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501to20 -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마가23).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5장 1-20절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학시절에 제가 다니던 대학청년부의 수련회에 참석했다가 귀신에 들린 사람을 보았고, 또 그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싸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 싸움을 하기 전까지 저는 귀신에 대해서 굉장히 막연하게 생각했고 또 아이들처럼 무서워하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과 싸운 후에 귀신에 대한 마음과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귀신, 그러니까 악한 영에 사로잡혔을 때, 그가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사탄을 향한 분노가 되었고, 그 아이를 보면서 귀신들린 사람을 굉장히 불쌍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는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굉장히 기뻐지기도 하지만, 그 때 그 아이의 생각이 나서 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거라사는 갈릴리 바다에서 남동쪽으로 55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인데, 데가볼리라고 부르는 열 개의 이방인 도시들로 이루어진 넓은 지역의 일부입니다. 이곳이 바로 주님이 4장 35절에서 아주 가깝다는 듯이 ‘저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던 그 건너편이었습니다. 거리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께서 거기까지 가시기 위해서 굉장히 먼 거리를 여행하셔야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거기로 가셨던 것이 여기 저기 다니시다가 우연히 그렇게 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꼭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어서 계획하시고 또 진행하신 일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게다가 21절을 보면 예수님이 딱 한 가지 일을 행하신 후에 바로 그 지역을 떠나 유대로 돌아오시는 것으로 봐서 바로 그 한가지 일을 하는 것이 그러한 장거리 여행의 목적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목적은 바로 거라사의 광인을 만나서 그를 고쳐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땅인 거라사, 그리고 이방인, 게다가 귀신들린 사람, 그것도 무덤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정말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러한 부정함, 그러니까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그리고 가족이나 자기 자신까지도 감당할 수 없는 그러한 더러움 때문에 그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더러움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꼭 치료해 주고 제거해 주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피하고, 그것 때문에 무시하며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삶에서 그런 것들을 치워주시고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려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늘영광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 오셨으며, 또 그런 우리를 찾아다니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참 괜챦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 속에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이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혹은 남들 모르게 행했던 모든 일들이 전부 다 알려진다면 그 때도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해 줄까요? 또 내가 다른 사람들을 속속들이 안다면 그 때도 나는 그 사람에게 지금처럼 친절하게 대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부부나 부모자식 지간이라도 그래서 서로에게 알리지 못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죠. 우리는 사실 그런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약간 있을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다 커다란 부정함, 절대로 남에게 알려줄 수 없는 부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부정함 때문에 또 서로를 꺼려하죠.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고 지극히 순결하신 우리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찾아오십니다. 하늘에서 땅, 그 멀고 먼 거리, 우리들 쪽에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그 먼거리를 마다 않고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시작되고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주님의 찾아오시는 은혜 덕분입니다. 마치 여인이 잃어버렸던 열 드라크마처럼 주님이 다시 찾아 모아놓으셔서 여기 이렇게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가 얼마나 큰 은혜의 자리인지 모릅니다.
본문은 그 광인,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 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니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악령에 사로잡힌 그 남자는 그 악령 때문에 괴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쇠사슬과 고랑을 깨뜨릴 정도로 엄청난 힘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힘이 세기만 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 좋죠. 문제는 이 힘이 세우고 돕는 힘이 아니라 무너뜨리고 부숴뜨리는 파괴적인 힘이라는데 있습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통제불능의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 귀신들렸던 그 아이와 싸울 때, 그 아이를 제어하느라고 건장한 남자청년 넷이, 그것도 그 아이의 팔 다리의 관절을 타고 앉았습니다. 너무 난동을 부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 그렇게 큰 덩치도 아닌 그 아이가 그 네 사람을 들썩 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관절을 눌린 상태에서 말입니다. 정말 큰 괴력이었습니다. 실제로 귀신에 들리면 육체적으로도 자신의 힘이 아닌 큰 힘을 지니게 됩니다. 문제는 그 힘을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통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헐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악한 영이 주는 힘은 육체적인 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 사탄이 주는 힘은 다른 힘들도 있고, 실제로 그 힘이 더 위험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힘’을 미끼로 우리 속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돈을 줄테니 네 신앙을 달라고, 권력을 줄테니 네 양심을 달라고, 네가 원하는 그 힘을 줄테니 나를 네 주인이 되게만 해 달라고 우리를 꼬득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셨던 것과 똑같은 유혹이죠.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힘을 얻으려고 그 거래에 응하고 또 그렇게 해서 원하는 종류의 힘을 얻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게 얻은 힘은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파괴적인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헤치고 있었더라” 힘을 얻었다면 행복해야죠. 그 힘으로 남들도 행복하게 해 줄수 있어야 하구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그 힘이 하나님이 아니라 악한 영에게서 나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땅, 더러운 땅인 무덤 사이에 거합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으로 광야로만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두렵게 할 뿐 아니라 자신도 고통에 소리지르고 자신을 파괴합니다. 