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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3.03. 주일예배 -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마가복음 21)

막0421to34 -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마가19).pdf


20130303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4장 21-34절



아마 여러분에게도 어떤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항상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오래 전에 저를 찾아왔던 어떤 집사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집사님은 그 이전에도 저와 알고 지냈던 분이었는데, 하루는 아주 흥분한 얼굴로 저를 찾아와서는 너무나 기쁘고 놀랐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저 아주 놀라운 발견을 했습니다. 성경에도 빈익빈 부익부 법칙이 있던데요?” 저도 놀라서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늘 본문의 25절 말씀을 보여주면서 “여기,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라고 되어 있쟎아요. 하나님도 부자를 더 사랑하시나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집사님은 평소에 물질적인 축복과 빨리 부자가 되는 일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분인데 역시 관심사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른 모양인지 전혀 상관없는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희망사항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 드렸더니 굉장히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우리가 이 비유를 통해 배운 것은 하나님은 말씀을 씨앗으로 뿌리는 농부시고 우리는 그 씨앗을 받아들이는 땅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열매를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땅이 되어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장애물들을 제거해 버리고 두툼한 믿음의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뿌리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의지와 관심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공부하며 은혜를 나눌 말씀은 이 모든 과정, 그러니까 씨앗을 받아들이고 키우고 열매맺는 과정 중에서 특별히 씨앗을 받아들이는 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참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씨앗을 받아들이는 일, 우리의 심령에 뿌려지는 말씀을 잘 듣고 받아들이는 일이 아무리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그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길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애석한 것은 이 이야기 또한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해시켜주시려고 덧붙여 주신 말씀이 또다시 듣는 사람들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도전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더 잘 들어야 한다고, 앞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지금까지보다도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더 제대로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도전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어디서 납니까? 바로 들음에서 납니다. 그래서 그 들음이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든, 혹은 직접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든 우리가 더 잘 들어야 한다는 주님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더 잘 듣고 더 제대로 듣는 사람이 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이 쉽지 않은 말씀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굉장히 중요하고 값진 도전을 던져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전보다 더 깊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서 말씀을 들으라고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어두운 방에 앉아있던 어떤 사람이 일어서서 방 바깥으로 나가서 등불을 가져옵니다. 왜 그럴까요? 어두운 곳을 비추기 위해서 입니다. 그 방을 환하게 밝히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등불을 가져와서는 갑자기 낮은 평상 아래로 밀어 넣습니다. 아니, 아얘 커다란 되빡을 찾더니 갑자기 그 안에 넣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이주일이나 심형래식 코메디입니다. 다른 사람을 웃기려고 하거나 의아하게 만들 요량이 아니라면 등불을 가져와서 낮은 평상 아래나 심지어는 되빡을 엎고서 그 아래에 놓지는 않습니다. 그건 등불을 가져오는 원래 목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전해야할 중요한 말씀을 전하실 때면 주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비유는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그것보다 명확한 것이 없고, 기억하기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 내용에 딱 맞는 그림을 그려주니까요. 그러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답을 꽁꽁 감추고 있는, 절대로 그 뜻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맙니다. 우리 주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은 원래부터 그것을 수수께끼로 삼기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알아들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시기는 하셨지만, 원래는 더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더 확실히 기억하고 잊지 않게 해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모든 비유들을 등대 위에 올려 놓을 등불로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평상 아래 놓여진 등불이 되었습니다. 되빡 아래 숨겨진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애석하게도 그 비유를 알아들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등잔불을 켜서 평상아래 두고, 되빡 속에 감춘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 이전보다 어둠은 더 짙어진 것이죠.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다시 등불을 등잔 위에 올려놓으면 됩니다. 숨겨진 등불을 다시 꺼내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빛은 더 환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알려줄 때, 처음부터 답을 알려주는 방법도 있지만, 처음에는 도통 무엇을 가르치기 위해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게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알려주어야 할 것을 탁 꺼내놓는 그런 방법도 있습니다. 특히 꼭 알려주어야 할 것, 그리고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을 알려주어야 할 때는 앞의 방법보다는 뒤쪽의 방법이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든다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처음부터 여러분에게 “우리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우주는 우리가 상상 하는 것 보다 너무 크기 때문에 지구상에서 쓰는 km 단위로는 나타내기가 힘듭니다. 그래도 km로 나타내면 0이 몇 개나 될까요? 빛이 1년을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합니다. km로는 9조 5천억km입니다. 그런데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붙박이 별이 4.2광년이고 가장 가까운 은하가 250만 광년입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먼 은하는 약 120억 광년입니다. 