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401to20 -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마가복음 18).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4장 1-20절
겨울이 언제 끝나나 했는데, 이제 슬슬 겨울도 끝나 가는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봄은 어디서 부터 올까요? 혹자는 봄은 여인의 마음에서부터 온다고 하지만, 봄은 실은 농부의 마음에서부터 옵니다. 봄이 다가오면 농부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한 해 농사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이 봄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바로 씨를 뿌릴 준비를 하는 일이고 또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농부들 중에서 취미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사가 잘 되든 못 되든 신경쓰지 않는 농사꾼은 없습니다. 씨앗을 뿌리면서 열매를 생각하지 않는 농부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씨앗을 뿌리는 것은 언제나 전혀 예외 없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도 최대한 많이 거두기 위해서 씨앗을 뿌립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러한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분은 비유 속에서 “씨 뿌리는 자”로 등장하십니다. 왜 두 분이 씨를 뿌리실까요? 이유는 똑같습니다. 씨 뿌리는 것이 두 분의 취미라서가 아닙니다. 씨 뿌리는 일을 해 보고 싶으셔서도 아닙니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그것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거두기 위해서 씨를 뿌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가장 중요한 초점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시고 그래서 항상 씨앗을 뿌리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것은 열매를 얻기위한 것이라는 것, 그래서 땅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고, 그것도 될 수 있는대로 많이 맺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옛날 농사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고랑을 파고 거기에만 씨앗을 뿌립니다. 그런데, 옛날 유대인들은 넓은 땅이 있으면 씨앗 주머니를 옆에 메고 나가 그냥 씨앗을 휙휙 뿌립니다. 그리고 나서 그 땅을 갈아엎습니다. 씨앗을 이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뿌리는 이유는 옛날 예수님이 사셨던 팔레스타인의 토양은 오늘 본문에 나온 여러가지 종류의 땅이 한데 섞여 있는 그런 곳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밭 사이로 난 길도 있고, 바위 위에 흙만 얇게 덮혀있는 땅도 있고, 아직은 싹트지 않은 가시떨기 씨앗이 섞여 있는 땅도 있고, 좋은 땅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땅에 우리나라 밭 갈듯이 고랑부터 만들고 나서 씨앗을 뿌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씨앗을 뿌리는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고 나서 밭을 갈다보니 씨앗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땅 모두에 떨어지게 되었구요. 이 말씀의 요지는 씨앗은 땅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어떤 땅에는 뿌리지고 어떤 땅에는 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땅의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땅에 고루 뿌려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열매가 없는 것은 씨앗에 문제가 있거나 씨를 뿌리는 농부가 특정한 땅을 왕따시켰기 때문이 아니라 땅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이렇다 보니 모든 씨앗이 다 열매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길에 떨어진 씨앗은 새가 주워 먹어버렸고,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해 햇빛이 비취자 말라죽어 버렸고, 가시떨기 씨앗이 숨어있는 땅에 떨어진 씨앗은 더 빨리 자란 가시떨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했고, 결국 열매를 맺은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맺혀진 열매가 30배, 60배, 100배가 되었기 때문에 농부의 입장에서는 손해 본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땅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길가 보다는 흙이 얇은 돌밭이 나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돌밭보다는 가시떨기밭이 좋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떨기밭보다는 좋은 땅이 더 좋구요. 그렇지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포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은 것은 좋은 땅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밭들은 다 밭들간의 토질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리고 그것에 따라 씨앗을 자라게 정도에도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습니다. 세 종류의 땅은 모두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농부의 목적이 열매를 거두어 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결국 이 세 종류의 땅이 농부의 바램과 기대를 저버린 실패한 땅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뭐 어려운 것이 있었습니까? 이해하시기 힘드셨나요? 아니죠. 너무 너무 쉬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의 동일한 문화 속에서 살아갔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더더욱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 이 이야기를 진짜로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겠습니다. 한 번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입도 없습니다. 이빨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씹고 모든 것을 삼켜버립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어렵나요? 시간을 좀 드릴까요? 그 답은 바로 시간입니다. 수수께끼는 그것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나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알아들어도 답을 알 수 없는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원래 수수께끼입니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지만 알아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은 결코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수수께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한 것은 군중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제자들과 사도들도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말씀이기는 한 것 같은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이 비유가 도데체 무슨 뜻이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물론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수수께끼의 답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그대신 예수님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아무에게나 알려주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래 그런 사람들 중에 제자들과 열 두 사도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만 알아듣게 하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사람들까지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도 답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주신 이유는 이것이 모든 비유를 이해하는 기초 중의 기초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기초가 되는 것은 단지 쉬운 비유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 속에는 다른 모든 비유를 통해 천국을 보고 또 그 천국을 얻을 수 있는 기초적인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기초였던 것입니다. 오늘 비유는 마치 수학에서 1+1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1+1은 2입니다. 가장 쉬운 연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수학의 기초인 이유는 단순히 쉽기 때문이 아니라 이게 깨지면 수학은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래서 그 어떤 비유보다도 중요했고, 그래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알아서 해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른다면 질문을 해야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꼭 알아들어야만 한다는 뜻으로 덧붙이신 말씀이었습니다.
