되지 못하다고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다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일을 먼저 구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많이 극복해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 또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믿을만 할까, 아니 하나님은 고사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정말 나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여길까 하는 생각을 하니 자신도 확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주 진리를 빙자해서 내 입장을 변호해 왔는지, 얼마나 자주 내 변호를 위해서 반쪽짜리 사실을 전부인양 이야기해 왔는지, 또 얼마나 자주 남들의 입을 빌어 내 이야기를 해 왔으며, 심지어 성도들을 돌볼 때도 내 유익을 먼저 생각해 왔는지... 정말 하느라고 해도 결국에는 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던 일들이 떠올라서 다시 마음을 추슬러야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진실해야 누군가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또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지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믿으실 수 있고, 또 우리로 인해 기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진실함이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함은 계속해서 내 속에 뿌리 박고 있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과 싸울 때, 그렇게 그런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처리해 갈 때 우리 속에서 자라나고 열매맺는 또다른 나무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토양이 바로 시험과 어려움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성품이 고난과 시험을 통과해 나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진실함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 사용된 ‘연단’이라는 말은 고통과 시험을 당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연단으로 번역해서 디모데가 겪었던 힘든 과정을 뜻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 말 속에는 과정의 의미 뿐만 아니라 결과의 의미도 있는데, 사실 뒤쪽의 의미가 더 강합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이미 충분히 시험과 고난을 통해서 충분히 그 인격과 영성이 충분히 검증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인격과 믿음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을 불로 재련되는 금으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인격과 믿음은 고난과 시험이라는 불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두 개의 똑같이 생긴 금속덩어리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둘다 비슷하게 금처럼 보이는데 둘 중의 하나는 금도금을 한 나무덩어리고 하나만 진짜 금덩어리 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둘 중에서 어느 것이 금일까요? 답은 그냥은 모른다 입니다. 제대로 알아내려면 두 개 모두를 불에 통과시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는 것, 그래서 처음보다 더 빛나는 것이 바로 금덩어리입니다. 진짜 금은 불을 통과하면 불순물이 제거되고 이전보다 더 가치있는 빛나는 보석이 됩니다. 디모데는 도금을 해놓은 가짜 금덩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난과 시험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해서 이전보다도 더 순수해지고 더 빛나는 보석이 된 진짜 금덩어리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정금과 같은 신앙과 인격으로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공식인증을 받았던 것입니다. 디모데는 연단되었습니다. 검증과정을 통과해서 인증을 받았습니다. 디모데의 진실함은 바로 그렇게 남은 금덩어리가 발하는 광채였고, 그 금덩어리의 참된 가치였습니다. 디모데는 그렇게 해서 얻은 진실함으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연결해 줌으로써 바울도 위로하고 빌립보 교회도 위로하며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거나 혹은 맡고 있는 일들이 무겁고 힘겹게 여겨지실 때는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나의 인격과 믿음을 진실되게 만들어가는 과정이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진짜 금으로 만들고 그 가치를 인정해 주시기 위해서 겪게 하시는 재련과정이구나’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개인적이건, 혹은 신앙적인 것이건 의미없고 가치없는 어려움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믿음과 인내로 반응하고, 그 과정을 우리의 인격과 믿음 안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해 나가는 과정으로 여기고 견디어 낸다면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도 사람도 인정하시는 진실한 사람들이 될 것이고, 하나님도 사람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가치있는 성도로 다듬어져 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모두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연약함과 부족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더 예민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며, 그것을 통해 마음의 평안함을 얻으모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위로와 격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성도들만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참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뢰를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위로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실함을 방해하는 것이 우리의 이기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이기심을 제거하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맡은 때로는 무겁게 느껴지는 책임들이나 개인적으로 겪는 어려움들은 바로 이러한 이기심을 처리해 나가는 하나님의 용광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용광로 속에 집어넣으시면서 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라고, 네 인격과 신앙이 매끼칠한 가짜가 아니라 지금은 비록 투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번쩍 거리는 금덩어리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드러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서로 서로를 위한 위로자요 격려자로, 그리고 평안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서로 안에서 서로의 기쁨을 찾는 그런 사람들로 부르셨습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기신 일을 통해, 그리고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시험과 어려움을 통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정금같은 신앙과 인격을 지닌 성도로 스스로를 다듬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기쁨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보석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해가시고, 또 그 안에서 서로 축하하며 기뻐하며 유익을 누리는 성도들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이제는 사람이 사람일 수 밖에 없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 고난과 시험, 그리고 나에게 맡겨진 책임을 통해서 신앙과 인격을 검증받고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 내가 교회 안에서 상처주고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된 위로자의 역할을 하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