그럼 거기까지 도대체 0을 몇 개나 붙여야 될까요? 그러면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로 우주여행을 간다고 가정을 해보면 어떨까요? 가장 가까운 달은 약 170일 정도 걸리고, 태양까지는 약 170년, 토성까지는 약 1700년, 가장 가까운 별들, 그러니까 항성들까지는 4,600만년, 은하철도 999에서 나오는 철이가 찾아가는 안드로메다 은하까지는 무슨 욕같지만 약 20조년이 걸립니다. 성도 여러분, 그런데 바로 이런 엄청난 우주를 우리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우리 아버지께서 말씀만으로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앞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다가도 뒤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와!”합니다. 여기 저기서 도통하는 소리가 들려오죠. 하나님을 영 다른 분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감추인 것이 드러나게 될 때 나타나는 효과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더 잘 드러내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자들이 그것을 다 알아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꽁꽁 감추어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드러나게 될 때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듯 비유가 제자들의 영혼 속에, 그리고 우리들의 영혼 속에 등불이 되어 찬란하게 빛나게 될 날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드러내기 위해서 숨기셨고, 나타내기 위해서 감추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등불이었습니다. 앞으로 찬란한 열매로 빛나게 될 씨앗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비유를 뿌리셨던 것입니다. 그 비유 속에 들어있는 씨앗이 그만큼 중요한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씨앗이 중요한 만큼 땅도 중요합니다. 비유가 중요하고, 그 속의 진리가 중요한만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귀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말씀드린 대로 들을 사람은 듣고 말 사람은 말아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들을 귀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들어라, 그렇게 해서라도 꼭 들어야 한다는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갑자기 마을 이장이 마이크를 틀더니 이런 방송을 합니다. “아~ 아~ 이장입니다~. 잘 들리시죠? 빨리 집에 있는 포대들 챙겨서 마을회관으로 나오세요.” 그리고서 이장은 방송을 뚝 끊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무슨 일일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정말 별의 별 상상을 다하겠죠.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서 가지고 나갈 부대의 크기를 정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집히는 대로 아무 부대나 가지가 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뭘 받을까 생각하면서 큰 부대를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또 어떤 일을 시킬까? 지난 번 마을 회관 앞 돌담 쌓는다더니 그 일 시키려나 하고 머리를 굴려서 제일 작은 부대를 챙겨가지고 나갑니다. 막상 나가보니 이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가지고 오신 포대자루에 거기 있는 쌓여있는 감자를 담아 가져가세요.” 마을 사람들은 신이 나서 감자를 담습니다. 제일 작은 부대를 가지고 온 사람은 김이 샜죠. 아무튼 저마다 다 담아서 돌아가려고 하자 이장이 다시 말합니다. “아참. 그런데, 이 감자를 주신 양반이 조건을 달았습니다. 제일 작은 포대를 가지고 오신 분은 그 포대를 제일 큰 포대를 가지고 오신 분에게 그 포대에 담은 것까지 줘야 한답니다.” 


이것이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라리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가장 작은 부대를 가지고 나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관심 없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기대도 없이 듣는 사람입니다. 가장 큰 부대를 가지고 나간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최대한 진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큰 믿음을 준비하고서 아주 주의 깊게 듣는 사람입니다. 가장 큰 부대를 가지고 간 사람은 그 부대보다도 더 많은 것, 더 풍성한 것, 더 놀라운 것을 보너스로 받습니다. 그러나, 작은 부대를 가지고 가거나 아얘 부대를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작은 부대에 담긴 작은 것까지 모두 빼앗기고 맙니다. 영적인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현실세계에서보다도 더 매몰찬 빈익빈 부익부 법칙이 존재합니다. 앞의 이야기에 나온 집사님이 방향을 잘못 집어서 그렇지 법칙 하나는 제대로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 법이 어디있느냐고 아무리 따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담아서 주시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모습을 하나님을 대하는 모습으로 평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을 헤아린 그 헤이림으로 헤아려서 우리를 대우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삼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희 귀에 어떤 말씀이 들리든 그 말씀에 온통 너희의 관심을 쏟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관심의 크기가 우리의 말씀을 들을 때 사용하는 부대의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부대의 크기에 따라 내가 듣는 말씀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의 은혜의 양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듣는가 여러분의 관심을 온통 거기에 쏟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풍성함을 담기 위해서 큰 부대자루를 준비해 놓고서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가져다 줄 영혼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여러분의 영혼의 입을 크게 벌리고 계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만큼은, 그 때가 읽을 때이건 들을 때이건 묵상할 때이건 간에 우리의 마음을 온통 거기에 쏟아야 합니다. 바로 그 관심의 차이, 그 열정의 차이가 우리의 영적인 풍성함을 결정하고, 말씀을 통해 얻는 은혜와 능력의 크기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깨뜨리기 위해서 두 개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첫번째 비유는 밭에 씨앗을 뿌린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게으른 농부가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도 두지 않았는데, 그저 시간만 흘려보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씨앗이 차곡 차곡 자라서 열매가 맺혀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겨자씨 한 알이 심겨졌습니다. 