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0404to07 -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2(빌립보서25).pdf
본문 : 빌립보서 4장 4-7절
목적 : 주 안에서 굳게 서야함을 생각한다.(2)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 본문의 첫번째 구절입니다. 너무 위대한 말씀입니다.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구요. 그래서 이 말씀은 정말 많은 성도들이 정말 사랑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말씀이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대충 기뻐하라고 하시면, 뜨문뜨문 기뻐하라고 하시면 그래도 한 번 해 보겠는데, 항상 기뻐하라니 두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면서 꼭 그렇게 항상 기뻐해야 한다고 하다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고 느껴집니다. 또 그래도 기쁨이 있을 때 이런 말씀을 읽으면 괜챦지만, 기쁨을 잃어버렸을 때 읽으면 힘이 되기 보다는 약간 짜증이 날려고까지 합니다. 누군들 기뻐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게 안되는 것을 어쩝니까?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무리 해도 안되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남의 속도 모르고 마냥 기뻐하라고만 하니 참 야속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의 예전 모습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말씀에 순종해 보려고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런 묘한 감정과 좌절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잡혀있죠. 그런 바울을 보면서 믿음은 흔들리죠. 슬슬 박해는 시작되려고 하죠. 이단들은 교회를 어지럽히죠. 게다가 교회 안에서는 힘센 여자들이 아웅다웅하고 있죠. 정말 기뻐하고 싶지만, 기뻐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잘 안됩니다. 번번히 실패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저 기뻐하라는, 항상 기뻐하라는 권면만 들려주고 있으니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조금은 야속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기쁨의 문제 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명령들과 권면들이 모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만 사랑하라”, “하나님이 완전하시듯이 너희도 완전하라” 다 찾으려면 끝도 없는 정말 아름답고 거룩한 명령들은 실제로는 우리에게 그런 비슷한 감정들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 그러나, 이 모든 권면과 명령들을 분명히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너의 힘으로 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완전히 순종하지 않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권면과 명령들은 당장 완전한 수준의 순종을 요구하기 보다는 완전한 순종을 향해서 계속해서 가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너의 힘으로 하라’고 하지 않고 항상 주님을 의지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깨닫기 까지 성경의 거룩한 요구들은 듣기는 좋지만, 현실성이 없는 요구들로 들리기가 쉽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는 성도들이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해도 안된다고 생각하니까요.
“항상 기뻐하라,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구절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가당키한 한 요구입니까? 항상 기뻐하라니요. 꼭 그래야 한다니요. 그러나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를 더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요구이고 권면입니다. 너무 귀하고 눈물마저 흐를 정도로 고마운 권면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 기뻐할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이유에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그럴 때도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 조차를 잊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이런 말씀을 통해 그런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것을 포기해서는 안되며,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분명히 다시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게다가 오늘 말씀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네가 네 힘으로 항상 기뻐해라. 죽어도 기뻐해야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뻐하라는 권면을 그런 식으로 심각하고 강압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절대로 놓치면 안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짜증만 생기고 좌절감만 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분이 도와주시고, 그 분이 하게 해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기쁨을 향해서 계속해서 가까이 갈 수 있고, 정말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사도 바울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의 가장 큰 피해자요, 또 당사자였지만 그는 감옥 속에서도, 생사를 결정할 판결을 앞에 놓고 있으면서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 자신이 주 안에 있고,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 기뻐하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머지 내용들은 바울 자신이 사용했던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고 회복할 수 있었던 비결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비결들조차도 만약 바울이 ‘주님 안’에 있지 않았고 그래서 자기 힘으로 하려고 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이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항상 그가 ‘주 안에’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성경의 귀한 교훈들과 권면들, 그리고 놀라운 복들이 우리들과 상관있어지고 효과있는 것들이 되려면 그래서 우리는 ‘주 안에’,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벗어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벗어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나와 상관없고 의미없는 것들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힘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면 가능합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려면 나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것들을 잘 대처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두 가지 원인은 바로 ‘사람과 일’입니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고 악을 