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1.16. 수요예배 -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빌립보서 18)


빌0225to30 -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pdf


20130116WE (#1).mp3.zip




본문 : 빌립보서 2장 25-30절 

목적 :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생각한다. 



빌립보서의 중심단어는 분명히 ‘기쁨’입니다.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기뻐하기 어려울 때 기뻐할 수 있는지, 그래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빌립보서의 중심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2장이고, 그 중에서도 5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입니다.그런데, 5절부터 11절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이 내용인 빌립보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립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하며,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2장 5절부터 11절까지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 많은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사실  이런 설명들은 우리와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단은 표현 자체가 굉장히 추상적이고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닌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겸손’, ‘낮아짐’, ‘비움’, ‘섬김’, ‘순종’.... 이런 것들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만들어낸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나에게 꼭 필요한 모습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을 보면 갑자기 두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바울은 자기 편지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면 항상 맨 처음이나 맨 나중에 씁니다. 그래야 편지 내용이 방해를 받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2장에 뜬금없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편지의 흐름을 깨면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씁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편지의 흐름을 깨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실제적인 예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두 사람을 선택했던 것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이 두 사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두 사람의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두번째 예인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마도 에바브로디도는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빌립보 교회 내에서도 그렇고 그다지 높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빌립보 성도들 중 한 명의 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는 그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보냈을 때, 빌립보에서 로마까지 달려왔고, 또 그렇게 와서는 철저히 바울에 의해서 거취가 결정되는 그런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와야하는 그런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에바브로디도가 그 일을 억지로 맡았다거나 혹은 마지못해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분명히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고 그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돕기 위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동적으로 그저 맡은 일만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를 흔쾌히 형제라고 부를만큼, 또 동역자라고 인정할만큼, 똑같이 수고하고 똑같이 어려운 싸움을 싸운 복음의 전우로 여길만큼 정말 모든 힘과 마음을 다해서 바울을 섬겼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사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바울이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사도’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어떤 면에서는 자신과 동등한 복음 사역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마음을 다해 섬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다가 ‘순종’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지 그 첫번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힘들고 어려운, 그러면서도 전혀 빛나지 않는 그런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일이라고 대충하거나 혹은 수동적으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기 때문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요즘에는 별로 볼 기회가 없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저는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보곤 했습니다. 저는 달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 프로그램의 내용을 보면서 왜 그들이 달인인가, 아니 왜 달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가를 발견했습니다. 분야는 달라도 그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작은 일이라고 창피하게 여기거나 소홀이 하지 않는다. 둘째, 그 일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셋째, 그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전단지를 집어넣는 일이든지 봉투를 접는 일이든지 심지어는 늙은 호박 하나를 깎는 일이든지 그 모든 일을 대하는 그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애정과 열정, 그리고 즐거움, 그리고 일을 잘하기 위한 고민.... 바로 이런 것들이 그들을 달인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돌보는 일, 그렇게 불리하고 위험에 처해 있는 한 사람을 돕는 일이 빛나는 일일까요? 신나는 일이고 사람들이 가치있게 생각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어찌보면 지루하고 가치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그 일을 위해서 빌립보에서 로마까지의 먼 길을 달려왔고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순종을 닮은 순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순종은 바울로 하여금 그를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의 이러한 순종과 섬김은 자신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말그대로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하다가 그만 중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거의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성실함과 열정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진짜로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가 그러한 병중에 내보였던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몰라도 에바브로디도가 큰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졌고,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신이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질병보다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빌립보의 성도들 때문에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상식적으로라면 내가 너희들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이 지경이 되었다고 오히려 그런 상황을 알리고 싶어했을텐데, 에바브로디도는 반대로 자신이 아프다는 소식이 알려진 것 때문에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그들을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그들이 몰라서 하는 일이니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람들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의 질병이 아니라 자기 때문에 걱정할 빌립보의 성도들을 더 걱정했던 것 또한 에바브로디도가 그만큼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에바브로디도... 이 둘 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바로 이미 자기 자신은 없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신이 비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해서 자신을 비울 수 있었을까요? 도를 닦았을까요? 아니면 고행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도 에바브로디도도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했고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기꺼이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는 자신을 비우게 됩니다. 기쁘게 그리고 기꺼이 비울 수 있게 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겸손하고 신실한 순종을 가졌고,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비웠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으니 그의 속에는 예수님의 기쁨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그런 예민한 근심을 가진 사람이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굉장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는 분명히 가장 큰 기쁨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할 때, 꼭 함께 생각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기쁨이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없애고 느끼지 못하게하는 진통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어려움과 슬픔에 대해서는 훨씬 무뎌지고 담대해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난함도 질병도, 때로는 당장 느끼는 고통에도 훨씬 둔감해 집니다. 