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101to11 -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2013 종려주일).pdf
설교본문 : 마태복음 21장 1-11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는 절기이름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그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서 종려나무 가지, 그러니까 야자수의 이파리를 흔들었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이고, 주로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돌아올 때, 그것을 환영하고 환호하기 위해서 흔들었던 것이 종려나무 이파리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승리하신 왕으로 여기고 또 환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환영은 결국 그 다음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을 시작으로 보낼 한 주간을 고난주간, 혹은 수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일은 부활절로 지키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오늘부터 시작해서 다음 주일까지 8일동안 다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주간은 성도들에게는 조금 특별한 한 주간이 되어야 합니다. 의식적이고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그 예수님과 나의 삶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를 많이 묵상해야 합니다. 평상시 보다는 훨씬 더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시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시간을 내셔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또 기도하는 시간을 꼭 가지셔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생하게 되살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의 장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셨던 전체 시간 중에서 예수님에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는 가장 기쁘고 즐거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한 왕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셨으며,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서 반기며 맞이하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배우고 또 은혜를 얻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의 어귀에 도착한 주님은 먼저 벳바게의 맞은 편 마을로 두 명의 제자를 보내셔서 예수님께서 타고 들어가실 나귀를 준비하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말 한 마디로 나귀를 구할 수 있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나귀는 말 한 마디로 구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타고 들어가실 나귀는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 한 마디로 구해졌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면 꼭 생각나는 광고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성구사의 광고였는데요. 강대상이나 가운의 사진을 찍어놓고 큰 글씨로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적혀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광고를 볼 때마다 짓굿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내가 제자들처럼 저 회사에 가서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그 사람들은 나귀 주인처럼 두 말 않고서 공짜로 내가 달라는 것을 줄까?” 그럴리가 없죠? 아마 저를 미친사람 취급할 것입니다. 나귀는 커녕 강대상 종 하나만 달라고 해도 안 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광고는 전혀 원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의미로 말씀을 이용하면서 광고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많이 팔려고 그 말씀을 카피로 쓰는 것은 전혀 합당치 않은 일이니까요.
왕이신 예수님께서 그래도 왕답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나귀주인의 순종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귀 주인이 나귀를 내어주지 않았다면 아마 예수님은 그저 터벅 터벅 걸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그래서 제자들이 ‘주께서’라고 말했을 때, 그 ‘주’가 누구를 가리키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나귀를 내어줄 수 있었겠지만, 만약 그 말씀 한마디에 더해진 이 사람의 순종이 없었다면 그 날의 행진의 영광은 색이 바랬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태복음의 이 일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귀 주인의 헌신과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을 이루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예언을 성취하는 역할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순종과 헌신은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야로 드러내 주는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구약성경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을 이루려는 목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을 향한 진심으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어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졌고, 그렇게 예수님은 예수님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이 분이 약속된 메시야라는 더 깊은 확신을 주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어느 정도 신앙이 자라면 이제는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또 무언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참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결심을 하고 큰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말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떻게 할 때,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으며, 또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려면 우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일의 크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행하는 일의 크기나 성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의 규모나 크기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가치있고 하나님께 의미있는 일을 할 때, 오히려 너무나 작아보이는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하려고 애쓸 때, 그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아무리 하챦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말입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내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 싶어하는 나의 삶의 작은 부분, 때로는 나도 모르는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드러내시는 것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기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과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나귀 주인은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좋아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저 기쁘게 내어드렸을 뿐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그 어떤 거창한 생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작은 섬김은, 마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주었던 여인의 행동처럼 예수님의 영광을 가장 크게 빛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나도 행복하고 하나님께도 기쁘게 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려면 신앙은 결코 형식이나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마음이 들어있을 때, 하나님을 향한 진심이 들어있을 때, 그 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저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서 예수님께 환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 중에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풀어주신 날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를 환영하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벅찼겠습니까? 제자들은 자기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옷을 벗어서 길 위에 펴 드렸습니다. 옷이 모자라자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 위에 깔기도 했습니다. 왕이 행차하는 카페트를 깔아드린 것이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힘껏 흔들어 댑니다. 그리고, 입에서는 저절로 환호가 터져 나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모든 사람들이 합창하듯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승리하신 왕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환영한 것입니다.
