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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2.13. 수요일 저녁 -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빌립보서 22)

빌0312to16 -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빌립보서 2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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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3년 2월 13일 수요일

본문 : 빌립보서 3장 12-16절



몇 년전에 제가 다시 영어공부를 좀 해 보려고 이런 저런 영어책을 구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권의 서언을 읽는 중에 영어를 잘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 어 있었습니다. 기억으로는 열 가지쯤 되었던 것 같은데, 다른 것은 다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맨 처음에 있었던 것만큼은 확실히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바로 영어를 잘 하려면 영어공부의 방법을 아는 것보다 영어를 왜 해야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영어를 왜 해야하는지 그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해서 포기하게 되고, 동기부여도 없기 때문에 흐지부지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영어공부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책은 본 적이 없어서 지금껏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영어공부에만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아니 적용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원리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어떤 목표냐, 그리고 그 목표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실한 목표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 전체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고 전혀 다른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태도로 대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른 목표, 그리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정할 때, 그 목표가 정말 내가 내 인생의 전부나 일부를 투자해서 추구할만큼 가치가 있는 목표인지, 내가 왜 그 목표를 목표로 삼았는지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마음에 원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세우기 쉬운데 그렇게 하기때문에 목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뭔가 허전하고 확실하지를 못하며 그 목표를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때도 오히려 더 큰 허무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우리들에게 신앙의 바르고 가치있는 목표를 결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됩니다. 실제로 그것이 하나님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을 결정하며,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장사밑천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길든 짧든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인생을 주시면서 그 인생을 어디엔가 투자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 투자기회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짧은 인생이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투자를 결산해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영원히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땅 위에서의 삶을 어디다 투자했는가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의 크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어디다 어떻게 투자할 것인가, 그러니까 어디에 목표와 목적을 두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그만큼 절실하게 중요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우리의 삶을 어디다가 투자하며 살아야 할까요? 어디다 삶을 쏟아부으며 살아야 그 영원한 세월을 가장 복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정말 힘있고 생명력 넘치며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미 사도 바울로 부터 이런 목표가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그런 목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더 온전히 알기 위해서 자신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큰 유익과 자랑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것들까지 아낌없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예수님을 닮은 고난의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닮은 죽음을 죽기를 소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소원까지 품게 되었던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이 목표가 자신이 부활한 다음 하늘나라에서나 완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려는 애타는 소원을 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지금까지 끊임없이 예수님을 더 온전히 알기위해서 애쓰고 또 애써왔습니다. 실제로 그가 행했던 모든 일들은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영광스러운 경험을 한 이후,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결코 그 분을 온전히 알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3장 12절에서 우리가 지금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 녹쓴 청동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분명하지 않지만 하늘나라가 이루어지면 예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보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하늘나라를 그토록 소망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부활을 원했습니다. 부활을 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늘나라를 그토록 갈망했던 이유는 그 나라에 가아먄 예수님을 온전히 알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온전히 알고 싶은 열망이 바로 그가 그토록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퍼내고 또 퍼내도 계속해서 새로운 생수가 흘러넘치는 그런 책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 본문을 다시 읽다가 또 한 번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이전에도 이 본문을 여러차례 읽었고, 또 연구했었습니다. 설교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읽을 때만큼 이 말씀이 제 마음에 깊이,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아프게 와 닿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싶어하는 소원의 간절함과 진하기가 제 마음에 깊게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소원은 실은 바울 개인의 목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품어야만 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일이 하늘나라를 갈망하는 이유가 될만큼, 우리의 삶과 죽음까지도 던져넣을 만큼 귀한 목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이 세상에서 모든 인생들이 반드시 얻어야만 하는 최고의 보배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에서도 비할 바 없는 값진 보배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을 아는 것을 위해서 살았고, 하늘나라도 그 예수님을 더 온전히 알기 위해서 꼭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삶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가기를 원했고 하늘나라도 그렇게 갈망했던 것이겠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예수님을 더 온전히 아는 것.’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온통 여기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살았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였고, 그것 때문에 목말라 했으며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늘나라도 그것 때문에 가고 싶어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이 원하는 전부였고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아니 그의 인생 전체보다도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에게 도전이 되었고 영혼의 고통이 되었습니다. 나는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 나는 도대체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을 얼마나 기쁘고 귀하게 여기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무엇 무엇을 투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며, 예수님이 그렇게 보배로운 분이신지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예수 믿은 지 30년이 훨씬 넘었고, 목사가 된지 15년이 다되어 가는데도 내가 인생을 걸고 섬기는 예수님의 진짜 가치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 너무 너무 화가 났습니다. 물론 저는 하늘나라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제가 이 땅에 사는 이유가 거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도, 왜 내가 하늘나라를 그렇게 소망해야 하는지 그 가장 중요하고 값진 이유도 몰랐던 것이 너무나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감사했습니다. 이제라도 이런 도전을 주시고 이제라도 자신의 영적인 현주소를 알게 하셨으니, 그래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 방향을 보여주셨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되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이 실은 구약성경의 계속 반복되는 가장 중요한 요청이며 구약성경의 하늘나라에 대한 설명과도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라는 귀한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여호와를 알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망하는 이유가 다른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며, 영혼이 만족하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리는 이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이사야서 11장은 하늘나라가 하늘나라가 되는 이유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뿐만이 아니라 애초에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 그러니까 신약의 표현으로 하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것이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고자 하는 목마름과 열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인생입니다. 