이미 충만한 기쁨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기쁨을 가진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더 온전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더 많이 공감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 때문에 더 많이 아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이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우울함에 사로잡히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늘의 기쁨을 잘 알고, 온전히 그 기쁨 가운데 거하셨던 분이셨지만 나사로의 죽음으로 고통과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통감하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넘어지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의 기쁨 또한 주님의 기쁨을 닮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도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 때문에 깊이 근심했지만 그것이 그를 넘어뜨리거나 좌절시키지 못했고, 그런 근심 가운데서도 여전히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이런 기쁨이 없는 사람들은 슬프고 아픈 일이 있으면 자기 속으로만 파고 듭니다. 아니면 아얘 남의 탓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능함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그러느라고 다른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죠. 그러나, 이 기쁨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기쁨이 주는 속사람의 만족이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도 오히려 다른 이들을 걱정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합니다. 그렇게 사람으로서는 함께 지니기 힘든 성품들을 함께 지니게 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늘 본문 안에는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숨어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서 바깥 일을 해 주어야 할 형편이고, 누군가가 그의 필요를 공급해 주어야 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일을 위해서 빌립보의 성도들이 보내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에바브로디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울 자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자신의 필요를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의 성도들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을 굉장히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질병 소식을 듣고 근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 또한 도대체 그래서 에바브로디도가 어떻게 되었는지 굉장히 궁금해 하며 또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돌려보내기로 작정했고, 즉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28절은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게하려 함이라” 똑같습니다. 바울도 에바브로디도와 똑같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자신이지만 오히려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의 성도들을 걱정합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과 필요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에바브로디도를 기꺼이 돌려보냈습니다. 얼마나 크고 섬세한 사랑인지, 얼마나 자기를 비운 마음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면서 그에 대한 굉장한 높은 평가를 구구절절히 덧붙이고서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주 안에서 에바브로디도를 잘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나 갈등의 여지를 미리 없애보려는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어쨋든 상황적으로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굉장히 급하게 말입니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 일찍 에바브로디도가 돌아가면 빌립보의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그를 오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중병에 걸려있던 그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기뻐하며 안심을 하겠지만, 아직 바울이 감옥에 있는데 혼자 편하자고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본문의 분위기상 에바브로디도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일이 그를 굉장히 힘들게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돌아간 에바브로디도가 잘 받아들여지고 또 그 일이 불필요한 오해나 갈등을 만들어 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축제기간을 이용해서 며칠동안 후배하고 정해진 곳이 없는 여행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여행때문에 그 후배가 얼마나 미워졌는지 모릅니다. 평상시에는 몰랐는데 그 여행 때문에 힘들고 피곤해지니까 그 후배의 감춰진 모습이 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인지를 알게 되니 참 괜챦던 후배가 그렇게 싫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평상시라면 사도 바울의 배려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최악의 감옥에서 그것도 누구보다도 에바브로디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인데,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세심한 배려를 한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훌륭함을 드러내고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실은 그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러니까 자기 자신보다는 항상 다른 이들의 유익을, 그것도 아주 세심하게 구하는 마음을 지녔던 사람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행동들은 의식적으로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절로 우러나지 않으면 하기 힘든 일들인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 주님을 닮아있다면 바울은 이미 그 속 사람이 그만큼 주님의 마음처럼 변화된 그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걸면서도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감정적인 필요까지 세심하게 살피고 배려하는 바울... 우리가 그의 모습 속에서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큰 소명을 가지고 오셨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픔과 절망을 함께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셨던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어떤 일의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참 무거운 일입니다. 아무튼 그 일 자체를 잘 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시험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다움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시험입니다. 일도 잘하고 사람답기도 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은 일이니 자꾸 그리로 손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다보면 자꾸 주의 일을 하면서도 주의 마음이 없이 일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자신을 내려놓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결코 제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균형잡히고 인간다운 성품 속에라야 제대로된 신앙, 풍성하고 기쁨 넘치는 신앙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다운 성품 중에서 어떤 이유로건 어떤 부분을 포기하거나 등안시한다면 바로 그 부분에서 은혜가 세어나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방해물이 되어서 더 깊고 풍성한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귀챦다고 걸리적 거린다고 인간다운 성품 중에서 어떤 부분이라도 내려놓고 포기한다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그 사람은 바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신앙의 참된 유익을 놓치게 됩니다. 


디모데,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바울... 우리는 빌립보서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는 정말 목숨을 걸 정도로 출실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의 상황이나 필요보다도 다른 이들의 마음과 정서적인 필요를 먼저 생각했던 균형잡히고 정말 사람다운, 그 속에 예수님을 닮은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처럼 거친 시대에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 이렇게 살아가려고 애쓴다는 것은 참 걸치적 거리고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형상이며 그래서 그 속에 가장 큰 하늘의 기쁨을 담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이라면 우리는 결코 이 마음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가장 인간다운 마음입니다. 따뜻하고 섬세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익과 아픔에 대해서는 담대하고 강한 그런 마음입니다. 우리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목표는 바로 이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속에 참된 신앙이 자리잡을 수 있고, 그래야 그 속에 예수님의 기쁨이 풍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다가감으로써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기쁨이 풍성해지는 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