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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2.22. 새벽예배 -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더라(요한복음 83)

요1236bto43 -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더라(요한8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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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3년 2월 22일 금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36b-43절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우리가 어제 살펴본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서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셨다고 말하면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실습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해서 논쟁하려고만 드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해서 빛이 그들과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이렇게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게 하시기 위해서 정말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였지만 그들은 그 모든 이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적을 원합니다. 보여주기만 하면 믿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여주시면 더 깊이 헌신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직 남아있는 한 아무리 놀라운 이적이 눈 앞에서 벌어져도 믿지 않습니다. 더 깊은 헌신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만 주시면 이제 제대로 믿겠다고 고백하고 살아난 사람들 중에서 아얘 교회를 떠나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신앙에 대해서 가지는 한계이고 또 기적을 중심으로 믿는 믿음의 한계입니다. 기적이 언제나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또 항상 더 좋은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이 원래 목적을 이루려면 정말 그 이전에 믿겠다는 믿고 싶다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더 제대로 믿고 더 깊게 헌신해 보겠다는 절실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제서야 기적은 우리의 믿음의 재료가 되고 더 견고한 헌신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옛날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들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때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조상들의 모습의 재현이며 또 그런 거절이 모든 선지자, 그러니까 마지막 선지자이신 예수님까지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좋은 예수, 이 좋은 하나님을 왜 믿지 않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일까요? 믿는 일일까요, 아니면 믿지 않는 일일까요? 사실은 믿는 일입니다. 믿는 일이 기적이고 믿는 일이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래 사람들의 자연적인 모습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원래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절대로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원래 저것이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구나, 내가 믿는 것이 정말 은혜고 정말 기적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한은 똑같은 모습을 이번에는 하나님 편에서 설명합니다. 39절과 40절의 말씀인데요. 이것은 이사야서 6장 10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매우 충격적인 구절입니다. 사람이 믿지 않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지 않으시고 구원을 가로 막고 계신 것처럼 생각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경우 구원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너무 의지적이고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며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며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더 이상 믿을 가능성도, 구원얻을 가능성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보고 싶어하는데, 듣고 싶어하는데 또 믿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억지고 방해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원래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너무 거부하니까, 너무 악의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그냥 그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이 가리워지고 귀가 막히며 마음은 강퍅해져서 절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의미의 ‘유기’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또 그래서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차별이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 자신의 선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끝일까요? 아닙니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 사역하던 교회에서 어르신 한 분의 장례를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이 분도 예수를 믿으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교회의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 뒤로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고 돌아서셨습니다. 아내되시는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얼마나 고집이 센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했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암에 걸리셨습니다. 너무 늦게 발견된 거죠. 그래서 결국 세상을 떠나셨는데,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저의 심방을 받으시고 함께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 때까지도 전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날 다시 한 번 찾아뵈었을 때에 누우신 자리에서 다시 믿음을 되찾으셨습니다. “아버지,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라는 고백과 함께 말입니다. 다시 예수를 믿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편에서 마음을 바꾸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바꿉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점입니다.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은데, 절대로 예수를 믿지 않을 것 같은데 결국에는 예수를 믿습니다.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신 하나님의 인내가 만들어낸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은혜로 다시 열린 문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관리들 중에서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지만 관리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열린 이 문이 어떤 것 때문에 다시 닫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처음 설교하기 시작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요한복음은 참된 믿음에 대해서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의 믿음을 보고 그게 진짜 믿음이다 아니다라고 딱부러지게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을 평가하기가 어려워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실은 우리를 향해서 생각해 보라는 질문을 던지고 또 도전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믿음이 이 진짜 믿음인가, 과연 이런 믿음도 구원얻게 하기에 충분한 거듭난 자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아가서 당신의 믿음은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같은가 다른가를 심사숙고해 보라는 질문이자 도전이기도 합니다. 관리들로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편견과 자존심 중에서 굉장히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그 믿음에 이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 그렇게 어렵게 열린 문이 다시 닫히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문이 활짝 열어젖혀지는 일을 강하게 방해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그 방해물은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 했습니까? 바로 출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유대인의 일원으로 남아있게 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두려움은 사랑 때문에 생겨났다고, 그러니까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더 사랑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들은 저울질을 잘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그들이 주는 유익을 하나님의 칭찬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보다도 더 무겁게 여겼습니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어렵사리 열린 믿음의 문, 구원의 문을 다시 닫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항상 변동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고, 어디에 사랑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믿음은 더 깊고 풍성하며 든든한 믿음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계속해서 불신앙쪽으로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람이나 세상이 주는 것을 더 사랑하면 우리의 신앙은 피할 수 없이 불신앙쪽으로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칭찬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더 사랑하면 우리는 참된 믿음, 우리를 넉넉히 구원하고 우리를 영원히 영광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세상이 주는 영광과 내가 주는 영광 중에서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느냐, 그래서 그 둘 중에서 어떤 것을 빼앗기는 것을 더 두려워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좋은 대답을 드리기가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이 자꾸 세상을 더 크게 보고, 세상을 더 사랑하며 그래서 세상을 더 두려워 하는 곳에서 부터 하나님을 더 크게 보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오늘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래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떠나실까, 내가 하나님을 빼앗길까 정말로 두려워 할만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성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기도가 우리의 신앙을 더 뜨겁고 견고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런 기도와 작은 결단들이 쌓여갈 때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더욱 더 영광스러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하셔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 하는 참 믿음을 지닌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