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1015to19 -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pdf
본문 : 열왕기하 19장 14-19절
히스기야는 다윗 이후에 남유다를 다스린 두 명의 선한 왕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히스기야의 증손자인 요시야이구요. 그래서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해서 이런 좋은 평가를 내립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18장 5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히스기야는 단 한 번의 실수나 불순종도 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고, 그의 길은 그저 순탄하기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뒤를 이어 나오는 히스기야에 대한 기록 속에서 그가 그런 사람도 아니었고, 그의 삶과 통치기간이 그렇게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의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한 사람을 평가하실 때,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두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히스기야에게는 이중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올곧게 다스리는 모습도 있지만, 반대로 너무나 나약한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쪽이 순종의 모습이라면 다른 한쪽은 불순종의 모습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니까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일컬어 하나님과 연합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한 전무후무한 신실한 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의 삶 전체를 보면 불순종과 불신앙의 색채보다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모세의 계명에 순종하려고 애썼던 그런 흐름이 훨씬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형통’은 결코 그 어떤 위험이나 위협, 어려움도 없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시대는 국제정세면에서 볼 때, 가장 불안한 시대였고,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위협이 가장 극심했던 시대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도 그러한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급박하게 드린 기도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가 얼마나 힘든 위기의 시대를 왕으로 살아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통이라는 단어를 오해합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형통은 우리가 이 말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잘 되는 것이고, 둘째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 속에서도 결국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을 넘어서고 또 승리하게 되는 결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다가 범하게 되는 범죄와 실수 때문에 너무 기가 죽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일어서서 가던 길을 다시 가면 됩니다. 다시 바른 방향으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고 평가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신다고 할 때, 그것을 마치 아무 어려움 없이 탄탄대로를 걷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께 순종하면 형통하게 해 주신다고 해 놓고 그러지 않느냐고 불평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결국 어려움들을 넘어서게 해 주실 것이고, 또 우리 삶을 하나님 앞에서 흠없고 온전한 삶으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과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왕이 되고 나서 믿음의 결정을 내립니다. 그 동안 유다가 잘 섬기던 앗수르에게 반기를 든 것입니다. 나중에 히스기야의 기도에 나오지만 그것은 앗수르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나라를 섬긴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옳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앗수르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신앙적인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당시에 지중해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앗수르에게 이러한 유다는 눈엣 가시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산헤립 왕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유다의 거의 모든 성들을 함락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갑자기 꼬리를 내립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는 것을 당하리이다.” 하라는 대로 다 할테니 살려만 달라고 빈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성전과 왕궁에 있던 금과 거기 씌웠던 금을 합해서 탈탈 털어서 다 주고 겨우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한 번 금과 은을 얻어간 앗수르가 유다를 계속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습니다. 앗수르는 다시 유다를 처들어 왔습니다. 이번에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공격하기 전에 협박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 협박은 세 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첫번째 협박과 모욕에는 히브리어로 해 달라고 비굴하게 부탁하며 반응했습니다. 두번째 협박에는 아무말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세번째 모욕과 협박은 편지를 보내서 이루어 졌습니다. 드디어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들고 성전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사실 왕이 성전으로 들어갈 때는 지켜야할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단신으로 하나님을 독대하러 들어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편지도 그랬지만 그 이전의 두 번의 협박과 모욕도 실은 단순히 유다라는 나라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앗수르는 그렇게 할 때에 유다가 섬기는 하나님을 들먹였습니다. 앗수르가 얼마나 많은 나라를 정복하였고, 얼마나 많은 신들을 굴복시켰는지 아느냐, 그런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아직도 히스기야의 말을 듣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느냐, 빨리 항복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항복을 독촉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끄집어낸 말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앗수르에게는 치명적인 실수였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독대한 히스기야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일러바칩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이것은 꼭 형에게 얻어맞고 엄마한테 달려와서 일러주는 어린아이의 말투같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본격적으로 앗수르를 일러주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하나님이 가장 잘 아시는데 왜 그런 이야기들을, 그것도 이렇게 급한 상황에서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말씀드릴 수 있는 대답은 이것이 결코 하나님께 대한 아부나 미사여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무슨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결코 폄하되거나 모욕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은 다른 나라의 하나님이기 이전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 편에 서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히스기야는 “여호와여 여호와는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유다라는 한 나라의 신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주인이시고 통차자이십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사는 그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고백의 범위가 점점 더 커집니다. 한 나라에서 모든 나라들로, 그리고 이제는 온 우주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굉장한 압력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제가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비결을 하나 알려드렸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들이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 얼른 약속대로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면 하나님은 꼼짝하지 못하십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비결을 알려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상기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까? 온 우주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높으신 분이셔서 절대로 욕먹으실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의 편을 들어 주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또 모든 나라와 모든 민족들을 다스리시는 온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물으면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그래.”라고 하시겠죠. 그러면 그 때가 기회입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꼼짝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깨뜨리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들이밀면 움직이시는 하나님,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드리면 그대로 움직이시는 하나님... 천하의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움직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우리로서는 의아할 뿐이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분명히 그런 분이십니다. 왜 그러실까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성경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붙들고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붙드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보기를 원하시는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진짜로 믿는지, 하나님의 성품을 진짜로 신뢰하는지 그것을 보고 싶으신 것이구나.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그리고 하나님은 또 그 약속과 성품, 또 그 분의 어떠하심을 절대로 어기실 수 없으니 그런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실 수 밖에 없는거구나”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실로 믿고 그 믿음으로 기도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기뻐하시면서, 드디어 얘가 나를 진짜로 믿는구나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제 기도는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너무 바뀌어서 당황스럽죠. “아버지, 빨리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세요. 빨리 눈을 열고 이것 좀 보세요. 옆집 산헤립이 하나님보고 하는 소리 좀 들어보세요. 아버지를 팔공산 잡신들하고 똑같이 보네요. 쟤가 힘 좀 세다고 정말 보이는 것이 없나봐요. 다른 우상들 몇 개 불속에 집어던졌다고 아버지도 그럴 수 있는 줄 아나봐요. 그냥 계시면 다른 집 아이들도 헤립이처럼 생각할꺼예요. 쟤내 아버지 하나님도 별 거 아니라고 말이예요. 그래도 가만히 계실래요? 빨리 우리를 구해주세요. 헤립이를 혼내주세요. 그래야 다른 집 아이들도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알죠.” 16절부터 19절까지의 내용은 바로 이런 느낌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강력한 기도였던 이유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하나님의 편을 드는 그런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히스기야는 유다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정말 급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유다라는 나라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유다는 다른 나라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신이신지를 나타내는 통로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망하면 하나님도 큰 불명예를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틀 안에서 유다라는 나라의 필요를 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기쁘게 하는 기도, 그 분을 움직이는 기도는 그저 간절하기만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그 영광을 위하여 무엇을 구할 때,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들이 그저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한 공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틀에서 우리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틀 안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걱정하면 우리의 삶을 걱정해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 또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기도 또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흉내내야 합니다. 당장 필요한 것, 당장 부족한 것들이 많지만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는 기도, 그래서 하나님을 움직이는 그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하시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며,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으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 드리고, 하나님의 편을 들어드려서,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게 하고 내 편을 들어주시도록 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기도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