행하면 우리는 그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고 또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의 기쁨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어떤 일들 때문에 우리가 근심하고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 일이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만들어 내는 어려움들을 신앙적으로 모두 적절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이 두 가지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갈 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지금 사도 바울을 가장 힘들게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랫동안 아끼고 목회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유대교 이단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더 불리하게 만들려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 안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역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인간성 자체에 대해서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바울도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금방 그런 감정을 이겨내고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쁨을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쉽게 말해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사용한 검증된 방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권면도 권면 자체만 보면 얼마나 이상한 권면인지 모릅니다. 용서가 안되서, 넉넉한 마음이 생겨나질 않아서 힘든 것은데, 고작 한다는 권면이 용서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쌀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픈 사람에게 배 고프면 밥해 먹으라고 충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뒤에 오는 말때문에 그 어떤 말보다 적절하고 능력있는 권면이 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넓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받아주신 주님이 아주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할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아가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그 일을 그 분의 능력으로 도와주신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용서할 수 없고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수 없을까요? 우리가 다른 이들을 용서하기 힘들 때, 그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그 때 주님이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응원하고 계시며,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우리를 돕고 계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용서하기 힘든 사람들도 훨씬 쉽게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재림을 기다립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면 주님이 모든 것들 을 모두 다 제 자리로 돌려보내 주시고 바로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면 주님은 상을 줄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벌을 내릴 사람에게는 정확하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악하게 행동한 사람은 그 때가 되면 그 사람은 자기 행동에 대한 가장 정확한 주님의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공의로운 분이셔서 악인에게 징벌을 내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 사람을 계속 미워하고 그 사람에게 직접 갚아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렇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하려는 교만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믿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은 주님의 일이고 또 그 분만이 정확하게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고정해야 합니다. 또 만약 내가 나에게 악하게 군 사람을 용서하고 관대하게 대한다면 우리는 그 일을 덕분에 하늘에서 큰 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야 말로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 더 큰 상을 받는 것은 하늘나라의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그저 관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저 관용하라는 말보다 훨씬 강하고 적극적인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악하게 대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물며 그런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 우리의 관용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이 세상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전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관용하는 일은 우리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하나님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일은 하늘의 상이 아주 큰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만큼 상이 큰 그런 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는 두번째 문제, 그러니까 우리 인생의 여러가지 ‘일들’ 때문에 생겨나는 염려와 근심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염려와 근심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오지 않을까, 그러면 내 인생은 불행해지고 비참해지지 않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추측이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바울은 이 근심의 문제의 해결책, 근심으로부터 우리의 기쁨을 지켜내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바울이 제시하는 염려의 치료책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염려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염려입니다. 마치 한국전쟁 때의 중공군들처럼 끝없이 밀려드는 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그래서 염려를 붙들고 싸우려고 들다가는 끝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염려란 염려는 일단 모두 멈춰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염려의 제목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라고 말합니다. 내 일에 대한 염려는 기도로,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한 염려는 간구로 바꾸어서 자기 속에 두고 끙끙거리지 말고 하나님께 알려드리라고 말합니다.
