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2,06. 수요저녁 -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빌립보서 21)

빌0307to11 -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2).pdf


20130206WE (#1).mp3.zip




      본문 : 빌립보서 3장 7-11절


오늘 설교는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려고 다시 오늘 본문말씀을 읽었을 때, 제 마음에 갑자기 떠오른 두 개의 천국비유를 읽어드리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두 비유 모두 마태복음 13장에 연이어 나오는 비유들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본문을 읽을 때 이 두 개의 비유가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오늘 본문 또한 이 비유들처럼 오늘날의 수많은 성도들이 잃어버린 것들, 그러면서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가장 귀한 것들에 대한 본문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농부는 남의 땅을 세 내어 경작하다가 우연히 거기 뭍혀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진주를 구하는 상인은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두 사람의 태도는 똑같았습니다. 농부는 너무 기뻐했습니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인은 아마도 더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찾아헤매던 것을 찾게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농부는 전 재산을 팔아 그 땅을 샀습니다. 상인도 전 재산을 팔아 그 진주를 샀습니다. 둘 다 기뻐했고, 둘 다 전재산을 투자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보물이, 그 진주가 그만큼 가치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보물과 진주는, 하늘나라는 누구의 것이 됩니까? 전재산을 판 사람들의 것이 됩니다. 


대개 이 비유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하늘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투자해라, 하늘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라고 가르칩니다. 틀린 것은 아니죠. 우리는 분명히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이 비유들의 초점은 그게 아닙니다. 이 비유들의 초점은 하늘나라가 그만큼 가치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우연히 하늘나라를 발견하는 은혜를 누리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찾아 해매다가 하늘나라를 발견하게 되지만, 진정으로 하늘나라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는 그 무엇보다도 귀한 보배, 가진 것 전부를 투자해서라도 소유하고 싶은 그런 보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비유들의 초점입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 투자하며 살아가는 삶은 결과적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제대로 깨달은 다음의 일입니다. 만약 하늘나라의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그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농부와 진주 장사꾼처럼 말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하늘나라는 거의 잃어버린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조차도 하늘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그저 땅만보고 삽니다. 저는 과연 이래서 하늘나라에 갈 사람,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 나라의 가치도 모르고, 그래서 투자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과연 그 나라에 갈 수나 있을까 근심이 됩니다. 그런데, 더 애석한 것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잃어버린 것은 하늘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미 말씀드린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시는 나라, 우리가 영원한 영광가운데 그 분과 함께 거하게 될 그 나라입니다. 두번째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이 보배를 두번째에 놓기는 했지만 실은 이 보물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두 개의 보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번째 보물에 온통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보물은 부활입니다. 하늘나라의 어울리는 존재로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우리의 세번째 보물입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이 가장 중요한 보물 세 가지를 거의 다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세가지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 가지 보물의 참된 가치를 알고 그래서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서 투자하며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정말 많은 분들에게 이런 보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혹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듣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와 부활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뿐, 거기에 큰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관심은 이 땅에서의 평안과 건강, 그리고 부에 쏠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성도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기쁨과 흥분을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진짜 보물을 눈 앞에 놓고서도 그 보물의 가치를 모르니 농부와 진주 장사꾼의 기쁨,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그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두르는 흥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꿈이 없는 청소년처럼 얕은 기쁨과 만족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바울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온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제까지 가치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을 다 버렸으며, 실제로는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얻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다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이 힘들었을까요? 아까워죽겠는데 억지로 그랬다고, 괜히 그랬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지금 너무 신나서 “나 지금 엄청난 보물 가지러 간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행에 동행하자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였으면도 여전히 그 일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그가 말하고 있듯이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그 분 자체로 가장 가치있는 보배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찬란히 빛나는 광채를 발견하고 또 알아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기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얻는 것, 그 분을 가지는 것은 실제로도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을, 그것도 공짜로 얻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얻고 더 얻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투자했습니다. 


