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0106to11 -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사도행전5).pdf
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두 가지 가장 중요한 말씀 중에서 첫번째 말씀이었습니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두번째 명령과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 첫번째 약속이 둘 중에서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 안에서 ‘예루살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그리고 성령세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끼워맞춰서 그것이 하나의 이스라엘의 해방과 승리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있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때가 되면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구약 성경의 말씀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서 2장 2절과 3절 말씀인데요. 거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데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 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임이니라”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해방되고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그 때가 지금이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고,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분명히 언젠가는 한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는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그렇게 하실지는 완전히 하나님의 고유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게다가 지금 주님의 말씀은 결코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구요. 그러니 지금 제자들이 이스라엘이 해방되고 온 세계의 중심이 되는 일에 신경쓰고 관심을 가지는 일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아얘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대위임령이라고 부르는 어찌보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오직...” 주님은 ‘오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령세례, 성령충만함을 생각할 때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내용하고만 연결시키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성령님께서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시고 또 그들을 통해서 현실적으로도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는 하시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런 것들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연결시켜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듯이 말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은 이것이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생각할 때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못 박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성령충만함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과 관련해서 제자들이 관심을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세례를 주시는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아주 중요한 것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주님의 이 말씀을 표어로 만들어 외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전도회 행사였는데요. 다 일으켜 세우고는 이렇게 따라 외치게 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자”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자” 그 전에도 이런 표어를 많이 보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 따라 이 표어가 원래 주님의 말씀과는 심각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리’자 한 자 차이이지만 두 말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의 역할을 하게 하시려고 오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성령을 부어줄테니 너희는 너희 힘으로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부어주면 그제서야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 성령님께서 너희를 나의 증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그들의 의지나 결단, 혹은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철저히 성령님의 다시 만드시고 세우시는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선한 소원을 품는 것, 좋은 뜻을 세우고 결단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답게 제대로 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고, 또 그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은 철저히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은사입니다. 그 분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면,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모든 일에 우선하여 우리가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그 열기가 많이 식었지만 한 때 선교한국이라는 선교동원집회가 정말 온 교회들을 흔들어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했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에 참석하면 마지막 쯤해서 꼭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집회 인도자가 “선교사로 헌신할 분들은 손을 들고 일어서십시오.”라고 초청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여기 저기서 정말 한 번에 수천명씩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울며 불며 헌신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거의가 그 뿐입니다. 그 중에서 선교사로 나가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 젊은이들의 마음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진실이었겠죠. 그렇지만, 대부분은 그 당시의 자기 감정에 북받쳐서, 그리고 자기 의지와 열정으로 결단을 한 것이니 그게 열매로 이어지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도 그런 친구가 하나있는데요. 제가 대학부 때, 언제부터인지 대학부 안에서 우리가 몇 년도까지 몇 명의 선교사를 보내자고 하는 비젼이 생겨났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서는 제가 보기에 정말 말도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였습니다. 비젼이 세워졌으니 누군가는 움직여야 하는데, 사실 거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는 중에도 그 비젼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제 친구였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니 그 친구가 움직였습니다. 우선 선교사가 되겠다고 자원하였고 그래서 자신이 지원한 선교사역에 필요한 공부를 하겠다고 외국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부를 다 마쳤지만 지금은 선교사가 아닙니다. 물론 크게 보면 선교에 관계된 일을 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친구가 처음 헌신했던 그런 선교사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사례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선배의 경우인데요. 선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워낙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그 선배가 선교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선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부를 하러 미국까지 갔구요. 그런데, 지금은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뭐 저 자신도 비슷한 사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했다가 이렇게 목회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런 사례를 말씀드리는 것은 결코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상반되는 사례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리 하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결코 개인이 주도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며, 오늘 말씀대로 하면 예수님의 증인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되게 하셔야만 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증인이 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일은 성령님의 내적인 부르심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어서 합당하게 일하려면 반드시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권능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로 사역을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 당시로는 굉장히 뼈아픈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실패에 대한 경험이니 이해하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정말 굉장히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인 설교와 관련해서는 칭찬만 듣고 살았으니 잘 난 구석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콧대가 높았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우스운 일이지만 그 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멍청하게 살던 어느날 문득 수 년간 사역한 결과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너무 허무했습니다. 칭찬은 있었고, 사랑은 받았지만 의미있는 열매가 없었습니다. 사실 열심히 했습니다. 하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랬습니다. 왜일까? 왜일까? 왜 열매가 없을까?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러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말입니다. 세속적인 일이었으면 달랐겠죠. 잘 하기만 해도, 칭찬만으로도 충분했겠죠. 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욕 먹으면서 사역하지 않게 해 주신 것은 정말 큰 은혜였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잘 한다는 소리를 듣고 인정을 받는 일은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민과 기도 끝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혀 성령충만하지 않은 채로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성령충만함과 그 일에 걸맞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권능이 필요한데 그것을 구하지 않았고, 그것을 덧입지 않은 채로 그야 말로 일만 잘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궁핍한 결과 밖에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저는 성령충만함과 주님이 덧입혀 주시는 성령의 권능에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었고, 그 기도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우리 교회를 섬기고 부터는 그 기도가 더 절실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현실적으로 볼 때, 성령충만을 받기 전에 부르심을 받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하기도 합니다. 목사 뿐만 아니라, 장로로, 교사로, 성가대로, 또 이런 저런 부르심을 받아 교회와 하나님을 섬깁니다. 실제로 언제부터가 성령충만한 것인지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순서가 바뀌는 일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일 답게 하려면 우리에게는 성령충만함이 반드시 필요하고 성령님께서 그 일에 맞게 허락하시는 권능이 꼭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지 간에 계속해서 성령충만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또 성령충만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구해야 합니다.
전도라는 더 직접적인 일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성령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직접 연결시키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그 복음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반드시 성령충만 해야하니까 성령충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전도란 말 그대로 복음이라는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일이 아니죠. 그런데, 우리의 전도가 열매를 맺으려면 복음을 전하는 일 말고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충만함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인도되어 오지만 남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물론 사람들의 책임도 있겠죠. 잘 잡아주고 이끌어 주지 못한 교회의 책임도 크겠구요. 그 책임만큼은 핑계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혹시 우리는 우리의 전도가 실패하는 더 중요한 이유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전도하기 전에, 사람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기 전에 우리가 성령충만함을 구해야 하며, 또 성령님의 힘을 덧입어 전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꼭 전도하기를 원하고, 또 구원얻는 일을 돕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부터는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전에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먼저 그리고 더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도록, 내가 성령님의 권능을 덧입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한 증인다운 증인, 능력있는 증인이 되도록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 모양이나 역할은 다르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부르심은 성도라면 모두 받는 것이어서 그 누구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에 순종해야 하며 또 그 부르심을 부르심답게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결코 우리의 힘과 능력만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부르심대로 살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권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통로이고 직접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증인다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성령충만할 때, 성령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의미있는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지금의 모습에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성령충만하지 않다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제자들도 성령충만함을 덧입기 전까지는 성령충만함을 자기 나라의 해방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정도로 성령충만함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임하시자 그들은 세상을 복음으로 떠들썩하게 하고 완전히 뒤집어 놓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자리, 이 부르심의 자리에서 성령충만하면 됩니다. 바로 여기서 성령님의 권능을 덧입기 위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다운 증인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를 그렇게 세워가시고 빚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의 성령님께 붙들린 성도들이 되어서 부르심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있는 증인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