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0106to11 -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2(사도행전6).pdf
본문 : 사도행전 1장 6-11절
성도 여러분, 요즘 어떻게 이전보다 성령충만을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십니까? 만약 우리가 성령충만하지 않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잊지 말고 성령충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주실 때까지 잊지 말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충만 해야 하니까요. 성령충만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최고의 복이고 또 가장 중요한 복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그렇고 성령충만의 복보다 더 큰 복도, 능력있는 복도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복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극히 작은 것들을 받는 것이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령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 그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께서 내 속에 들어와 계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일은 상상도 잘 되지 않는 어마 어마한 일입니다. 이것은 원래 제가 제 호주머니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말이 안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아무리 크다고 한 들 끝이 있지만, 그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무한히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몸 속에 무한하신 하나님이 들어와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그것이야 말로 우리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특히 성령님은 온 우주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직접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력이나 생명과 관계가 깊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그 분의 능력과 생명이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면 기쁘고 활기차며 또 사람들을 고치고 변화시키며 영혼을 살리는 일을 힘있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의 첫번째 수혜자는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지적하셨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던 것, 그것은 예루살렘이 제자들에게는 아픔과 고통의 땅, 실망과 좌절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거기서 제자들이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롭고 능력있게 회복되어 오히려 거기서부터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보겠지만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입은 후에 가장 먼저 복음으로 점령하기 시작한 땅은 바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큰 실패와 좌절, 그리고 자신에 대한 철저한 실망을 안겨준 바로 그 자리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승리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가장 먼저 하시는 일입니다. 그 분은 생명의 영, 능력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입은 사람을 가장 먼저 살리시고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전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일, 그러니까 그의 삶의 자리를 변화시키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전에 패배한 바로 그 자리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는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은 어린 시절에 대인공포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 앞에 나가 발표를 해야할 때면 내용을 달달 외워서 거의 허공만 바라보며 재빨리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학에 다닐 때 갑자기 학교 예배의 대표기도를 부탁받고 얼떨결에 수락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심과 걱정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도와주시면 앞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말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그렇게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되었습니다. 대표기도를 무사히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 분이 이제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설교자 중의 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를 가장 큰 공포에 떨게했던 강단이 이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하나님을 위한 그의 승리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내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령님께서 성령충만한 사람에게 행하시는 일입니다. 패배와 좌절의 이유가 승리의 이유가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시는 일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 우리의 삶에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우리를 좌절시키고 힘들게 하는 우리의 약함과 아픔에서 회복될 수 있고 바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온전히 섬기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선 우리 자신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치료하시고 든든하게 하시고 더 온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만드십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스며들어 옵니다. 그것을 ‘권능’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주시는 이유는 그래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를 위한 효과있고 능력있는 증인들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우리 앞에는 얼마나 많은 장애와 반대가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호락호락 복음을 듣고 교회로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정말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라서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둘러치고 있는 그 단단한 벽을 뚫어낼만한 성령의 권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더 똑똑해지고 주관이 뚜렷해 집니다. 사고방식은 상대화 되고 또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벽이 점점 더 높아지고 두꺼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권능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그 벽을 뚫을 드릴이 약해지고 부실해 지고 있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전도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벽은 예수를 믿어야 할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해야 할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벽 또한 제거되고 허물어 지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 벽이 허물어지는데도 성령님의 권능은 꼭 필요합니다.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는 예수를 믿지 않으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죠. 그래서 저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면서 더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사도행전을 연구하고 설교하면서 그 기도는 “하나님, 증인의 영, 전도의 영을 허락해 주세요. 복음을 들고 거리고 뛰쳐 나갈 수 있는 그런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로 좀 더 구체적이 되었고, 더 간절해 졌습니다. 주님은 언젠가 제가 전도지를 들고 입에는 복음을 가득 채운 채로 거리로 뛰어 나가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장목사가 전도지 들고 저 앞 건널목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데 허물어져야 할 장벽은 우리 안에 더 많고 또 더 든든할지도 모릅니다. 전도에 대한 무관심, 부끄러움, 꼭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하는 교만한 마음,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마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벽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 힘으로 허무는 것은 너무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 힘으로 허물면 한 번 두 번은 어떻게 억지로 되겠지만 또 제자리로 오고 맙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고 또 성령님의 권능을 덧입어야만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루살렘,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 말씀만 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지역적인 범위가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도행전은 결국 복음이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결국 땅끝인 로마까지 퍼져나갔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 속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와 로마는 단순히 어떤 지역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의 좌절과 실패를 극복해 내는 일도 커다란 장벽이었지만 이 두 지역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극복해 내는 일은 유대인인 제자들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는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혹시라도 사마리아인들이 지나가면 그 발자국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태워버릴 정도로 경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나 혈통적인 면에서나 이방인들과 섞인 변절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지 결코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는 훨씬 더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정복자들입니다. 약속의 땅을 식민지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유대인들을 죽여서 그 피를 섞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스스로 복음을 전해서 그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해야한다는 생각도, 하고 싶다는 의지도 없은 일이었으니까요.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일보다 더 힘들고 꺼려지는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엇이 필요할까요?