이제 드디어 예수님은 예수님에 걸맞는 대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주님,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께 환호하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꼭 보아야 했는데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 그것도 아직 다 크지 않은 새끼나귀였습니다. 나귀도 왕이 타는 짐승 중에 하나입니다. 천천히 안전하게 움직이는데는 말보다도 훨씬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왕이 승리자로 성에 돌아올 때, 왕은 절대로 나귀를 타지 않습니다. 그것도 새끼나귀라면 더더욱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나마도 나지막한 나귀인데, 게다가 새끼나귀라면 차라리 그냥 서서 가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더 잘 보입니다. 그게 더 자신을 확실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서서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서 새끼나귀를 타고 가는 것은 마치 서 있는 사람들 틈에 낮은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지금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승리하신 왕으로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행진은 결코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결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할 구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찌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또 어찌보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대하고 강력한 왕을 기대했습니다. 모세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해방시켜 주고, 또 다시 다윗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이스라엘을 세계 최고의 나라로 만들어 줄 그런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 세상에 그런 왕으로, 그런 메시야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를 통해 예수님의 이런 예루살렘 입성이 스가랴서 말씀의 성취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과연 어떤 왕이시고 어떤 구원자이심을 알려면 그 말씀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스가랴 9장 9절과 10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온에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 말씀은 가만히 뜯어보면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은 말씀입니다. 왕이 오십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그 왕은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여기까지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이상한 부분은 이 뒤에서 부터입니다. 그 왕은 그런데 겸손합니다. 그래서 말이 아니라 병거나 가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다니는데 그것도 나귀새끼를 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왕이 에브라임, 그러니까 북 이스라엘에서 오는 병거를 쓰러뜨리고 예루살렘에서 오는 말을 넘어뜨립니다. 활도 망가뜨려 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나귀새끼를 타고 병거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말들을 쓰러뜨릴까요? 어떻게 그 모습으로 활들을 쓸모없게 만들어 버릴까요? 무슨 힘으로요? 게다가 그 왕은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만 회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왕은 이방사람에게도 화평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통치는 땅끝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왕이 사용한 힘은 무엇일까요? 나귀를 타고 이런 놀라운 일을 할 수 있게 한 그 능력은 어떤 능력일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의 능력으로 그렇게 만듭니다.
사실 이 왕의 무기가 겸손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왕의 능력이 완력이고 폭력이었다면 한 나라가 회복되면 다른 나라는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나라가 평강을 누리면 다른 나라는 평강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인류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 왕이 선포하는 평강은 한 나라가 아니라 모든 나라들을 평강하게 하며, 땅끝까지 평강하게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 왕의 무기와 능력은 사람들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 사람들은 전혀 무기가 될 수도 없고, 힘이 될 수도 없다고 여겨지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겸손말입니다. 겸손이 어떻게 무기가 될 수 있냐구요? 겸손이 어떻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냐구요? 충분히 무기가 됩니다. 충분히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하고 아무도 아프지 않게 하며, 모두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면서도 세상을 다스리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가장 높은 겸손의 자리이기 때문에 바로 그 십자가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능력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도 해 낼 수 없었던 그 놀라운 일을 십자가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왕이셨기 때문에 스가랴서의 그 이상한 말씀을 글자 그대로 성취하신 영광의 왕이 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높이는 왕, 그리고 스스로를 드러내는 왕, 힘을 휘두르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한 없이 낮추는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겸손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그 겸손으로 세상을 구하고 세상에 평강을 가져다 주는 그런 왕으로 오셨습니다. 이런 왕이신 우리 주님은 누구의 찬양을 받으시겠습니까? 어떤 이들의 섬김을 가장 기쁘게 받아주시겠습니까? 그 분은 번쩍이는 병거나 혈통 좋은 말이 아니라 어떤 집 문 앞에 아무렇게나 묶여있던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그 나귀새끼를 타고 느릿 느릿 낮은 자리에서 세상을 거니시는 그런 왕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실까요? 어떤 사람들의 환호에 마음을 기울여 들어주실까요? 호산나를 외치면서도 새끼나귀에 눈길을 주고,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는 낮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 새끼나귀 안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능력과 영광을 볼 줄 아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오르신 왕좌였음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 아닐까요?
주님은 겸손의 왕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의 다스리심 속에서 참된 평강을 누리려면 우리들 또한 주님을 닮은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 분의 다스리심 속에서 불편해 하지 않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닮은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수요일 저녁에 함께 묵상하고 있는 빌립보서의 말씀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종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낮은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누구도 흔들 수 없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평안하며 기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겸손은 단지 버리고 포기하고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참 백성이 되어, 그 분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기쁘고 평안한 삶을 살게 해 주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땅에서 하늘나라를 누리게 해 주는 놀라운 복의 통로이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 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수 있는 가장 보배로운 마음입니다.
기쁘게 나귀새끼 한 마리를 내준 이름 없는 사람의 헌신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새끼도 기쁘게 타고 가신 왕,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구원과 평강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제 높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그 밑을 느릿 느릿 걷고 있는 나지막한 나귀새끼에 여러분의 눈길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나귀새끼에 여러분의 마음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그 눈과 마음이 여러분을 평안하게 할 것입니다. 그 눈과 마음이 여러분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제가 절기 때만 되면 굉장히 감성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가스펠송이 하나 있었습니다. 오늘도 불러 드리려고 하다가 그냥 가사만 함께 묵상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읽어드릴테니까 찬찬히 함께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행복한 나귀’라는 노래입니다.
행복한 나귀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세상의 욕심에,
죄에,
나 자신에 묶여 있는 저를 풀어 주세요.
그리고 주님을 섬기게 하세요.
주님을 등에 엎고 살게 하세요.
그러면 세상은 나를 보지 않고
내 등에 엎힌 주님을 보게 되겠죠.
주님
저는 그 행복한 나귀 되고 싶어요.
그 행복한 나귀 되겠어요.
환호하는 군중이 되기 전에 나귀의 새끼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은 그 나귀새끼가 되시기 바랍니다. 겸손의 왕의 다스리심 속에서 겸손한 섬김을 받는 겸손한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종려주일의 기쁨은 겸손한 자들, 자신의 왕을 닮아 겸손한 마음을 지닌 자들의 몫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고 나귀를 닮은 겸손함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주님 주시는 평강과 기쁨이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