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0401to03 -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빌립보서24).pdf
본문 : 빌립보서 4장 1-3절
목적 : 주 안에서 굳게 서야함을 생각한다.
만약 여러분이 어느 산골에 산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산골은 너무 외져서 하루에 한 번 밖에 버스가 오질 않는데 그 버스 조차도 언제 올지가 확실치 않다면, 그런데 여러분이 그 버스를 꼭 타야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니까 그저 점심먹고 어슬렁 어슬렁 나가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올 것은 분명하니까 아침부터 정류장에 나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당연히 아침부터 나가서 정류장을 지키고 앉아계시겠죠?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적당하게 한 시간쯤 기다리다가 안오면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버스가 올 것은 분명하니까 올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끝까지,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시겠죠? 아무리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해도, 그 버스가 한 번 밖에 오질 않고 또 그 버스를 꼭 타야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찍부터 나가서 버스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려야만 합니다.
성도들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 살아가든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리는 일은 산골마을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일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잘 모릅니다. 우리 생전에 오실지, 아니면 그 후에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오실 것이고, 우리는 그 때 반드시 그 분을 맞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영원한 하늘영광을 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성도들 중에서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만약 하늘나라가 없다면, 있어도 내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들어가더라도 영광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사실 예수를 믿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믿음을 통해 약속하시는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복이 바로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믿고서 이 땅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 아무리 길어도 우리 삶과 함께 끝나고 맙니다. 그리고 실제로 땅에 속한 복들은 굳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복,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복은 하늘나라 백성이 되어서 영원한 영광 속에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라면, 진짜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과 그 나라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나라에 반드시 들어가서 반드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이라는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그 나라가 임할 것을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나라가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적당하게 중간에서 마음이 풀어지면 안됩니다. 게을러져서도 안됩니다. 기다림의 기대와 긴장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성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분명히 임할 것이며, 그것도 도적같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성도들이란 과연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 말로 성도가 살아가는 모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우리들의 정체성은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늘에 시민권을 둔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진짜 영광은 하늘에 있지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구주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몸의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영화롭게 되기를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성도들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과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해놓고서 우리를 향해 “그러므로 굳게 서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굳게 서 있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소망을 두고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 느낌이 잘 살지 않지만 원래 “굳게 서라”라는 말은 한 번만 굳게 서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해서 굳게 서 있으라”라는 뜻입니다. 마치 버스를 탈려면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듯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주님을 영광스럽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굳게 서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굳게 서 있지 못하면 그 날은 결코 영광스러운 날이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한 “굳게 서다”라는 단어는 원래 전투용어입니다. 이 말 속에는 전투를 할 때 초소로 밀려드는 적군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결코 물러서지 않는 병사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 주님을 만날 때까지 주님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 기다림은 아무런 시험이나 어려움이 없는 그저 지루하기만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시기는 했지만, 사탄의 허리를 꺾고 우리들을 죽음에서 풀어주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믿음을 무너뜨리려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는 사탄의 공격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적어도 우리의 삶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물러서거나 포기하면 안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교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시험과 문제는 계속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승리해야할, 승리하고서 굳게 서야할 그런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더라도 교회적인 싸움에서 진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성도는 몸된 교회를 통해서만 믿음을 유지할 수 있고 또 기쁨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 안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시험이었고, 영적인 전쟁이었습니다. 그 당시 빌립보 교회를 굉장히 힘들게 했던 한 가지 사건은 교회 안에서 유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두 여인이 서로 의견이 갈려서 대립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어느 사회나 그렇지만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일은 그 사회 전체에 그렇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거나 갈등하는 사람들이 그 사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악영향은 그 사회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자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크든 작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내 생각 가는대로 결정하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의 크기만큼 내가 속해 있는 교회를 어렵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두 가지 측면에서 공인이 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는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는 공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부터 내 삶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간판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교회 안에서도 성도는 공인이 됩니다. 크건 작건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이고 또 현실적인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됩니다. 내가 예배드리는 모습 하나, 내가 교회를 섬기는 모습 하나, 내가 다른 성도를 향해 하는 말 한마디까지 모두가 다 공적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교회를 섬긴다는 것은 항상 이것을 의식하고서 모든 일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래서 더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중에 주님을 만날 때 주님께 받게 될 칭찬의 많은 부분이 바로 이런 일에서 제대로 섬겼을 때 주어질 것이니까요.
빌립보 교회 내에서 심한 갈등을 보였던 두 사람은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 였습니다. 루디아가 세운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는 아마도 상대적으로 다른 교회들보다는 여인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두 사람은 지도자였구요. 그래서 이들의 다툼은 그 악영향이 그만큼 더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협력해서 싸워야할 한 부대 안의 두 장교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처방을 내려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린 처방은 이것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사도 바울은 그냥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또 싸울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기준을 마련해 줍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사도 바울은 2장 5절 이하에서 이미 이것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품으라고 했던 한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갈등도 생겨날 수 있구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왜 안그렇겠습니다. 크든지 작든지 그런 일들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고 또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또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애초에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를 깨닫지를 못하고 그래서 해결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가 생겨난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서 거기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 안에, 그리고 성도들 간에 갈등이 생깁니까? 왜 그 갈등이 다툼으로 번집니까?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사도 바울의 진단에 의하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면 “아차!” 해야합니다. 모두들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떠나 있구나.”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묵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셨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오히려 종이 되시고 사람이 되셨던 그 마음,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는 순간까지, 생명을 내어주면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 마음. 이 마음을 깊이있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질 때까지 그 마음이 나를 감동시키고 나의 높아진 마음을 누그러뜨릴 때까지 묵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높으신 주님이 그렇게 하셨는데, 이렇게 낮은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할까를 질문해 보고, 그 렇게 얻은 답대로 따라야 합니다.