4절 이하로 돌아가 보면, 거기에는 사도 바울의 수많은 자랑거리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자기 의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구원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갖추었던 조건들의 목록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렇게 좋은 집안출신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종교적인 열심을 보였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스스로 자신이 의인이라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런 것들은 오히려 진짜 의를 얻는데 방해만 되는 쓰레기들, 혐오스러운 찌꺼기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있는 진짜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며, 유대교 신앙을 지켜내는 일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의 이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가 그토록 바라고 또 바랬던 의로움은 인간의 노력과 행동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만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목표가 바뀌었습니다. 자기 의를 붙드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애쓰며 투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삶의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를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게될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현재도 중요했지만, 바울에게 현재가 중요한 것은 현재는 마지막 날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위한 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 의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보아주시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에서도 꼭 해야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했습니다. 지금 얻었다고 다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가 가장 갖기를 원하는 보배 중의 보배,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반드시 얻어야 하는 최고의 보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까요? 왜 예수님을 얻어야만 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의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수도 없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보셔야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게 되셔야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그 분을 더 온전히 얻고 소유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행히 예수를 얻는 방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 구절 속에 나타난 예수님을 계속해서 더 얻는 방법, 그래서 마지막 날 우리가 다른 곳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 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덧입혀주신 의가 망가지지 않습니다. 학벌, 소유, 출신, 능력, 자랑거리, 자부심...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고, 자신의 평생을 ‘믿음의 싸움’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얻는 방법입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얻고 또 얻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또 그분 안에서 얻으려고 했던 두번째 보물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게 되는 것, 이것이 그가 얻기를 원했던 보물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바울은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 때문에 살아갔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고, 부활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온통 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최종적인 소망은 하늘나라에 있었지만 만약 부활이 없다면, 부활이 확실하지 않다면 그 하늘나라도 그림의 떡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이며 성도들의 부활을 위한 보증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든 얻고 싶은 것, 얻어야 함 하는 것이 있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호랑이를 잡을 능력이 있고, 죽을 병을 고치기 위해서 호랑이를 꼭 잡아야 하는데 그 호랑이가 호랑이 굴 속에만 있다면, 거기서만 잡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밖에서 기약없이 기다리시만 하겠습니까? 아니면 힘들고 위험하더라도 그 굴로 뛰어들어 가겠습니까? 당연히 뛰어들어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얻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음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런 과정도 없이 그냥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씨앗이 만들어낸 영광스러운 열매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성도들의 부활이라는 열매도 동일한 원리로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그래서 똑같은 씨앗을 심기로 했습니다. 자신이 그 일을 통해 그 귀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부활의 권능에 반드시 참여하려면 예수님의 고난에도 참여하고 죽음에도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씨앗을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 심었습니다. 물론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고난이 찾아올 때는 그 고난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지금도 감옥에 있기는 하지만, 그는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 앞에 자신을 쳐 복종시킴으로써 자신을 죽였고,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내려놓음으로써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흉내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부활의 열매를 확실히 얻으려면 예수님을 흉내내어 예수님께서 심으셨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부활이 없다면 몰라도,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만약 부활의 열매를 꼭 얻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보물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긴다면 우리들 또한 고난의 씨앗, 십자가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였던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 예수님을 흉내낸 바울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제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특히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요즘 계속되는 청문회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 청문회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나라 지도층의 도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며 참 안타까워하게 되지만, 실은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본모습입니다. 안타깝게도 불법과 탈법이 상식과 관행으로 여겨지는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삶은 그 자체로 고난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밖는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큽니까?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괜히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회사에서는 주일날 교회갈 시간조차 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환경은 영적으로 바라 본다면 오히려 유리한 환경일수도 있습니다. 진짜가 되려고 한다면, 진짜가 되기로 작정하기만 한다면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우리의 부활의 열매를 위해서 고난과 십자가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니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부활의 열매를 거두어 들여야 합니까? 어떻게 하든지 부활에 참여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힘들고 버겁더라도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열매가 확실히 열립니다. 살면서 부활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며 살 수 있고, 흔들리지 않는 부활의 확신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 신앙의 최고의 보물들, 그 세 개의 잊혀진 보물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들을 다시 우리의 최고의 보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그리고 부활 그리고 하늘나라... 바로 여기에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복이 있고, 거기에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은혜가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팔았습니다. 이것을 붙들기 위해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흉내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얼마나 가치있는 보물들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항상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항상 힘찬 삶을 살았고 기대로 부푼 삶을 살았습니다. 반드시 얻어야 할 것, 꼭 얻어야 할 복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른 것들 때문에 절망하고 좌절할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기쁘고 힘있는 삶을 살려면 믿는 자들의 참된 복, 참된 보물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서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며 어떻게든 부활을 얻기 위해서 씨를 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든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며,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믿음생활 최고의 복이요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그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전재산을 팔아 보물이 묻혀있는 땅을 사고 값진 진주를 사는 삶이 되게 하셔서 최고의 보배를 놓치지 않는 영원히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