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128to35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pdf
본문 : 요한복음 11장 28-37절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선택해서 경험하는 일들이고 또 한 가지는 자신의 선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완전히 수동적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진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뒤쪽에 속한 일들인 것 같습니다. 대개 앞쪽에 속한 일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기가 선택하는 것들이고 또 어느 정도는 예상을 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비교적 쉽지만 뒤쪽에 속한 일들은 그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때로는 정말 예측할 수 없게 우리를 찾아오게 되고, 게다가 그 크기도 굉장히 큰, 그런 일들이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를 만나서 말씀을 나누셨던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시지 않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 동안 마르다는 마리아에게로 가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찾는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넋이 나가 있던 마리아는 그 소리를 듣고 급하게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함께 슬퍼하던 사람들도 마리아를 따라 나섰습니다. 무덤으로 가는 줄 알고 함께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처음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리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자매라서 똑같은 소리를 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실은 이것이 사람들이 불행하고 좋지 못한 과거의 일에 대한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은 반응입니다. 사실 마르다도 마리아도 바로 그러한 틀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했더라면 ... 하지 않았을텐데.’, ‘...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이것이 과거의 불행한 일이나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정해진 반응입니다. 결코 과거를 바꾸거나 또 움직일 수 없으니 그저 그렇게 원망하거나 혹은 안타까워하는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죠.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리고 나사로의 죽음을 함께 슬퍼하기 위해서 온 모든 사람도 나사로의 죽음이라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죽음에 대해 집착하고 슬퍼하고 또 원망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런 모든 부정적인 반응들은 그런 한계를 힘겨워하는 모습이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사...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33절과 38절이 예수님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절망하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친지들을 굉장히 불쌍히 여기시고 또 그들로 인해 슬퍼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슬픔과 비통해 하시는 감정을 오해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좋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저렇게 슬퍼하시고 비통해 하시는 것을 보니 나사로를 정말 사랑하시기는 했나보다’라고 생각했고, 조금 삐딱한 사람들은 ‘눈 먼 사람을 고친 사람이 죽는 사람은 살리실 수 없었나 보다’라고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밝히고 있는 대로 예수님의 슬픔은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슬픔과 비통함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그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향한 슬픔과 비통함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사로를 향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고, 그래서 그의 잠을 깨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될 것이고 살아서 믿는 자들은 죽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죽음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부활이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힘들게 하고 또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가 만들어 내는 죽음과 그 죽음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 아픔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 죄를 짓지 않았다면 죽음을 경험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하지도 않아도 되는 사람들, 전혀 죽음과 상관없이 살 수 있었고, 죽음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었을 사람들이 죽음 때문에 겪는 절망과 슬픔, 그리고 고통과 분노를 보면서 예수님은 아파하시고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우리 주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생명이시고 부활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그 분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께도 우리들의 아픔과 슬픔은 그 분을 슬프게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죄 때문에 그러한 아픔과 슬픔을 당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주님을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시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입니다.
때로 우리들도 마리아와 마르다 처럼 예상치 못했던 슬픔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수님께 불평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처럼 하나님께서 계시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런 저런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라도 우리는 우리 주님이 그러한 우리들 때문에 슬퍼하시고 비통해 하시는, 그만큼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잘 이해하시고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주 은혜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함께 하신다는 사실도 굉장히 은혜롭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에게 큰 유익과 의지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에는 아주 놀랍고 실제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으로 우리의 상황 속에 개입하시고 또 그러한 상황을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이해하시고 함께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그렇게 만든 상황에 기꺼이 개입하셨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완전히 죽어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나사로를 그 죽음으로 부터 풀어놓아 자유롭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그 모든 절망과 슬픔은 가장 큰 소망과 기쁨, 그리고 무엇보다도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를 슬프고 아프게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또 믿어야 할 사실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또 함께 느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의 그러한 마음은 우리를 위해서 움직이시는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 주님도 내 마음과 꼭 같은 마음으로 그 상황 속에 계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곧 그 상황 속에 개입하셔서 일하실 것을 기대하고 또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 그 분이 우리 삶 속에 행하시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다를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주님은 기꺼이 우리 삶 속에 개입하시는 분이시고, 그 개입은 언제나 가장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우리 주님의 우리 삶과 우리의 마음에 대한 깊은 진심을 생각하시며 그 진신으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분의 선하신 능력을 신뢰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위로하시고 또 든든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