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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3.18. 새벽예배 -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한복음99)


요1601to11 -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한99).pdf


20130318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16장 1-11절


암과 같은 질병이, 특히 너무 진행이 많이 된 상태에서 발견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의사들이 그것을 대치하는 방법과 서양의 의사들이 그것을 대치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먼저 보호자들을 불러서 의논하고 질병을 환자에게 정확하게 알려야할지 그렇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게 일반적이지만 서양의 의사들은 그 질병을 환자에게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그렇게 해서 환자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서 질병과 그 뒤의 일을 받아들에게 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서양사람들과 우리나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나 감정적이냐 이성적이냐 하는 차이가 있기도 하고 모두 일장일단이 있기도 하지만 저는 서양의 방식이 더 바람직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정확하게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자들이 물어보지도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걱정만 더해 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물론 고난에 대한, 세상의 미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믿음으로 인한 고난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그 고난이 오는 것도 아니고, 사실 예수를 믿는 일에 그런 일이 포함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굉장히 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결코 그 일이 자신에게 심각한 손해나 어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런 기대에 맞춰 아무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분홍빛 꿈만 꾸다가 어려움을 겪으면 예수님 말씀대로 ‘실족’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신앙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실제로 현실 속에서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죠.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고 복받는다는 이야기만 해주면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죄와 심판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요즘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인지라 설교에서 많이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죄와 심판은 완전히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죄와 죄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아서 어떤 사람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되고 그래서 죄와 가까이 하는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 그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른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제자들이 당장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어려움이 닥칠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일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어려움을 잘 받아들이고 견디게 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성도들은 대개 설교에서 좋은 이야기만, 위로가 되는 이야기만 듣기를 원합니다. 사실 설교자들도 그렇게 해 주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큰일납니다. 예고해야할 것을 예고하지 않고 경고해야할 것을 경고하지 않으면 그것이 신앙적으로 큰 위험과 실패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별로 관심이 없고 또 듣기에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할 이야기는 해 주어야 하고 들을 이야기는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가 다 안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방법에는 달콤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프고 불편한 사랑도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뒤쪽의 사랑이 진짜 사랑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는 그럴 때가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싫어하는 이야기이고, 또 실망스러워하며 당장은 두려워하게 만들 그런 이야기였지만 예수님은 떠나실 것이며, 그리고 나면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게 될 것과 또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예수님께서 앞에서도 말씀하셨듯이 보혜사 성령 때문입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님은 성령님을 자신보다 훨씬 더 나은 보혜사로 말씀하고 계시며, 그 분에게 보혜사의 역할을 맡기시기 위해서 떠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은 그래서 그러한 제자들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성령님의 역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에 대한 성령님의 역할은 재판관의 역할입니다. 세상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성령님의 이러한 역할 자체도 그렇지만, 사실 갑자기 여기서 성령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생소하고 의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셔야 성령님께서 오시기 때문에 자신이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는데, 갑자기 그 성령님이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이 두 가지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쉽게 연결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앞으로 예수님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해야 하는 제자들에게 굉장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말씀입니다. 


꼬마 아이가 별 잘못도 없이 덩치 큰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지만 이 꼬마아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가 죽지 않고 당당하게 버틸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무언가 그 일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금방 아빠가 와서 그 덩치 큰 아이를 혼내줄 것을 알고 있다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너는 이제 큰 일 났다!”고 오히려 그 아이를 걱정할 여유까지 생기지 않을까요? 만약 신앙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 때문에 나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이 세상 전체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책임을 따져 물으실 것입니다. 잘못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혔으니까요. 성경에 ‘신원’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탄원을 들으시고 반드시 그에 맞는 응답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신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결코 자녀들과 백성들의 탄원을 무시하시거나 모른 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모른채 하지 않으시고 그 책임을 물으시고 책망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 성도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고 손해를 볼 때, 그것 때문에 주눅이 들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갚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에는 내 손을 들어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세상을 책망하실 성령님에 대한 말씀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런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첫째로 성령님께서 오시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이 세상이 주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책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어서 성령님의 책망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성령님은 의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 세상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는 그 세상을 책망하실 것입니다. 세째로 성령님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는 시점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이후이기 때문에 그 십자가 위에서 이미 사탄이 심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을 계속 해서 따르느라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는 성령님의 책망을 듣기에 충분한 사유가 됩니다. 


여러분, 세상이 참된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는 바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은 그 자체로 이 세상을 향한 잣대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다가 그 믿음 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움과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면 그것 때문에 주눅들거나 혹은 낙심하여 믿음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법정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받을 신앙적인 어려움과 고통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당황하지 않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또 그러한 어려움과 고통의 의미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개인적인 고통과 고난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세상의 양심을 향한 책망이요 징벌입니다. 십자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렇게 해서 점점 더 스스로 어두워져 가고 강퍅해져 가다가 결국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지 않는 고난 만들어서 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혹시 믿음 때문에 어려움이 오거든 그 어려움 때문에 믿음을 잃지 마시고, 오늘 말씀을 생각하며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니 견딜 수 있을 줄로 믿고 끝까지 믿음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에게는 상을 주시고, 우리를 힘들게 했던 세상은 벌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어려움 때문에 실족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