모두가 힘 때문입니다. 자신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악한 영이 준 힘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힘’을 얻으려고 악한 것을 선택하고 악한 방법을 사용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힘을 얻으면, 그 힘이 자신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 줄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원하는 힘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을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악에서 나올 수 있는 힘은 파괴하고 부수는 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하실까요? 왜 죄를 짓지 말고 정직하게 살라고 하시며, 힘들어도 법을 준수하면서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가라고 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선한 일과 선한 과정만이 우리의 삶을 세우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심을 믿는다면 그래서 우리는 힘들어도 선한 길을 가야 합니다. 당장은 작고 연약해 보여도 그 선한 힘만이 우리 자신과 세상을 다시 세우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령이 거라사 지방의 한 사람의 주변을 불행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망가지게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악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심각하게 악령에 사로잡힌 이 남자가 예수님께 오더니 풀썩 꿇어앉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그 기세등등하던 귀신, 그렇게 힘을 휘두르며 통제불능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그 귀신은 어디에 갔습니까? 그 귀신은 어디가고 얌전하고 겁많은 한 사람만 남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간청하는 그 사람, 아니 그 악령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니 또 고분고분 대답합니다. “우리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군대귀신’이라고 부릅니다.” 여기 사용된 ‘군대’라는 말은 ‘레기온’이라는 로마의 부대단위인데 예수님 당시로 말하면 여단규모의 부대를 말합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 부대는 무려 6,000명이나 됩니다.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왜 그 광인이 그런 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 안에 6,000마리나 되는 떼귀신이 들어앉아 있으니 그 사람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군대귀신, 6,000마리나 되는 더러운 악령들이 자신들을 내어쫓지 말기를 간청하면서 언덕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돼지떼에게 들어가도록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고 그래서 그리로 들어간 귀신들 때문에 2,000마리나 되는 돼지떼들이 물에 빠져 몰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돼지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그것도 2,000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자신의 신병에 비관한 나머지 집단으로 투신자살했다고 하는 보도를 보신적이 있습니까? 지난 번에 구제역이 돌 때 방송에서, 담당자들이 돼지를 땅에 묻으려고 하자 그 구덩이를 기어오르려고 기를 쓰는 돼지들을 모습을 보았습니다. 돼지는 절대로 자살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도살장에서도 죽지 않겠다고 제일 시끄럽게 구는 놈들이 바로 돼지죠. 그런데, 그런 돼지가, 그것도 2,000마리나 되는 놈들이 모두 함께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이것이 악령이 하는 일입니다. 미치게 하고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것. 심각한 경우에는 스스로의 목숨마저도 버리게 만드는 것 말입니다.
요즘 우리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한 쪽에서는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소식들을, 또 다른 한 쪽에서는 가슴을 아프게 하는 소식들을 수없이 접하게 됩니다. 성폭력, 왕따, 자살, 사람들의 부정과 비리... 정말 이제는 보는 사람들을 무덤덤하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 자주 어둡고 아픈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온 나라가 이런 일들 때문에 신음하며 앓고 있지만 딱히 해결책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놓아도 그것들을 모두 끊어버리고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자신까지 헤쳤던 광인처럼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법이나 제도로 제어하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이미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고 더 심각하게 사로잡혀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남을 헤치고 나를 헤치는 일들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고 있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 사회야 말로 그 어떤 때보다 예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악과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지만 결코 자신 안에서 해답을 얻을 수 없는 상태니까요. 안타까운 점은 그렇게 남을 망가뜨리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세상에서, 스스로도 신음하며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그 바른 답을 찾으려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정은 믿는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내면의 공허함, 두려움, 그리고 상실감과 상대적인 박탈감, 거칠어져만 가는 마음... 믿는 사람들 조차도 이런 내면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참된 해결방법을 찾는 대신 손쉬운 위안거리와 임시방편에 의존합니다. 어찌보면 그렇게 하루 하루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 귀신들린 세상과 동화되어져 가며, 자신의 내면이 허물어지는 것조차 막아내지 못합니다. 마치 광인이 남을 두렵게 하고 고통을 주면서 자신도 서서히 허물어져 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하고, 광인 스스로도 망가지게 만들었던 군대귀신, 그리고 2,000마리의 돼지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런 악령이었지만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목숨에 대해 구걸했으며, 예수님의 허락을 받고서야 돼지떼에게로 들어갈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악한 영을 다스리시고 제어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거라사 지역 전체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해결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답은 예수님께만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가야함을 알려줍니다. 물론 저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가 일시에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로 온다고 해도 세상이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의 문제, 교회의 문제입니다. 교회는 거의 항상 점점 더 망가져 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혀를 차며 걱정 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더러는 정죄하고 더러는 안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고 있고, 성도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비판하고 안스러워 하는 그 세상을 다스리는 영이 우리들에게도 심각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거기에 답이 있다면,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고 참된 평안과 만족이 있다면 저는 제가 나서서라도 여러분에게 세상을 따르라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세상의 영, 그 군대귀신을 따라나선 이 세상과 그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과연 참으로 행복해 합니까? 