먼저 우리가 싸워 이겨야할 오래된 적수인 염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근심인 염려는 신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의 짐을 내가 짊어지려는 시도”이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부당한 걱정”입니다. 미래는 아직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미래는 언제나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미래의 짐을 내가 지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주제넘는 것입니다. 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 또한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도 염려하고 싶어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그 염려의 피해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는 어떻게 보든지 나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닌 일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제넘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이기도 합니다. 염려는 신앙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든지 염려는 스톱해야만 합니다. 어떤 염려든지 당장 그쳐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 염려의 이유를 원래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와 간구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기도를 드리고 나서도 여전히 기도드리기 전과 똑같은 염려에 시달리는지 모릅니다. 예전의 목사님들은 이런 모습을 커다란 보따리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다 풀어놓았다가 기도가 끝나면 다시 주섬 주섬 챙겨서 짊어지고 나오는 그런 모습으로 비유했는데 굉장히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기도를 드리고 나서도 일이 이렇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기도에 감사가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냥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말합니다. 근심과 걱정거리를 가지고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한다? 이것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여러분, 이런 감사가 과연 진짜로 가능할까요?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감사를 드리려면 우선 감사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꿔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좋은 일, 복된 일이 생겼을 때, 그 일들에 대해서만 감사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염려거리가 있을 때도 우리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내가 품고 있는 염려가 아무리 크고 무거울지라도 그것보다 언제나 더 크신 분이시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고,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감사가 빠지면 그 기도는 넋두리가 되기 쉽습니다. 물론 넋두리도 기도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아닌 것은 아니죠. 그러나, 넋두리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는 기도가 아니라 여전히 걱정거리와 나 자신에게만 묶여 있는 채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는 다람쥐 챗바퀴 돌듯하는 기도가 되기가 쉽습니다. 여전히 염려라는 틀 안에서만 움직이니까요. 그래서 기도한 후에도 여전히 그 전과 똑같은 근심에 빠져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틀을 깨뜨리려면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우러 나오는 감사를 더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기도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합니다. 기도를 넋두리나 청구서가 아니라 참되고 능력있는 기도가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릴 때, 우리에게 어떤 복이 주어지는지에 대한 아주 놀라운 약속 한 가지를 전해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떤 사람은 곧 죽을 것같이 힘들어 하기도 한다는 것은 염려의 문제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 그러니까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이것은 또한 만약 우리가 마음만 지킬 수 있다면 근심의 문제는 얼마든지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7절은 바로 이런 능력이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로 드리는 기도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얼마나 놀랍고 은혜로운 구절입니까? 얼마나 능력있는 구절입니까?
거듭 말씀드리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근심과 염려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고, 또 믿지 못합니다. 그것은 근심과 염려를 넘어서지 못했던 자신이 경험만 생각하느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을 세상이 주는 평강과 비슷한 수준의 평강으로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주는 평강은 어떤 평강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강은 지극히 상식적인 평강입니다. 무엇이 있을 때는 평강하지만, 없으면 평강이 사라집니다. 아니, 있다가 없어졌기 때문에 더 심각하게 흔들리게 되는 그런 평강입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평강이 이런 평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주는 평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은 이런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강, 추측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강은 항상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평강하죠. 있을 때만 평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없는데도 평강합니다. 빼앗기고 잃어버렸는데도 평강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걱정이 되어야 하는데 걱정이 안되고, 두려워야 하는데 두려움이 생기질 않습니다. 너무 그래서 불안하지 않아서 불안해질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걱정이 안되고 두려움이 생기질 않는 걸 어떻게 합니까? 일부러 없는 염려와 두려움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말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강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어서 절대로 이런 평강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은 항상 변하고 움직이기 때문에, 그 세상이 변하고 움직일 때마다 평강도 같이 흔들리니까요. 그래서 이 세상이 주는 평강은 결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서 염려를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평강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이 땅에 속한 것들에 이유를 두고 있지 않은 평강만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에 염려가 자리잡지 못하도록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에서 나온 감사로 드리는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런 평강,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한 평강을 주셔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염려로 부터 지켜주시겠다고 말입니다. 정말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 모릅니다. 세상 누가 이런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누가 이런 복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는 적들로 둘려싸여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기쁨을 빼앗으려고 하고, 수많은 일들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 합니다. 사람들을 향한 미움과 정죄가, 그리고 미래의 일들에 대한 염려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쁨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것들을 떠나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과 일들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주님은 그 것을 위한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연습하고 순종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만 한다면 주님은 분명히 약속을 지키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도우시며,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주님, 온 세상의 모든 염려를 합한 것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관용하려고 애쓰고 또 감사로 기도드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고, 또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약속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 복을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 굳게 서서 관용하고 기도함으로써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