그는 이제 나이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생사를 결정하는 판결을 기다리면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알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가 모든 면에서 최악의 상황에서 쓰여진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쓴 서신들 중에서 가장 힘과 소망이 넘치며 기쁨이 충만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가장 원하고 소망하는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그런 사람이었고 빌립보서는 그 어떤 편지보다도 그 목표지점에 가장 가까이 도달했을 때 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목표가 진짜로 좋은 목표, 가장 값진 목표일까요? 정말 평생을 투자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그리고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 않을 그런 목표일까요? 만약 어떤 목표가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이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가로막히고 좌절될 수 있는 목표라면 또 그것을 이루었을 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목표라면 그런 목표는 우리 전 인생을 던져넣을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표가 정말 가치있는 동시에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그런 목표가 되려면 그 목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붙들 수 있고 또 이루어갈 수 있는 그런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 이루어졌을 때 아무런 부작용이 없는 그런 목표여야 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온전히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런 목표였습니다. 인생을 다 던져 넣어도 아깝지 않은 목표, 결코 끝에가서 그를 배신하지 않을 목표, 그리고 이루어가는 과정이나 또 완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결코 부작용을 남기지 않는 그런 목표였습니다. 그것은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더 힘을 주고, 더 달려가게 만들어 바울을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목표였으며, 그 과정에서도 가장 큰 만족을 주는 목표였고 또 이루어졌을 때,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을 안겨줄 그런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얻는 경주를 계속하기 위해서 걸리적 거리는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버리고 있습니다. 그가 꼭 얻어야 할 것이 아직도 멀리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묶여 있을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가 버렸으며 계속해서 버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과거였습니다. 그의 과거에는 커다란 영광과 치욕, 두 가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교회를 핍박하고 성도들을 죽게 만들었던 바울은 그 일에 대한 기억을 떨쳐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주는 죄책감이나 좌절감을 떨쳐 버리지 않으면 그는 앞으로 달려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기억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성공적인 사도이기도 했습니다. 정말 많은 교회를 세웠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구원얻게 해 주었으며 또 그 사람들을 가르치고 양육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이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삼층천에 다녀오는 경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도 붙들려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바울을 만족에 빠지게 하며 나태하고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러한 성공적인 과거에 대한 기억도 떨쳐버리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되는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위해서 다 잊기로 했습니다. 그토록 원하는 상, 하늘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게되는 바로 그 상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성장해 가며 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더 온전해 지려면 과거와 결별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저는 성도들 중에서 과거에 붙들려서 앞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곤 합니다. 과거의 상처로 생긴 거친 마음이나 좌절감 과거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죄책감에 사로 잡혀서 항상 제 자리에서 시들어 가기만 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저걸 떨쳐버려야 하는데, 저걸 벗어버려야 하는데 본인은 그 필요조차 잘 알지 못하고 또 알아도 안된다고만 하고 있으니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부정적인 과거의 경험만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신앙적인 성공, 은혜를 받았던 경험들, 교회를 위해서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했었다는 기억에 붙들려서 만족에 빠져 훨씬 더 풍성한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 경우에는 더 심각합니다. 이런 기억을 즐기며 만족하는 일은 힘든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기가 더 힘들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성장은 생각보다 굉장히 예민합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붙들려 있을 때는 의미있는 성장이 이루어지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참된 신앙의 세계로 진입하기가 어려워 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가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간에 빨리 잊어버리고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과거를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더 좋은 것을 향하여 다시 한 번 달음질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를 키우다 보면 꼭 한 번쯤 하게 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손에 쥔 백원짜리 동전을 놓지 않으려고 천 원짜리나 만 원짜리 지폐를 주어도 손을 펴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참 우스운 일이지만 아이는 정말 심각합니다. 이게 더 크다고 이게 이거 열개라고 아무리 설명해줘 봤자 아이는 더 손을 움켜쥘 뿐이고 결국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그 아이에게는 백원짜리 동전이 가장 큰 돈이기 때문에 그런 설명이 전혀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자라서 천원과 만원의 가치를 알기 전까지는 그런 모습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가치평가를 잘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우리가 경험했고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우리가 한 번도 듣거나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결코 그 가치를 평가하지 못합니다. 가장 가치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을 맛보아 경험하여 알기 전까지는 그게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평생의 목표 아니, 자신의 과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다 던져넣고 이루려고 했던 영원한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절망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늙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과거에 매여있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감옥 속에서도 자신을 흥분시키게 하고 기쁨으로 벅차오르게 하는 확실한 목표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그에게는 그만큼 간절하고 그만큼 가치있는 보배였던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오늘 설교의 주제에 대해서는 저도 그렇게 드릴 말씀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저 자신에 대해서도 그저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 가치를 제대로 알든 모르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있고 의미있는 목표이고,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최고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 목표를 세우고 이 목표를 위해서 살며 신앙생활 한다면,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간다면 우리들의 삶 또한 그렇게 힘차고 기쁨 넘치고 항상 달음질 하는 젊고 새로운 삶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이제는 신앙생활하는 목표를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알려주신 그 목표를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 좋다면, 그게 그렇게 가치있다면, 그 목표를 가지고 사는 일이 그렇게 신나고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늙어도 젊은이로 살게 하며, 감옥 속에서도 흥분할만큼 능력있는 일이라면 우리도 그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아까우니까요. 


오늘은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고 싶다면 하나님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는 자들과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께 귀 기울이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고 또 바바 볼 것입니다. 특히 말씀으로 충만하여 이 땅에 오신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것입니다.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상의 기쁨이 되도록 영적인 미각을 향상시키려 노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된 보배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를 더욱 더 온전히 알아가는 이 가치로운 일에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들이고, 관심을 들이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게 해 주시는 그 최고 하늘보배를 얻기 위해서 날마다 애쓰며 달려가는 그런 삶을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