너무 너무 작은 씨앗이라서 그 씨앗에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큰 가지가 생길만큼 크게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정도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비유가 모두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 두 가지 비유 속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뿌려진 씨앗이 무시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비유에서 농부는 뿌려진 씨앗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두번째 비유에서도 뿌려진 겨자씨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작기 때문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이 천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 씨앗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주님은 뿌리는 자가 무엇을 뿌린다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으로 뿌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두 비유 속에서는 그 씨앗이 하늘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합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밭에 하나님의 말씀을 씨앗을 심으시는데, 그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에 뿌리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짜로 우리 마음에 뿌리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또 그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늘나라도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심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 속에 주시는 하늘나라는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작은 씨앗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관심해 하며 무게있고 가치있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들려오는 모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들려오는 것들을 놓쳐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들려오는 것들이 아무리 하찮고 작아보이더라도, 지금 당장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그 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들려오는 것, 지금 내 귀를 통해 내 마음에 뿌려지는 것을 놓치면 하늘나라를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두 비유의 결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무관심하게 여기는 작은 씨앗들이었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것들이 바로 풍성한 열매와 커다란 나무로 변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씨앗으로 뿌려집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풍성한 열매가 되고, 수많은 새들이 깃들일만큼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씨앗에 무관심해 하고, 씨앗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 씨앗에서 맺혀지는 풍성한 열매와 평안과 안식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하늘나라가 충분히 커졌을 때, 그 때만 알 수 있는 그 풍성함과 평안한 안식을 함께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에 우리의 신앙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대부분이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십년은 훌쩍 넘기셨을 것입니다. 수십년이 되신 분들도 계시고 제 나이보다 더 오래 믿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우리의 마음에 풍성한 만족이 없고, 든든한 평안과 안식이 없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하늘나라가 거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속에 하늘나라가 전혀 자라나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나를 만족시킬만큼도 나에게 평안을 줄 만큼도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안타까운 일이 생겨났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씨앗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두 비유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라는 씨앗은 반드시 풍성함과 평안함으로 저절로 자라나게 되어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만약 그 풍성함과 평안함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씨앗이 제대로 뿌려진 적이 없다고 밖에는, 그래서 씨앗이 없는 것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씨앗이 없을까요? 왜 그 긴 세월동안 예수를 믿었는데도 아직도 내 마음 속에 하늘나라의 씨앗이 뿌려진 적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무관심 때문입니다. 그 긴 세월동안 수없이 뿌려진 씨앗에 대해서 깊고 진지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을 씨앗으로 삼아서 우리 마음에 뿌리시는 하늘나라를 애초부터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늘나라가 커져서 만들어 내는 풍성함과 평안한 안식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말씀에 대한 무관심이 더 심각한 문제인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오늘 비유들을 보면 그 결말로 추수와 안식이 소개되고 있는데요.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는 우리가 마지막에 가게 될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단어들입니다. ‘마지막 추수 후에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치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늘나라를 놓치게 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 하늘나라는 정말 중요한 나라입니까? 반드시 가야 하는 나라, 가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그런 절실한 나라입니까? 지금 여기서도 마음에 품고서 그 능력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그런 나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 밭에 뿌려지는 말씀의 씨앗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며 하나도 놓치지 말고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작지만, 무시할만큼 작지만 결국에는 하늘나라가 될 소중한 씨앗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것을 놓치면 그 씨앗 속에 들어있는 하늘나라를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 뿌려져서 지금 우리 마음과 영혼을 하늘나라의 은혜와 평강으로 채우고 또 마지막에는 우리를 저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무엇을 듣는가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생각하고 그 말씀을 받기 위해서 큰 부대를 준비한 사람들은 더 많이 받겠지만, 말씀을 작게 생각해서 작은 부대를 준비한 사람들은 작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뿌려지는 씨앗을 잘 받아왔다면 앞으로는 더욱 더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더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혹시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이 속에 하늘나라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무관심하게 지내오셨다면 오늘부터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 밭에 뿌리시는 하늘나라의 씨앗에 깊고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풍성함도 참된 평안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 주지 못합니다. 이 씨앗만이 여러분에게 풍성함과 평안을 주고, 여러분을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좋은 땅이 되라고 하셨던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주의 깊게 듣는 복된 귀가 되라고, 말씀을 담는 큰 되빡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거기 담아주시는 하늘나라를, 그 풍성함과 평안을 하나도 놓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씨앗이 작아보인다고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하늘나라가 담겨져 있습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모든 말씀들을 하늘나라처럼 소중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항상 무엇을 듣는가에 주의를 기울이셔서 있는 사람이 더 많이 받는 이 복을 놓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