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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2.18. 새벽예배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80)

요1220to26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8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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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20-26절


유월절 예루살렘은 단지 유대인들만 찾는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이방인들도 모여들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서도 유대교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유월절처럼 유대의 큰 명절이 되면 이방인들 또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소식을 들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예수님께서는 헬라인들이 자신을 만나러 온 일을 자신이 영광을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싸인으로, 이제야 그럴 준비가 충분히 마쳐진 것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온 세상을 위한 구원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소명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이제 그 소명에 따라서 이제 예수님께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음을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을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라고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그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같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이 말씀은 영광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부활이나 승천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왕좌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비참함과 안타까움만을 보지만 실제로 성경은 십자가 자체를 예수님의 왕좌로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가 그 뒤에 붙어있었던 명패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말입니다. 왕좌이니까 왕이라는 명패가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영광은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영광은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죽음의 목적,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는 이유는 그 이후에 맺혀지는 많은 열매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이 받으실 영광이란 바로 그 열매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집니다. 만약 스스로 죽지 않으려고 바둥거린다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자기 스스로도 썩어 버립니다. 죽지 않으려고 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당장은 죽는 것 같지만 자신과 똑같은 수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들 속에서 살아있게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 주님의 부활의 그림이 들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문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죽음 속에는 우리의 죽음이 들어있었고 그래서 그 분의 부활은 바로 우리 모두의 부활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우리의 부활, 우리의 하늘영광이 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져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일의 열매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첫번째 열매였습니다. 그 분이 받으실 첫번째 영광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대신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것 말입니다. 


또한 씨앗은 그렇게 땅에 떨어지고 자신이 죽고 나면 거기에서 그 씨앗과 똑같은 열매를 무수히 맺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고 그 자리에서 열린 열매들은 전부 다 예수님과 똑같이 닮은 열매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두번째 열매이고 또 두번째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듯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원리에 따라서 예수님을 닮은 열매를 맺고, 예수님께서 받으시는 그 영광을 받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우리 생각대로라면 자기 생명에 애착을 가진 사람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지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꾸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들, 그래서 아낌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서 나눠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얻을 뿐 아니라 영생하도록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영원한 영광을 받으실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씨앗을 심어야 똑같은 열매가 맺혀집니다. 다른 씨앗을 심고 똑같은 열매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거두어 들이신 그 영광스러운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들 또한 우리 주님께서 뿌리신 씨앗과 똑같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심으신 씨앗은 바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최고의 영광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영원히 영광스러운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 주님께서 뿌리셨던 씨앗과 똑같은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우리 목숨을 지켜려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 목숨을 내어주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움켜쥐고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 애쓰며 사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애쓰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직접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그렇게 하셨지만 우리는 똑같은 일을 살아서 해야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다른 이들의 유익을 헤아리며 우리의 삶을 씨앗으로 뿌려야 합니다. 


이것은 그저 다 버리고 다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항상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요구하시는 것은 그것보다 더 좋은 것,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주님께서 계시는 섬김의 자리에 함께 있는 것... 이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분명 손해보는 삶이고 때로는 어려운 일을 자청해야 하는 삶이까요. 그러나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상이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사셨던 예수님을 높이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이 바로 그 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누리시는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그 상급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자신을 닮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때로는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 정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헤아리면서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마치 자신을 죽이는 것처럼 힘듭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그것은 가장 귀하고 영광스러운 상급이 있는 일입니다. 이 땅에서 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하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영원한 삶을 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주님께서 뿌리셨던 씨앗을 닮은 씨앗을 뿌려 하나님의 귀하게 여기심을 받는 상급을 얻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