다행이 제자들과 열 두 사도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비유를 깨닫기 위해서, 수수께끼의 정답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쓴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들이 군중들처럼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알아들은 척 하거나, 나는 그게 무슨 뜻이든 전혀 상관 없다고 그저 예수님이나 보고 내게 필요한 은혜나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 이 세상에 이 중요한 비유의 의미를 알게 된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물었기 때문에, 알려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진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있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도 그 중요한 비유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또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들도 그런 복을 덤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뭐라고 뭐라고 수많은 구실과 이유를 가져다 댄다고 해도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이건 나와는 상관없다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한 태도도, 괜챦은 태도도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해 보면 성경말씀의 뜻을 밝혀주는 데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부분은 아얘 듣지 않으시다가 삶에 적용하는 부분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막상 그러시는 분들은 별로 문제를 느끼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것은 실제로 굉장히 큰 문제이고 굉장히 위험한 태도입니다. 요즘 텔레비젼을 보면 케이블 방송에서 하루 종일 유명한 목회자들의 설교가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송합니다만 거기 나오는 모든 설교들이 다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설교들이 아닙니다. 이단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정말 위험한, 오히려 바른 신앙을 망가뜨리는 이야기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방송에서 참된 설교들도 많이 나오죠. 문제는 텔레비젼에서는 이 두 가지 설교들이 무차별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으며, 성도들이 이 모든 설교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분별력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기독교적인지,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스스로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한 분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듣기에는 A목사님의 설교는 정말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가 맞습니다. 그런데 B목사님의 설교는 아무리 양보해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고의 틀 자체가 세속적이지 기독교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분의 성도가 이 두 가지 설교에 모두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죠. 1+1=2라고 해도 아멘이구요. 다른 사람이 1+1=3이라고 해도 아멘입니다. 둘 중의 하나는 완전히 틀린 것인데 둘다 아멘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성경이, 이 하나님의 말씀이 도대체 원래는 무슨 뜻인가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뜻과 의미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적용만 하려하고 은혜만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은혜는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너무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더 위험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은혜가 아니면 아얘 받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바른 은혜가 어디서 옵니까? 바른 해석과 바른 해석을 통해서 얻어지는 바른 의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밝혀진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밝혀줄 때, 그 때 생겨나는 것이 바로 바른 은혜입니다. 바른 은혜가 아니면 오히려 내가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 우리의 귀를 더 쫑긋 세워야 할 부분은 바로 말씀이 해석되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진리에 관심이 있는 영혼은 이 진리가 제대로 해석되기만 해도, 그것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큰 기쁨을 얻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거듭난 영혼의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아주 심각하게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석해서 들려주실 때 뜨거워졌습니다. 해석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도 몰랐지만 이미 그 때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의 예는 베뢰아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나 데살로니가에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을 보면 그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가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어떻게 해서 베뢰아 사람들은 믿는 자들이 많아졌습니까? 노예나 하층민들 뿐만 아니라 그 예수믿기 힘든 귀부인들까지 예수를 많이 믿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설교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진짜 진리가 맞는가 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을 핍박하려고 할 때, 그들은 오히려 깊고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진지하지 못한 것은 결코 그 사람의 스타일이 아닙니다. 태어나기를 애초부터 진지할 수 없도록 태어났기 때문에 진지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희 둘째가 정말 자유분망한 아이입니다. 정말 누굴닮아 그런지 정말 1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부시럭 거립니다. 또 얼마나 짠돌이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진지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아낌없이 투자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레고입니다. 엄마 아빠 생일선물 사는데 5천원 쓰는 것도 벌벌 떠는 아이가 레고를 사기 위해서는 1년 동안 모은 돈이 전혀 아깝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번잡한 아이가 레고만 붙잡으면 몇 시간이고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얼마나 진지한지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그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거기 관심이 있고 거기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지함은 관심과 애정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 스타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진지하지 않은 사람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진지하게 대하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 진지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그 말씀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진실로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대해도 괜찮다고, 힘들고 피곤하니까 내가 다 이해한다고 말씀하실까요? 너 원래 스타일이 그러니까 너는 말씀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지는 일에서 열외라고 우리를 빼주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백 번 양보해서 말씀에 대해서 진지해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스타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절대로 그러실 수가 없습니다. 