참된 만족과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채로 자기 방식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운 시대가 되었고, 그 어느 시대보다도 자신이 원하는 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여전히 그런 세상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만족을 찾고 또 행복과 평안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조차 이미 실패한 방법인데도 그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탄은 힘을 줄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 힘을 주고 나면 다른 것은 다 빼앗아 갑니다. 게다가 그 힘때문에 그 사람까지 망가지게 합니다. 악한 영은 악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리 삶에 선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상하게도 힘은 잘 안 주시지만 다른 것은 다 주십니다. 아마도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 어떤 것도 힘이 되어서는 안되고 예수님만이 힘이고 능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 그러면 믿는 사람들까지도 우상숭배자들이 되어버리고 마니까요. 힘을 얻어도 그 힘이 악한 힘이라면, 그리고 그 힘을 제어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면 그 힘은 없느니만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주는 힘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힘을 얻고 다른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면 그건 결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건 오히려 그에게 묶이는 것입니다. 그 힘에 묶여버리는 것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영도, 6,000마리나 되는 떼귀신들도 예수님 앞에서는 스스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도, 그리고 그 사람이 속한 세상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던 막강한 악령이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누가 더 셉니까? 누가 더 능력있습니까? 악령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악령은 자신을 위해 삶 전체를 내어준 그 사람의 인생까지도 망가뜨렸습니다. 아얘 사람들이 접근하려 들지 않는 더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그 악한 영을 내쫓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선합니까? 또 누가 더 이 사람을 사랑합니까? 그것도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서 누가 더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진정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며, 누가 더 우리 인생을 진짜로 잘 되게 해 줄 가능성이 더 큽니까? 예수님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짜 복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래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삶과 존재 속에 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악한 영의 힘을 제어하시고 그 힘을 무력화 시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영향력 때문에 우리 안에 생겨났던 허무함, 갈증, 두려움, 박탈감, 집착과 중독 등 우리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수많은 문제들까지 다 제자리로 돌려놓으실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복음입니다.
귀신에게서 자유함을 얻은 그 사람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귀신 들린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 사람이 옷을 입고 있다니요. 또 이 사람이 얌전히 앉아 있다니요. 이것은 그 동안 이 사람의 존재와 마음을 차지하고 앉아서 주인노릇하던 악한 영이 완전히 떠나갔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는 드디어 정상적인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망가지고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건강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거라사를 떠나시면서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가족에게 알리라”고 하셨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심으로써 마지막으로 이 사람을 버렸고, 그래서 마지막 아픔이 되었던 가족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 가족에게 다시 받아들여지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악한 영을 내어쫓고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은 이렇게 온전합니다. 그 사람을 원래의 그 사람으로 돌려보내고, 원래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냅니다. 악한 영이 떠나게 하고 잃어버리게 만든 것들을 다시 찾게 해 주십니다.
20절에 광인에 대한 마지막 증언이 나옵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그 광인이, 그 누구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었던 그 광인이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방 땅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땅의 제자가 되었고, 가장 강력한 증거를 지닌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손댈 수 없었던 악한 영을 내쫓으시고 그 악한 영 때문에 완전히 망가져 버린 인생을 다시 고치시고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실 능력이 우리 주님께는 있습니다. 광인을 전도자가 되게 하시는 능력도 있습니다. 여러분, 광인이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확실한 흔적을 자기 인생과 존재 속에 지닌 그런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가장 심하게 악한 영에 사로잡혀 무덤 사이로만 다니던 그가 데가볼리의 거리를 다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확실하게 전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변화입니까?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 어떤 상태에 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 주님입니다. 나의 상황과 상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능력이며, 그 능력을 믿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악한 것들, 더러운 것들, 그리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기를 바라십니다. 거라사의 광인처럼 왕되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이 예배의 자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또 자신을 자해하고 있던 광인도 고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광인을 고치셔서 이방 땅에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 삼으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주님은 완전히 망가져 버린 한 인생도 가장 아름답게 고치시는 능력있는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 나가십시오. 언제나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그리고 거듭 거듭 여러분의 인생과 마음을 그 분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그 분께서 고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께서 다시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있는 악한 것들을 향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존재 속에도 참된 변화와 회복이 일어나 우리 모두가 참되고 확실한 주님의 증인이 되는 은혜를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