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720to26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4(요한108).pdf
본문 : 요한복음 17장 20-26절
그냥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성경말씀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 나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처음 읽었을 때부터 은혜를 전해준 말씀보다도 훨씬 더 큰 은혜를 주고 훨씬 더 큰 영적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저에게는 요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이 그런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그 자체로도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를 향한 사랑이 정말 구구절절히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번에 저는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기 위해서 17장 말씀들을 살피다가 이 말씀이 단순히 그런 은혜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17장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다가 새롭게 맞닥뜨린 단어는 ‘하나됨’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제자들의 하나됨,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에베소서를 설교할 때, 에베소서에서도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교회의 하나됨이라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교회의 생명은 하나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교회가 그렇게 되도록 돕고 가르치는 것이 저의 사명 중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요한복음 17장을 묵상하면서는 그 때보다도 더 강하게 이 하나됨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하나됨에 교회와 성도들의 거의 모든 것을 걸어넣고 계십니다. 성도의 보호, 성도의 기쁨, 성도의 능력이 바로 교회의 하나됨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저는 주님은 이 기도를 통해 너희도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또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순종과 노력을 댓가로 지불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맡기신 소명을 이루는 일 또한 교회의 하나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주님의 기도 속에서는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곧바로 하늘나라고 가지 않고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고, 계속해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사명이란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을 제자들에게 드러냈다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 일이 이제는 제자들을 통해 교회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도 거의 모든 성도들은 ‘전도’나 ‘선교’를 생각할 것이고,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거창한 일을 하거나 혹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떠올릴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들에는 그런 것들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전도도 해야하고, 선교도 해야하며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14장에서도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일들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훨씬 더 강력하게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23절에서도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모두 교회의 하나됨과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일이 하나로 연결된 일이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하나될 때, 그 하나된 교회를 통해서 세상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될 때,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특히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게 되고 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말씀드리면 교회가 하나되지 않으면 세상은 그만큼 예수를 믿는데 더디며,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그 분의 선하신 성품을 아는 것이 힘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엄청난 부흥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단 2퍼센트에 불과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전체를 점령해서 황제를 신으로 섬기던 로마가 두 손을 들고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때 교회는 오히려 요즘만큼도 전도나 선교에 열을 올리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할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복음은 파죽지세로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교회가 하나였기 때문에, 그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흉내낸 그런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황제나 고위층이 지방도시의 관리들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서를 올리라고 해서 작성된 문서들이 종종 발견되는데, 그 보고서들을 보면 교회를 표현하면서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으며, 내 것 네 것이 없이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는 하나된 사람들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사를 했던 사람들이 조사결과에 충격을 받았다는,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라는 그런 사견을 덧붙인 문서들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기독교가 이런 종교였기 때문에 결국 흔들리고 분열되어 있는 로마를 하나로 묶을 대안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전도였고 선교였습니다. 하나된 교회, 서로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습 자체가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원래 교회는 하나가 되어 그 안에 속한 성도들이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그 때에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려면 이 방법이 최고의 방법이고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들과 다르다는 증거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저 다르다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 다른 것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보여주는 증거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또 믿게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증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메세지와 일치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 안에서 하나된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사랑’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이시고 십자가도 사랑이시고 성경의 교훈도 모두 다 사랑이어서 사랑을 빼놓고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아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장 강력하게 드러낼 수 있는 증거는 서로 사랑하며 하나된 교회의 모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타성을 의미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기적인 인간에게 이것만큼 힘든 것이 없습니다. 모든 철학과 모든 도덕들이 이타적인 존재를 만들어 내려고 수없는 세월동안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성공하지 못했을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결코 유사이래로 단 한 번도 하나가 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며 또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 자신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게 될만큼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정말 열심을 다합니다. 정말 좋은 일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점점 더 불신이 짙어지고 있고 점점 더 거칠어 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사이에 사랑이 없고, 우리 사이에 하나됨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메세지와 일치하는 삶을 볼 수 없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 전도와 선교를 위한 우리의 애씀과 노력은 그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능력없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우리 교회에 보내신 후에, 정말 저에게 많은 요구를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벅찬데 하나님은 저에게 요한복음 17장을 통해서 아주 강한 요구를 하나 더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무튼 광현교회를 하나되어 사랑하는 교회로 가꾸어 가라”는 요구였습니다. 물론 이 말씀 뒤에는 순종하면 내가 돕겠다는 약속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기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온전히 하나되고 정말 아름답게 사랑하는 성도들의 교회가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찾는 심정으로 제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먼저 변화되면 무언가 답이 보이기 시작할 것 같기 때문에 제 영혼에 사랑을 채워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저는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구호를 외치거나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되자고 외치지 않아도, 하나되기 위한 프로그램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주님을 닮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된다며, 우리는 그저 하나되고 그저 사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서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가 없으면 그 순종도 불가능할 것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됨과 사랑을 위해서 애쓰면서도 반드시 기도를 그 중심에 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모일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흉내내는 사람이 되는 변화가 내 속에 일어나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각자의 마음에 새기고서 그 단어에 나의 작은 행동들을 맞추어 가는 노력을 시작하십시다. 다른 사람은 어떻든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실 것이고, 우리 교회를 하나된 교회로 만들어 주실 것이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처음부터 크게 가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걸음을 옮겨 놓는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저만치 사랑하는 자리, 하나된 자리로 옮겨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사랑하는 복, 하나가 되는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하나됨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을 증거하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