그걸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넘어가 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해 주신 설명의 첫 마디는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하지 못한 성도들을 못 본척 할 수 없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 씨앗을 뿌리는 농부이십니다. 그 씨앗에서 열매를 거두어 들이려고 씨앗을 뿌리는 농부이십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위해서 뿌리는 씨앗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말씀에 관심이 없는 성도, 그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성도를 그냥 문제없다고 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주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열매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고 또 그 통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오실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알려주는 약속과 선언도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에 생겨나고 또 성장해 갑니다. 모든 복에 대한 약속들이 다 말씀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설명도 이 말씀 속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만나는 것 또한 이 말씀을 통해서 입니다. 이 말씀 속에 복음이 있고, 이 말씀 속에 우리를 위한 교훈이 있습니다. 여기 이 속에 우리를 변화시키고 만족시키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말씀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위로가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이 말씀 속에서 나옵니다. 말씀대로 위로를 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이며 그래서 우리를 참으로 치료하고 강건하게 하는 그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위로는 결코 설교자의 달콤한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든, 무엇을 원하든 그것이 다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귀하게 여기며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말씀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고 또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는 그 어떤 확신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또 은혜를 받았다고 한들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조차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일차적으로 그가 이 말씀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그 태도가 그 사람의 영적인 본모습이며 또 현주소이며 하나님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 또 읽혀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 자신의 태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든, 그리고 나의 태도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무게를 두고 있든 상관없이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 여기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그 분이 우리에게 뿌리는 씨앗이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전부이니까요.
오늘도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의 씨앗을 받았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씨앗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이 귀한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 씨앗은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뿌린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듣는 말씀은 모두가 다 씨앗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받은 이 씨앗 또한 열매를 얻기 위해서 뿌리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씨앗을 뿌리시면서 원하시는 열매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말씀에 대한 진지한 태도”입니다. 들려오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뿌리시는 귀한 씨앗으로 여기게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첫 열매입니다.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어떻게 들어왔는가? 말씀을 듣는 나의 태도에 어떤 문제는 없는가? 말씀을 듣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내가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그것이 나의 진짜 문제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설교를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이 뿌리시는 귀한 씨앗을 받는 심정으로,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들으셨습니까? 설교를 들으시는 동안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앗인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뜨거워지셨습니까? 내 마음이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끼셨고, 이제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는 자각을 얻으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가장 기본적인 비유입니다. 모든 말씀을 들을 때, 기초가 되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비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이해해야 하며, 이 비유를 소화해야 합니다. 씨앗 중에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만 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씨앗으로 여겨야 합니다.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오늘은 이 씨앗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여러분의 영혼 속에 처음 뿌리시는 첫번 씨앗으로 그렇게 귀하게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첫번 씨앗을 받아들여 우리의 영혼을 말씀을 향한 진지한 사랑으로 채워간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열매로 가득 찰 것이고,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칭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복되고 기름진 영혼을 지닌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비유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면서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열매맺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무엇인지 하나씩 짚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
- 말씀을 읽고 듣는 우리의 태도가 온전히 새로워지도록. 우리 모두에게는 설교를 들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좋지 못한 습관이 있습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할 때 그런 습관들이 있는데, 이번에 하나님께 무지하게 혼났습니다. 먼저 이 습관들이 청산되도록, 내가 이런 습관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도록 기도하겠습니다.
- 내가 적용이나 은혜가 되는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과 그 의미 자체를 더 귀하게 여길 수 있게 해 달라고.
- 내가 듣는 모든 말씀들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열매를 위해 뿌리시는 귀하디 귀한 씨앗으로 여기도록, 영혼을 깊이 파고 그 말씀들을 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