제가 요즘 성령충만함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도 하고 묵상도 하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성령충만함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너무 감사한 은혜입니다. 그런 깨달음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기본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성령충만함이란 비워진 내 자아를 성령님께서 채우시는 것이라는 깨달음 이었습니다. 저는 이전에는 성령충만함과 자신을 비우는 일을 전혀 연관짓지 못했습니다. 그저 덧입는 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경말씀들도 그렇게 증거하고 있지만 그저 생각해 보아도 비워지지 않은 나의 속을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채우시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릇 하나를 두 가지 모두가 다 각각 채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성령님으로만 가득 차려면 자신이 비워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자신을 비우는 일 또한 원하고 바랄 수는 있어도 절대로 스스로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도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 분이 권능으로 내 자아를 비워내셔야만 성령충만함을 온전히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는 좁디 좁은 나 자신이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우리의 사마리아로, 그리고 우리의 로마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충만함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만약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비워내는 일이 필요하더라도 성령충만을 꼭 받고 싶으십니까? 만약 우리가 비워내는 일만 생각하면 이 일은 참 힘들고 어렵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비우는 것은 채우기 위한 작업이지 비우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입니다. 못난 나의 자아, 궁핍한 나의 자아, 항상 나를 실망시키기만 하는 내 자아를 비워내고 성령님의 그 부요한 능력과 충만한 생명으로 나를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입니다.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아가 낫겠습니까? 아니면 성령님이 낫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아로 여러분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을 가득 채우시는 것이 더 낫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진짜로 유익하겠습니까? 제가 이 계산을 끝내고 나니 저는 더 이상 나의 자아를 비우고 죽이는 일에 대해서 무겁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힘들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제난 내가 나를 온통 다 드릴테니 나를 비워달라고 하나님께 조르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은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집어넣을 돈만 생각하고, 투자할 액수만 생각한다면 어디 사업을 할 수 있고 장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했을 때 되돌아올 수익을 생각하니 돈을 꾸어서라도 투자를 하고 장사를 하는 것이죠.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자꾸 내려놓고 포기할 것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가치를 아십니까? 성령님의 능력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투자해서 하나님을 얻는다면, 내 자아를 비워내고 성령충만함을 얻는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있겠습니까? 이런 거래를 하지 않는다면 참 바보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령님은 우리 힘으로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위한 권능의 영이십니다. 우리 중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장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위한 가치있고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또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그렇지만,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한 영광스러운 삶을 살려면 버려야 할 것도 많고 넘어야 할 벽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성령님의 권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예루살렘을 극복하고, 사마리아를 넘어서 로마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충만과 성령님의 권능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충만함이 없으면 우리는 예루살렘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하나님을 위한 영광스러운 삶, 나를 묶는 수많은 것들로 부터 풀려난 자유롭고 능력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나를 묶고 있는 이 걸리적 거리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나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높은 벽들을 허물어 낼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풍성하고 얼마나 행복해 지겠습니까? 얼마나 당당하고 힘찬 삶을 살겠습니까? 그런 삶은 또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하겠습니까?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꿈꾸던 그런 삶이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묶고 있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풀어 예수님을 위한 능력있는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성령의 권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더 열심히 성령충만함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너를 비우면, 나를 주시겠다고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에 꼭 응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거래에 꼭 응하시기 바랍니다. 당장의 두려움과 편안함 때문에 이 최고로 많이 남는 장사를 포기하지 마시고 오늘 기도드리는 중에 하나님과 계약을 맺으십시오. 나를 투자할테니 하나님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을 주셔서 그 권능으로 우리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우리의 사마리아를 넘어 우리의 땅끝으로 나아가 힘있게 예수를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