갈등과 다툼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태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빛과 온기가 사라지고 차디찬 냉기만 남듯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부터 멀어지면 우리 마음은 교만해지고 거칠어져서 갈등과 다툼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갈등과 다툼은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요즘 굉장히 큰 영향력을 미치며 사역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선한 목자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유기성 목사님이신데, 제가 청년부 때 저희를 지도하셨던 분이십니다. 이 분의 메시지는 항상 같습니다. ‘성도는 24시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 단순한 메시지가 힘이 있는 것은 그 분이 그것을 깨달은 후, 지금까지 그렇게 사시려고 애쓰시는 분이시고 그 결과로 당신의 삶과 목회를 완전히 바꾸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려고 노력하고 또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려고 애쓰시는 것이 그 분의 삶에서 그대로 뭍어나기 때문입니다.
혹시 3주전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할만큼 알아야만 한다고, 그 일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말씀드렸던 그 설교 말입니다. 저는 그 설교를 준비하고 또 여러분에게 전하고 나서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 그 분을 가진다고 표현할만큼 절실하게 바라보는 것이 제 삶과 목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함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알게 되는 것, 그렇게 될 때까지 바라보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고, 또 개인적으로 특별히 짬을 내서 독서도 하고 묵상도 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것이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어떤 사람의 삶과 영적인 상태는 그 사람과 예수님 사이의 거리가 좌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감하게 살펴보니 이 거리가 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곤 하는데, 확실히 가까이 있을 때와 멀리 있을 때는 마음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밀착되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개인적인 삶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거기서 잡음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그 거리가 멀어지면 예수님의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그러면 삶의 이 곳 저 곳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가져다 댈 수 있는 핑계나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생겨나는 진짜 이유는 내가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있고, 그래서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삶이 삐걱거리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꾸 갈등과 다툼이 깊어져 갈 때, 그 때는 예수님을 바라 보십시오.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서 다시 그 분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다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처방을 내린 바울은 이번에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권면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구절에 갑자기 “너”는 빌립보 교회 전체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서 이 권면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성경적입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이니 한 사람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눈에,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 교회는 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한 영인 성령님을 그 안에 품은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니(네) 문제 내 문제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것은 모두의 일이 됩니다. 한 사람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일은 그 두 사람의 일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인 빌립보 교회 전체의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 있으며, 그래서 ‘우리’라는 말이 거의 사라져 버린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도 정말로 그렇게 여기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내 옆 사람의 죄가 나의 죄이고, 내 옆 사람의 문제가 나의 문제다.’ 실제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적인 문제와는 상관없이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우리가 한 교회 안에 속해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의 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다쳐서 감염되어 곪으면 손가락만 아파야 하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온 몸 전체가 다 끙끙댑니다. 마찬가지죠. 두 사람이 크게 다투면, 또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저지르면 그 당사자들만 피해를 보고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가 몸살을 앓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받아들이기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 사실을 모르고 있더라도 교회는 한 사람일 수 밖에 없으며, 그래서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일은 결국 ‘모두’의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너’라는 단어를 통해서 바로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바울이 한 사람인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요청한 것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정죄하거나 징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그들을 “도우라”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들 또한 빌립보 교회라는 한 사람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을 여전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부릅니다. 분명히 두 사람은 지금 교회에 지도자들로서 교회를 하나로 묶기는 커녕 오히려 둘로 갈라지게 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전쟁으로 말하면 바울은 그 두 사람을 여전히 자신의 훌륭한 전우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치거나 비난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끌어안고서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며, 또 존중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물의를 일으킬 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또 그런 사람들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까요? 성경이 말하는 기본원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교회의 일부, 한 몸의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그러한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혹시 잘못을 바로잡고 해결할 때에도 그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 마치 교회나 성도들의 마땅한 권리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되고, 항상 그 사람들을 돕는 심정으로 그렇게 해야하며, 여전히 그를 귀히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 또한 성도들이 품어야 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해서 더럽다고 포기하고 내 치시는 대신에, 우리대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몸된 교회 안에 있으며 여전히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개인적으로나 혹은 공동체적으로나 크고 작은 갈등과 다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됨을 유지해야 하며 또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던 그 마음을 품고 그 마음으로 서로를 용납하며 끝까지 존중해 주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내가 정죄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끝까지 그를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교회란 기쁨의 원천입니다. 교회가 아픈데, 교회가 힘든데 그 속에서 행복해 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교회의 화목을 유지하며 또 깨어진 화목을 회복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항상 예수님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 오실 날까지 함께 싸워야 할 성도들과 함께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도와주며 서로가 서로를 든든히 서게 하는 믿음의 전우들로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